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레이 찰스(Ray Charles)를 비롯, 2009년 손열음을 제치고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츠지 노부유키(Tsujii Nobuyuki)처럼 시각 장애를 안고 정상에 올라서는 피아니스트 이야기는 놀랍고 감동을 준다. 점자로 된 악보 또는, 청각에 의지해 악보를 외워 보이지 않는 88개의 건반을 정확하게 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정상 시력을 가진 경쟁자를 제치고 정상에 올라서는 것은 실로 대단하다. 재즈 신에도 시각 장애를 안고 정상의 위치에 우뚝 올라선 피아니스트들이 있다. 근사한 피아노 연주를 넘어, 자신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여 재즈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세 명을 소개한다.

 

아트 테이텀(Art Tatum, 1909~1956)

근대 재즈 피아노의 시조 또는 피아노 연주의 기술적 측면에서 역사상 최고라고 평가되며, 후대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명성은 클래식에까지 알려져 당대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가 테이텀이 연주하는 클럽에 종종 몰래 방문하여 직접 연주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많은 클래식 연주자들이 그의 음반 한두 장은 기본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손가락의 움직임과 래그타임(Ragtime), 스트라이드(Stride) 기반의 즉흥 연주로, ‘사람이 아니라고(Inhuman)’ 칭송받기도 한다. 아직 남아있는 그의 연주 영상을 하나 감상해 보자.

그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역대 최고라는데 이견이 없으나, 연주 스타일은 현란하게 너무 많은 음을 짚는다는 비판도 있다 

아트 테이텀은 유아 시절 백내장을 앓으면서 시력을 잃었다. 수차례 수술을 통하여 한쪽 눈은 일부 보이기도 했으나 나이가 들면서 계속 악화되었다. 어릴 때부터 천부적인 음감을 가져 한번 들은 곡은 그대로 연주했고, 음의 높낮이에 예민하여 수시로 피아노를 조율해 달라고 졸랐다. 맹인학교로 진학하면서 음악 신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의 고향 오하이오주 톨레도를 방문한 재즈 뮤지션들은 그의 연주를 직접 보러 클럽에 들를 정도로 지역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1930~1940년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기를 누린 아트 테이텀. 재즈의 본고장인 맨해튼 52번가에는 그를 내세운 공연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드보르작의 ‘휴머레스크’(Humoresque)를 즉흥 연주하는 아트 테이텀 

뉴욕으로 진출한 테이텀은, 1933년 당시 컷팅 콘테스트(Cutting Contest)로 불리던, 할렘에서 유행한 피아노 연주자 간 배틀에서 뉴욕의 인기 피아니스트들을 따돌리며 정상에 우뚝 선다. 일대일 연주 대결을 벌여서 지는 사람이 물러나는 방식인데, 요즘의 랩 배틀, 댄스 배틀과 비슷한 셈이다. 이 유명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당대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인정받는다. 물론 그의 연주 스타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너무 많은 음을 사용하는 것이 ‘재즈’스럽지 않다는 점을 지적받는다. 하지만 결국 그의 연주를 지켜본 피아니스트들은 모두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연주를 별 표정과 몸동작 없이 해내는 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3년의 유명한 ‘Cutting Contest’에서 아트 테이텀이 연주한 두 곡 중 하나인 ‘Tiger Rag’. 이후 그가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한동안 최정상의 피아니스트로 군림한 아트 테이텀도, 1940년대 후반에 거세게 불어닥친 비밥(Bebop)의 유행을 이겨내진 못했다. 그의 인기는 떨어지기 시작하여 생애 마지막 2년은 뉴욕이 아닌 디트로이트의 클럽에서 고정적으로 연주 활동을 했고, L.A. 연주여행 중 신장 이상으로 사망하였다.

 

조지 쉬어링(George Shearing, 1919~2011)

그는 한 번도 세상을 본 적 없는 타고난 시각 장애인이었다. 아버지는 석탄을 배달하였고, 어머니는 열차 청소를 하는 영국의 하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후일 영국 여왕의 작위를 받은 저명한 재즈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가 되는 성공담의 주인공이다. 그는 작위를 받을 때 “가난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배터시(Battersea, 런던 남서부의 자치구) 출신의 아이가 조지 쉬어링 경이 되었어요. 이제는 동화가 현실이 된 거죠.” 하며 감격하였다. 그는 생애 300여 곡을 작곡하였는데 그중 ‘Lullaby of Birdland’(1952)는 너무나 유명한 재즈 스탠다드가 되었다.

조지 쉬어링의 ‘Lullaby of Birdland’(1952)에 가사를 붙인 이 곡은 수많은 가수가 애창한 명곡이다 

그는 고향인 영국에서 7년 연속 최우수 피아니스트로 선정되어 “영국의 아트 테이텀”, “영국의 테디 윌슨”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공연을 위해 미국인 에이전트에게 자신의 연주를 들려주었을 때 “또 다른 건 무엇을 할 수 있나요?”라는 퉁명스런 반응에 충격을 받고,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음악을 개발하기 위해 1947년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이주를 결심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49년 발표한 싱글 ‘September in the Rain’은 당시 90만 장이 팔린 히트곡이 되었다 

미국 이주 후 스윙, 비밥, 클래식 음악을 접목하거나 다양한 스타일의 뮤지션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그는 자신의 연주 스타일을 확립한다. 미국에서 전성기를 맞게 된 그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꾸준히 작업했고, 자신의 이름으로 백 여장이 넘는 음반을 발매했다. 1980년대에는 재즈 싱어 겸 작곡가인 멜 토메(Mel Torme)와 듀오로 공동 작업을 하면서 1983, 1984년 연속으로 그래미를 수상하기도 한다. 그는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그대로 유지하여, 86세인 2005년에 마지막 음반이 발매될 정도였다.

1989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조지 쉬어링과 멜 토메 

그는 1956년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으나 한시도 고향인 영국을 잊지 못하였다. 노년에는 영국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에 집을 마련하여, 영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계속하였다. 91세에 심장마비로 뉴욕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마커스 로버츠 (Marcus Roberts, 1963~)

현대 재즈 피아노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그는, 5세가 될 무렵 녹내장과 백내장으로 실명하였다. 플로리다의 유명한 가스펠 가수였던 그의 어머니 역시 시각장애인이었으며, 그의 음악관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진다. 어머니는 그에게 피아노를 치는 방법을 가르치기 보다 어떻게 온몸으로 음악을 느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우다가 12세가 되어서야 레슨을 받기 시작하여, 그만의 독특한 피아노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의 연주에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내면의 세계가 존재하여 평론가들은 이를 ‘Deep Soul’이라 불렀다. 특히 오른손과 왼손이 독립적으로 움직여 마치 두 사람이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들린다는 찬사를 받는다.

마커스 로버츠의 ‘Cherokee’ 솔로 연주. 오른손과 왼손이 별개로 움직이는 그의 연주 특성이 잘 드러나는 곡이다

2009년 프랑스에서의 피아노 트리오 연주. 그의 트리오는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같은 비중을 차지하여 재즈 트리오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플로리다 주립대를 졸업한 그는,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의 밴드에서 6년 동안 연주하며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이후 솔로, 듀엣, 트리오, 앙상블, 오케스트라 형태를 가리지 않고 음반을 냈으며, 1996년부터는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클래식 피아노 콘체르토 작곡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의 저명한 지휘자 세이지 오자와(Seijii Ozawa)와 함께 전 세계를 다니며 현지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다.

세이지 오자와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 중인 마커스 로버츠 트리오

그는 젊은 세대를 위한 재즈 교육에도 지대한 노력을 들였다. 모교인 플로리다 주립대의 교수로 재직하며 틈틈이 다른 학교를 찾아다니며 멘토 역할을 하였고, 젊은 유망주들과 같이 ‘The Modern Jazz Generation’이란 밴드를 조직하여 음반을 내기도 하였다. 이런 활동이 알려지면서 2014년에는 줄리아드 음대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고, CBS는 유명한 프로그램인 <60분>에서 ‘The Virtuoso(명인)’이라는 부제로 그의 헌신적인 생활을 조명하기도 했다.

CBS <60분>에서 시각 장애인인 피아노 유망주를 대상으로 멘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마커스 로버츠와 윈튼 마살리스를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