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스 데이비스의 밴드에서 탈퇴한 존 콜트레인은, 1960년 가을 ‘클래식 쿼텟(Classic Quartet)’이라 칭송되는 최정예 콤보를 구성하여 전성기를 구가했다. 피아노의 맥코이 타이너(McCoy Tyner, 1938~), 베이스의 지미 개리슨(Jimmy Garrison, 1934~1976), 드럼의 엘빈 존스(Elvin Jones, 1927~2004)로 구성된 4인조 쿼텟은 당대 최고의 재즈 콤보로 인정받으며 대표작 <A Love Supreme>(1964)을 비롯한 콜트레인의 명반들을 배출했다.

존 콜트레인의 최전성기 ‘클래식’ 쿼텟의 1963년 벨기에 실황
존 콜트레인과 12살 아래인 맥코이 타이너. 이 사진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콤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콜트레인과는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 출신의 특별한 관계로 “콜트레인의 피아니스트(Coltrane’s Pianist)”로 갈채를 받은 맥코이 타이너는, 1965년 스스로 콤보에서 탈퇴하여 자신만의 음악 길을 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80여 장의 음반을 발표하였고, 다섯 번의 그래미상, NEA(National Endowment for Arts) 재즈 마스터상, 스타인웨이(Steinway)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재즈 피아노의 거장이 된다.

1996년 함부르크에서 존 콜트레인의 ‘Giant Step’을 솔로로 연주하는 맥코이 타이너

그는 하드밥 계열의 피아니스트로, 아르페지오(Arpegio)와 스타카토를 즐겨 쓰며 왼손으로 타악기처럼 강하게 건반을 때려 멀리서도 그의 연주임을 알 수 있다. 필라델피아 출신인 그는 동네 이웃인 버드 파웰(Bud Powell)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시작했으며, 콜트레인의 어머니와도 자주 왕래하는 친한 이웃이었다. 17세 때 자신의 영웅 콜트레인과 처음 만나 그의 집 소파에 앉아 음악에 대해 자주 얘기하는 사이가 되었고, 콜트레인이 어머니 집에 올 때마다 그 집에 놀러 가 피아노 반주를 해주곤 했다. 자연히 두 사람의 음악은 소통과 교감이 잘 이루어졌고, 콜트레인은 자신이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 나오면 같이 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마일스의 만류로 콜트레인은 꽤 오랫동안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타이너는 자신을 고용한 베니 골슨(Benny Golson)에게 양해를 구하고 콜트레인이 부를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골슨의 밴드 ‘The Jazztet’에 몸을 담았다.

왼손잡이 답게 왼손주법의 힘이 넘치는 맥코이 타이너

1960년 마침내 때가 왔다. 콜트레인은 타이너를 불러들였고, 수차례 멤버 교체를 통해 결성된 존 콜트레인 쿼텟(John Coltrane Quartet)은 1964년 명반 <A Love Supreme>을 출반하는 최고의 해를 보냈다. 그러나 콜트레인은 갈수록 프리 재즈에 더욱 몰두했고, 앨버트 아일러(Albert Ayler), 파로아 샌더스(Pharoah Sanders) 같은 젊은 프리 재즈 뮤지션들을 추가로 영입했다. 더군다나 프리 스타일의 드러머 라쉬드 알리(Rashied Ali)를 추가로 영입하면서 기존 멤버의 이탈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음악에 내가 어떤 공헌을 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내 귀에는 잡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거든요. 나는 그 음악에 아무 느낌도 가질 수 없었고, 느낌이 없는 곡을 연주할 수는 없었어요.” 하며 그 해 맥코이 타이너는 콜트레인과 결별했고, 이어 드러머 엘빈 존스도 떠났다.

명반 <The Real McCoy>(1967)에 수록한 'Contemplation'에는 콜트레인 스타일이 강하게 묻어난다.

타이너는 자신의 피아노 트리오를 결성하며 ‘콜트레인의 피아니스트’가 아닌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당시 타이너와 계약한 임펄스(Impulse) 레이블의 대표는, 다른 사람의 복제 음악이 아닌 타이너 자신의 음악을 하기를 원했고, 타이너는 화답했다. 1967년 <The Real McCoy>, 1972년 <Sahara>를 명반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피아노 외에도 플루트, 하프시코드, 코토(일본 전통 가야금)로 자신의 악기를 다변화하기도 했다. 그에 대해 평론가들은 “프리재즈도 아닌, 퓨전도 아닌, 그만의 혁신적인 재즈”라고 평가한다. 허나 언론과의 인터뷰 때마다 콜트레인에 관한 얘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갔어요. 절대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그 다음을 찾았지요. 한번은 그가 새로운 곡을 만들어와 우리 모두 좋아한 적이 있었어요. 다음 날 그 곡을 연주하자고 했더니, 그는 그 곡은 아니라고, 다시 찾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는 연구실의 과학자처럼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 기존과 다른 방향을 찾아 나갔어요.”

2012년 빈에서 존 콜트레인의 아들 라비 콜트레인(Ravi Coltrane)과 협연한 맥코이 타이너

타이너는 여전히 콜트레인의 오리지널을 자주 연주한다. 그 곡들이 음반으로 출반되기 전에, 콜트레인이 작곡에 몰두했던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불후의 명곡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80세에 접어드는 그는, 콜트레인의 애제자이자 콜트레인의 피아니스트로 시작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개척한, 현존하는 재즈 피아노 거장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