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 1910~1953)라는 이름은 매우 생소하고 이국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기타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의 이름이나 애칭인 장고(Django)를 들어봤을 것이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 형용사가 따라 다닌다. 최초의 유럽 출신 재즈 스타, 집시 스윙(Gypsy Swing)의 창시자, 여덟 손가락의 기타리스트 등. 그는 20세기의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늘 거론된다. 43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한 지도 6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의 조국인 프랑스 파리와 재즈의 본고장 뉴욕에서는 매년 그를 기리는 음악 페스티벌을 열고 그가 창시한 집시 스윙을 연주한다.

‘Django Reinhardt NYC Festival 2005’에서 집시 스윙 스타일로 연주되는 러시아 민요 ‘Dark Eyes’. 집시 스윙의 명인 도라도 슈밋트(Dorado Schmitt)는 장고와 몹시 닮았다

그는 프랑스의 전형적인 집시 가정에서 태어났다. 루마니아 출신의 집시 아버지와 댄서인 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파리 인근의 집시 캠프에서 보냈다. 공식적인 교육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고, 인근 농가에서 닭을 훔치는 집시의 오랜 전통에도 익숙하였다(집시는 집시가 아닌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나눠 갖는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 어디서나 삼삼오오 모여 음악과 춤을 즐기는 집시 생활을 하면서 눈대중으로 기타를 배웠다. 그는 15세부터 기타 연주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17세 때는 집시 여자와 결혼, 18세 때 생애 첫 녹음을 하면서 숨 가쁜 인생행로가 이어졌고, 그의 연주를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장고(Django)의 1928년 생애 첫 녹음. 당시만 해도 그는 재즈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으며, 반조(Banjo)로 집시 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큰 시련이 찾아왔다. 그는 잠자리에 들다가 촛불을 떨어트려 불이 부인이 생계를 잇기 위해 만들던 종이꽃에 옮겨붙어 순식간에 이동식 가옥에 번진 것. 그는 가까스레 목숨을 건졌지만, 오른발이 마비되었고 왼손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담당 의사는 오른발 절단을 권고하면서 다시는 기타를 못 칠 것이라 말했다. 그는 의사의 수술 권고를 무시하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그로부터 1년 후 지팡이를 짚고 다시 대중에 나섰고, 마비된 왼쪽 넷째와 다섯째 손가락을 쓰지 않고 기타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 실제 장고의 연주 영상을 보면 왼쪽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만 코드를 짚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타 3명, 바이올린, 베이스로 구성된 그의 퀸텟은 1930년대 파리의 핫 클럽(Hot Club)의 최고 인기 밴드였다

집시의 유랑 연주생활을 이어나가던 그는, 우연히 친척이 건네준 미국의 재즈 음반을 듣게 된다. 마침 평생 그의 동지가 된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라펠리(Stephane Grappelli, 1908~1997)를 만나면서, 그의 아이콘이 된 집시 스윙(Gypsy Swing) 또는 집시 재즈(Gypsy Jazz) 스타일을 개척한다. 기타, 반조, 아코디언, 바이올린처럼 이동하기 쉬운 악기와 두 명 이상의 기타리스트로 구성되고, 리듬 기타(Rhythm Guitar)가 드럼을 대신한다. 스윙 재즈와 접목하면서 재즈의 인기 악기인 플라리넷이 포함되기도 한다. 세 명의 기타, 바이올린, 아코디언, 베이스 등으로 구성된 그의 밴드는 전 세계적으로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필적할 만한 인기를 누린다.

장고 라이하르트에 관한 다큐멘터리 <Broken Strings>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프랑스에서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나치(Nazi)는 재즈 음악이 ‘독일의 위대함’에 해가 된다고 판단해 자국에서 재즈를 금지하였고, 유럽에 흩어져 살던 집시와 유태인은 강제노동과 살해 위험에 직면한다. 런던에서 연주 여행 중이던 그는 가족과 밴드를 남겨두고 홀로 독일군에 점령된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나치가 싫어하던 ‘재즈 뮤지션’과 ‘집시’에 모두 해당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파리에서 공연과 작곡 활동을 계속하였다. 여러 번 파리를 다시 탈출하려던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살해된 집시는 유럽 전역에서 6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무사히 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당시 그가 무사할 수 있도록 도와준 독일군 장교 디트리히 슐츠-쾬(Dietrich Schulz-Köhn, 1912~1999)은 열렬한 재즈 애호가이자, 프랑스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종전 후 독일로 돌아가 재즈 관련 서적을 쓰며 쾰른 대학의 재즈학 교수로 재직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당시 파리에서 찍은 유명한 사진. 장고(맨 왼쪽)와 슐츠-쾰른(왼쪽에서 두 번째)이 재즈 뮤지션들과 함께 촬영하였다. 당시 재즈를 경원시하던 독일군의 장교가 군복 차림으로 집시, 재즈 뮤지션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건 극히 이례적이다
나치 점령 당시 파리에서 장고가 작곡한 ‘Nuages’는 자유를 갈망하는 프랑스의 염원을 담았으며, 프랑스인의 비공식 국가(Anthem)로 사랑받는 곡이다

그가 종전 후 처음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카네기홀에서 공연할 때에는 무려 아홉 번의 커튼콜을 받을 정도로 이미 세계적인 스타였다. 그러나 집시다운 삶의 방식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는 저축이나 인생의 목표, 이런 것들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돈을 벌면 그날 밤 도박이나 음주로 모두 써버렸고, 머물던 호텔에서 계산하지 않고 사라지는 일도 자주 있었다. 예정된 공연에 기타 없이 나타나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고 공원이나 해변을 배회하는 일도 많았다. 주위 동료들은 그를 “극히 신뢰할 수 없다(Extremely unreliable)”고 수군거리곤 했다. 그는 대도시에 적응할 수 없어서 파리 남쪽의 퐁텐블로 교외에 거처를 마련하고 파리의 클럽에서 연주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으로 돌아왔다. 43세이던 어느 토요일, 그는 파리 연주를 마치고 기차역에서 집으로 걸어 오던 중 넘어져 뇌출혈을 일으킨다. 그의 집이 외진 지역에 있어서 의사는 하루가 다 되어 도착하였지만,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장고는 유명한 기타리스트이지만, 1백여 곡을 만든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곡 중 가장 유명한 ‘Minor Swing’은 재즈 스탠더드가 되었다 

평생 드라마틱한 집시 예술가의 삶을 산 그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음악 페스티벌이 유럽 전역에서 열리고, 그의 일생에 관한 다큐멘터리나 영화도 많이 제작된다. 우디 앨런의 1990년 영화 <스윗 앤 로다운>(Sweet and Lowdown)에서는 숀 펜(Sean Penn)이 장고처럼 되고자 하는 기타리스트 역할을 맡았으며, 2017년에는 영화 <장고 인 멜로디>가 개봉하기도 했다. 

<장고 인 멜로디>(Django)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