몬트리올, 코펜하겐, 뉴올리언스와 같은 대도시의 재즈 페스티벌과는 달리, 이 페스티벌은 프랑스 중서부 외진 곳에서 열린다. 인구 1,200명의 작은 마을에 재즈 팬 20만 명이 몰려들만큼 재즈에 깊이 파묻힐 수 있는 축제기도 하다.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재즈 신에 등장한 이들은 덴마크, 영국, 스웨덴 출신으로 제각각이지만, 현대적인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길을 제시하며 E.S.T. 이후 가장 열정적이며 창의적인 트리오라는 평가를 듣는다.
카운트 베이시, 콜맨 호킨스, 찰리 파커, 벤 웹스터, 그리고 최근의 팻 매스니까지, 많은 재즈 레전드들이 미국 중부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났거나 그곳에 정착했다. 1930년대 이 도시의 무수한 재즈클럽에서 비밥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재즈 라이브 클럽을 못 가봤다는 건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괜히 재즈라는 단어를 어려워했다면 더더욱. 음악과 분위기, 거기에 맛까지 보장하는 전통 있는 재즈 라이브 클럽에서는 누구든지 즉흥적인 재즈의 매력에 쉽게 빠질 수 있다. 무엇보다, 놀기 좋은 한여름 밤에는 재즈 라이브 클럽이 제격이다.
그는 기타리스트로 재즈신에 등장했으나 노래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프로듀서를 교체하면서 1976년 앨범 <Breezing’>에 노래 한 곡을 삽입했고, 곧 그는 크로스오버 스타로 발돋움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창법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그는, 재즈, 블루스, 가스펠, 팝을 넘나든 1950년대 최고의 스타였다. 한편으로는 39년의 짧은 인생에 7번의 결혼과 남성 편력, 폭언과 사치 행각으로 애증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뉴욕의 한 악기 매장에서 상표도 떼지 않은 기타를 들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청곡을 받아 즉석 연주를 들려준 조 패스. 파가니니와 비교될 만큼 20세기 최고의 재즈 기타리스트로 평가받은 거장이었다.
2016년에 상영한 영화 <마일스 어헤드>는 그의 일생 중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5년간의 행적에 관한 영화다. 그는 재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지만, 그에 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의외로 많다.
대만 인디음악 신에는 다수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해가는 감각적인 신진 아티스트들이 많다. 레오 왕(Leo 王)의 앨범 피처링으로 참여하며 인디 신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9m88도 그렇다. 개성 있는 마스크와 독특한 비주얼, ‘신인답지’ 않은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두루 겸비한 9m88의 음악을 만나자.
2016년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된 <I Called Him Morgan>은 1972년 뉴욕의 재즈 클럽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리 모건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그는 재즈계에 ‘The Sidewinder’라는 유명한 곡을 남긴 촉망받는 트럼펫 연주자였다.
70년의 음악 활동 동안 60장 이상의 앨범 발매와 9개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 나이 90을 바라보는 하드밥 테너 색소포니스트 소니 롤린스는, 현역 시절 음악의 답보 상태를 깨기 위해 수년간 은둔하며 자신의 시간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미식축구 유망주였던 그는 어깨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고 실의에 빠졌을 때, 어머니의 유언 한 마디에 다시 노래를 시작하였다. 뉴욕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그는 마흔이 되어서야 자신의 앨범을 냈고, 벌써 두 번의 그래미 수상자가 된 드라마틱한 성공담의 주인공이다.
현재도 많은 가수들이 그의 창법을 모방하고, 로맨틱 영화에는 그의 끈적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20세기 미국의 대중음악을 흔든 재즈 디바는 어째서 격정의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간 걸까?
100여년 전 뉴올리언스의 인기 크레올 밴드의 클라리넷 연주자로, 루이 암스트롱보다 수개월 먼저 재즈 레코딩을 하였지만, 영화 <라라랜드>에서도 언급된 거친 성격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프랑스의 국민가요 ‘Petite Fleur’는 그가 결혼식에서 아내에게 바친 곡으로 유명하다.
콜트레인의 ‘클래식’ 쿼텟의 핵심이자 애제자였던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는, 콜트레인이 프리재즈에 깊이 빠지면서 돌연 콜트레인을 떠났다. 이어 드러머 엘빈 존스도 떠나면서 ‘클래식’ 쿼텟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00년 전 4월 엘라 피츠제럴드가 탄생했고, 10월에는 델로니어스 몽크, 며칠 후에는 디지 길레스피가 태어났다. 올해 <재즈 100>이란 제목으로 많은 행사가 열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뉴올리언스의 마살리스 패밀리는 정통 재즈를 지켜나가는 저명한 음악 가문이지만, 맏아들 브랜포드는 레드 제플린을 즐겨 들으며 재즈의 일탈을 끊임없이 꿈꾼다.
1960년대 캐논볼 애덜리의 프로듀서로, 1970년대에는 자신 만의 음악으로 유명했던 데이비드 액슬로드. 1990년대 힙합 붐으로 다시 재조명을 받은 그의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 음악 세계를 살핀다.
유럽의 집시 음악에 미국의 스윙 재즈를 접목한 ‘집시 스윙’으로 재즈 스타가 된 그는, 평생 저축이나 재산이라는 개념 없이 번 돈은 그날 다 써버리는 등 집시의 삶을 산 예술가였다.
‘사랑의 도시’ 파리는 4월에 가장 아름답다. 이를 노래로 표현한 재즈 스탠더드 ‘April in Paris’는 수많은 가수와 연주자의 레퍼토리로 사랑을 받았다.
독창성을 중시하는 재즈계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니 스팃은 뛰어난 색소폰 연주 실력을 보유하고도 찰리 파커 모방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역대 최고 연주력의 아트 테이텀, 미국 본고장 재즈에 도전한 영국인 조지 쉬어링, 현대 재즈의 기수 마커스 로버츠. 이들 모두 신체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에 올라선 거장들이다.
하버드 시절부터 절친인 두 사람은 모든 창작 생활을 함께 해왔다. 졸업 무렵부터는 영화 제작과 영화 음악으로 협업하더니 드디어 <라라랜드>로 일을 냈다.
지금도 그를 성인(Saint)으로 모시는 교회가 있을 정도로, 그의 음악은 종교적이고 심오했다. 그렇다면 그의 사생활은 어땠을까? 그에게는 나이마와 앨리스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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