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를 주름잡던 뉴욕의 하드밥(Hard Bop) 거장들은 대부분 생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1930~)는 여전히 건재하다. 뉴욕에서 태어나 평생을 뉴욕에서 지낸 뉴요커 롤린스는 수년 전부터 호흡 문제로 테너 색소폰을 내려놓긴 했지만, 70여 년의 현역 활동 기간 동안 60여 장의 앨범을 냈고, 9개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와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재즈 레전드로 여전히 건재하다. 1950년대 철없던 시절엔 마약 중독과 마약을 사기 위한 무장강도 이력 등이 있는 문제아였지만, 이를 일찌감치 극복하고 자신의 다섯 번째 앨범 <Saxophone Colossus>(1956)을 명반의 반열에 올리면서 뉴욕 재즈신의 중심에 섰다. 이 앨범에 수록한 칼립소(Calypso) 리듬의 ‘St. Thomas’는 가장 유명한 재즈 스탠더드가 되었다. 카리브 해의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 출신 부모의 영향으로 그는 자주 칼립소 리듬을 채용한다.

‘St. Thomas’는 그의 어머니가 어릴 때 불러주던 민요 ‘The Lincolnshire Poacher’를 기반으로 만든 곡이다

그의 음악 활동은 70여 년에 이르며, 1953년부터 2014년까지 매년 한 장꼴로 자신의 이름으로 60여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중 수년간 전혀 앨범이 발매되지 않은 기간이 두 번 있었다. 그는 음악적 한계에 직면하거나 무언가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일체 음악을 활동을 접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스스로 음악 안식년(Musical sabbaticals)을 부여한 것이다. 한창 인기가 최고조였던 1959년 갑자기 대중으로부터 사라진 그는 1962년 앨범 <The Bridge>를 발표하며 다시 나타났다. 그는 사라진 2년 동안 자신의 연주에 대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종일 연습을 거듭했다. 뉴욕시의 윌리엄스버그 브리지(Williamsburg Bridge)는 그가 안식년 동안 색소폰을 연습하던 장소로 유명해졌다. 롤린스는 2015년에 당시의 경험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 당시 문제는 연습할 장소가 없었다는 거다. 이웃의 젊은 부인이 임신 중이었는데, 내 색소폰 소리가 시끄러워서 너무나 미안했다. 하루는 집 근처의 윌리엄스버그 브리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넓은 공간이 나왔는데 아무도 없었고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2년간 매일 연습하러 그곳으로 갔다. 하늘에다 대고 연주를 하니 음량이 향상되었다. 영원히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으나, 집사람 때문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곳처럼 하늘과 땅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2년간 매일 윌리엄스버그 브리지에 올라 연습 중인 롤린스

1차 안식년 직전의 소니 롤린스. 그는 테너색소폰, 베이스, 드럼으로 이뤄진 트리오 포맷을 좋아했다

그는 존경하던 존 콜트레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다시 슬럼프에 빠졌다. 콜트레인과는 음악과 동양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에게 책을 빌려주기도 하던 사이였다. 그는 1969년 다시 재즈신에서 사라져 2년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다.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자메이카를 방문하였고, 일본에서는 선(Zen)을 배웠다. 요가와 명상에 깊이 심취하여 인도 뭄바이 지역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안식년은 음악적인 동기라기보다 인생을 돌아보고 자신을 찾고자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2년 만에 노르웨이와 뉴욕에서 잇따라 연주 활동을 재개하면서 재즈신으로 복귀했다. 당시 <뉴요커> 지의 비평가는 “롤린스가 다시 변신하였다. 그는 회오리바람처럼 포효하며 청중을 전투로 몰고 가는 것 같았다”라고 공연 현장을 전했다.

나이 80이 넘은 2011년 빈에서 연주 중인 롤린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바 있다

한창 잘 나가던 시기에 스스로 활동을 중단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 것 외에도, 소니 롤린스에겐 다른 재즈 뮤지션과는 다른 독특한 면이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클럽 연주를 사양하고 콘서트 연주만 한다. 다음 연주를 준비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고, 매일매일의 클럽 연주에서 오는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콘서트마다 연주곡 구성을 달리하며, 다음 연주는 오늘 연주보다 훌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엄격한 기준, 청중에게 좋은 음악을 선보여야 한다는 중압감 같은 것이 그를 오랜 기간 정상의 뮤지션으로 남을 수 있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1977년 일본 오디오 업체 파이오니아는 그의 안식년을 소재로 한 TV 광고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2004년 결혼 47년 차였던 부인 루실(Lucille)과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루실은 30여 년간 그의 매니저 역할을 수행해온 각별한 존재여서 그는 한동안 힘든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이제 나이 90을 바라보는 그는 색소폰을 내려놓았지만, 몇 년 전 인터넷 방송을 통하여 팬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는 등 여전히 건강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성공한 인생을 보낸 사람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14년 인터넷 방송에서 한 재즈 교사의 질문에 답하는 롤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