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존 콜트레인을 성인(Saint)으로 모시는 교회가 있다 (이미지 출처- coltranechurch)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1926~1967)은 사후 40년째인 2007년, 미국의 신문 저널리즘, 문학적 업적과 명예, 음악적 구성의 가장 높은 기여자에게 주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 아트 부문을 수상했다. 퓰리처 위원회는 “거장다운 즉흥성과 최고의 연주력, 재즈 역사의 상징적 아이콘으로서의 위치 (his masterful improvisation, supreme musicianship and iconic centrality to the history of jazz)”를 수상 이유로 밝혔다. 재즈 역사에 있어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장 콜트레인은 한창 일할 나이인 40세에 간암으로 갑자기 사망하여 재즈 신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를 발탁하기도 했고 마약으로 인한 불안정한 생활 때문에 그를 해고하기도 했던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콜트레인의 죽음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아 보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아픈지는 전혀 몰랐다.” 라고 회고한 바 있다.

존 콜트레인이 거주했던 필라델피아 주택. 1999년 ‘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 

남들보다 늦게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색소폰을 시작했지만, 콜트레인은 두 번의 중요한 경험을 통하여 음악적으로 급성장했다. 1945년 6월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연주를 직접 눈으로 보았을 때, 그리고 1958년 10월 텔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와 같이 연주할 때였다. 1959년 발표한 앨범 <Giant Step>은 모든 곡을 스스로 작곡해 처음으로 자신의 음악을 마음껏 펼쳤다.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은 재즈 역사상 가장 어려운 코드 체인지를 적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코드 진행 방식을 ‘콜트레인 체인지(Coltrane Change)’라고 부르는데, 녹음 당시 별다른 리허설 없이 연주에 들어가 피아니스트 토미 플래너건(Tommy Flanagan)이 그의 즉흥연주를 따라잡느라 애를 먹었다고 알려진다.

"Coltrane Change"로 유명한 곡 'Giant Steps'

콜트레인은 1955년 필라델피아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나이마(Juanita Naima Grubbs)와 결혼하면서 종교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목사인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그는, 결혼 2년째에 침착하고 온화한 성격의 부인을 따라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종교적 체험을 통해 그를 괴롭혀 왔던 술과 마약을 끊는다. 나이마 전 남편의 딸을 입양한 콜트레인은 뉴욕으로 이주하여 롱아일랜드에 집을 마련한다. 한 가족이 된 세 명은 콜트레인이 홀로 그 집을 나온 1963년까지 같이 살았으며, 1966년에야 둘은 공식적으로 이혼한다.

콜트레인의 발라드 명곡 'Naima'는 첫째 부인을 위한 곡이다.

나이마는 콜트레인과의 결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곧 무언가 닥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존이 1963년 여름 집을 나갔을 때 별로 놀라지는 않았어요. 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밖에서 할 일이 있다고만 얘기했죠. 그리고는 몇 벌의 옷과 악기만을 챙겨서 떠났어요. 그는 호텔에 머물기도 했고 필라델피아의 어머니 집에 있기도 했어요. 그가 이전에 나에게 말한 것은 ‘뭔가 변화를 줘야 할 것 같다’는 게 전부였죠. 그 시기가 올 줄은 알았지만, 몹시 아팠어요. 그것을 극복하는 데 1년이 걸렸죠.”

콜트레인과 그의 첫 번째 부인 나이마. 착한 심성으로 그에게 안정감을 준 그녀는 이혼 후에도 콜트레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199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첫 번째 부인과 별거할 무렵인 1963년, 콜트레인은 디트로이트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 앨리스 맥레오드(Alice McLeod)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곧 동거에 들어갔으며 콜트레인이 공식적으로 전 부인과 이혼하기 전에 이미 아들 둘을 낳는다. 두 번째 부인이 된 앨리스 콜트레인은 재즈 연주에 하프를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며, 남편의 오랜 동지 맥코이 타이너(McCoy Tyner)가 떠난 후 콜트레인의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콜트레인은 앨리스와 함께 힌두교, 불교, 유대교의 카발라(Kaballah) 같은 다양한 종교를 체험하며 이를 음악에 구현한다. 콜트레인은 1965년 그의 최고 명반 <A Love Supreme>의 라이너 노트에 “나는 신의 축복으로 영적인 자각을 하게 되었고 보다 풍성하고 생산적인 삶으로 인도되었다”라고 고백했다. 이 앨범은 아흐마디야 이슬람(Ahmadiyya Islam) 종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종교적 체험 단계인 인정(Acknowledgement), 결심(Resolution), 수행(Pursuance), 찬송(Psalm)의 4곡으로 구성된다.

명반 <Love Supreme>의 두 번째 곡 ‘Resolution’. 프리 재즈와 종교적 영향으로 다소 난해하다 
콜트레인의 두 번째 부인 앨리스와 함께 살았던 뉴욕 헌팅턴 자택에서 그의 최고 명반 <Love Supreme> 전곡이 작곡되었다

앨리스를 만난 후 콜트레인 음악의 종교적인 색채는 더욱 강해졌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종교적 요법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보도도 있었지만, 앨리스는 이를 부인했다. 콜트레인이 사망한 후 앨리스는 독신을 맹세했고 한동안 체중 감소와 불면증을 겪으며 시련을 겪지만, 이를 타파스(tapas, 산스크리트어로 ‘고행’을 의미함)라 부르며 힌두교의 묵상과 요가를 통해 극복하게 된다. 그는 1983년 L.A. 인근 말리부(Malibu)에 힌두사원(ashram)을 세우고 은둔생활에 들어가, 수십 년간 재즈 연주를 일절 중단한 채 명상 음악에 몰두한다. 콜트레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셋을 모두 재즈 뮤지션으로 키운 그는 2006년에야 콘서트를 재개하며 대중에게 나섰으나, 바로 이듬해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하여 뉴욕에 있는 남편의 묘지 옆에 합장되었다.

앨리스 콜트레인이 힌두교에 귀의할 무렵 발표한 ‘Turiya and Ramakrishna’(1970). 그의 두 번째 악기 하프를 치듯이 피아노를 친다. 투리야(Turiya)는 그의 힌두식 이름이고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는 19세기 인도의 신비주의 종교인이다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콜트레인 부부의 묘지 

그동안 일반에 발매하지 않았던 앨리스의 힌두 명상음악은 2017년 5월 <The Ecstatic Music of Alice Coltrane>이란 제목으로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