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 출신의 마살리스 패밀리는 미국의 정통 재즈를 대표하는 음악 가문이다. 미국 남부의 저명한 재즈 피아니스트 겸 교수 엘리스 마살리스(Ellis Marsalis Jr., 1934~)는 역시 재즈 가수였던 부인과 여섯 아들을 두었고, 이 중 네 명을 성공적인 재즈 뮤지션으로 키웠다. 특히 장남인 브랜포드 마살리스(Branford Marsalis, 1960~)와 차남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 1961~)는 재즈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정상급 뮤지션이다. 마살리스 패밀리는 2011년 연방 정부에서 주관하는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 Jazz Masters Award에서 단체로 수상하면서 다시금 음악 명문임을 확인했다. 이들의 단체 연주 영상을 하나 감상해보자.

암스트롱의 고전 'Struttin' With Some Barbecue'를 연주하는 마살리스 패밀리

한 살 터울의 브랜포드와 윈튼은 어릴 때 같은 방을 쓰면서 자랐다. 이들은 손아래 동생들을 곯려 주는데 골몰했고, 10대가 되자 여느 청소년처럼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나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 같은 록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둘째가 모든 면에서 형보다 앞서 나갔다. 어릴 때부터 음악 신동이라 불리며 항상 우등생이었던 윈튼은, 14세에 뉴올리언스 필하모닉과 협연할 정도로 음악 신동이었다. 반면 브랜포드는 록과 펑크 음악을 즐기며, 항상 야구 모자를 쓰고 다니는 열혈 축구광이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음악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집안 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맨 먼저 배운 피아노는 학교 밴드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포기했고, 그다음 배운 클라리넷은 여성스럽다고 하여 버리면서, 드디어 그의 평생 악기인 색소폰으로 정착하게 된다.

1990년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Mo’ Better Blues>의 인기 타이틀곡. 브랜포드 마살리스와 테렌스 블랜차드(Terence Blanchard)의 연주다 

브랜포드가 본격적으로 색소폰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한 건, 1980년 윈튼이 아트 블레키와 재즈 메신저(Art Blakey and Jazz Messengers)의 일원이 되었을 때였다. 그는 “동생이 너무 자랑스러웠고 기뻤죠. 나도 열정이 불타올랐고 동생과 똑같이 되고 싶었어요”라고 회상한다. “바로 윈튼에게 전화해서 나도 연습 시작할 거라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더군요. 나는 할 거라고 스스로 다짐했죠.” 앞서간 윈튼은 형 브랜포드의 멘토가 되어 주었다. 윈튼은 형이 아트 블레키의 밴드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고, 이듬해에는 자신의 밴드에 형을 고용하였다. 물론 브랜포드도 이에 화답했다. 밴드에 테너 색소폰이 필요하다는 제안에, 자신의 알토를 버리고 6개월 이상의 불편한 적응 기간을 거쳐 동생의 밴드에서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전도유망한 재즈 뮤지션 발굴의 산실인 아트 블레키와 재즈 메신저 시절의 브랜포드 마살리스. 1980년 프랑스 앙떼베(Antibe) 재즈 페스티벌 실황이다 

그러나 정통 재즈에 몰입한 윈튼과는 달리, 브랜포드는 자신의 끼를 살려 록과 힙합 음악의 접목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1985년에는 영국 밴드 폴리스(Police) 출신 스팅(Sting)의 음악 다큐멘터리 <Bring on the Night> 프로젝트에 합류하면서 두 사람은 평생 음악적 동지가 된다. 이어 정통 재즈와 멀어진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고, 그 후 재즈, 힙합, R&B의 젊은 뮤지션들을 모아 ‘벅샷 르퐁크(Buckshot Le Fonque)’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조직하였다. 또한,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음악을 맡거나 직접 배우로 나서기도 하였다. 그의 외도는 마살리스 가족에게는 일종의 일탈로 받아들여졌다. 스팅과 프랑스에서의 공동 프로젝트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가족들의 비난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고, 윈튼의 밴드에서도 해고당한다. 브랜포드 본인은 해고가 아니라 사업적인 결정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언론은 형제간의 불화로 대서특필하였다.

재즈 취향의 음악을 하고 싶었던 스팅은 1985년 젊은 뮤지션들을 모아 프랑스의 한 저택을 빌려 <Bring on the Night>이라는 음악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젊은 스팅과 야구 모자를 쓴 브랜포드를 볼 수 있다

벅샷 르퐁크는 재즈 레전드 캐논볼 애덜레이(Cannonball Adderley)의 예명 중 하나다. 브랜포드의 주도로 힙합 계열의 디제이 프리미어(DJ Premiere), 소울 가수 프랭크 맥콤(Frank McComb) 같은 다수의 아티스트들이 협업하여 정규 음반 2장, 싱글 5곡, 그리고 영화 음악을 만들었다. 이들은 재즈와 힙합을 접목하여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시도하였고, 힙합 재즈의 파이오니어로 손꼽힌다. 이들의 데뷔 앨범은 1994년 그래미 최고 팝연주 상을 수상하였으나, 두 번째 앨범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하면서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벅샷 르퐁크의 싱글 중 하나인 ‘Another Day’는 소울 가수 프랭크 맥콤(Frank McComb)의 감미로운 보컬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벅샷 르퐁크의 2집에 수록된 ‘Weary with Toil’. 미국에 노예로 끌려온 노예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음악이다

젊은 시절의 브랜포드와 음반 계약을 하였던 콜롬비아(Columbia)의 한 임원은, “야구 모자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의 그를 보고, 진지하기나 한 건지 의심이 갔다. 그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가든,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든 관계없이 항상 재미난 사람이었지만, 그 속은 매우 진중한 사람이었다.” 하고 그를 회상했다. 그러던 그가 1998년 결혼을 하고 아들이 생기면서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결혼식에 왔던 그의 오랜 친구이자 재즈 피아니스트 케니 커크랜드(Kenny Kirkland)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것도 충격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음악이나 컴퓨터 프로젝트를 하거나 온종일 집안일에 매달리는 바쁜 생활인이 된 것이다. 그는 백 여장 이상의 앨범 레코딩에 참여했고, 특히 재즈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쉴 틈 없이 일하였다.

2011년 스팅의 60세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브랜포드 마살리스

그는 지금도 동생 윈튼이 잘 계도해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평범한 배관공이 되었을 거라며 자신을 낮춘다. “연주 테크닉이 부족해서 수많은 음을 소화할 수 없었죠. 그래서 마일스 데이비스나 웨인 쇼터를 들으며 어떤 것이 정확한 음인지를 가려냈어요.” 뒤늦게 재즈 세계에 뛰어든 그의 회상이다. 허나, 마살리스 가족의 안주인 생각은 다르다. “윈튼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 중에, 브랜포드가 음악에 가장 자연스러운 능력을 갖춘 아이예요. 한 번도 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브랜포드는 재즈의 세계로 발을 들였으나 정통 재즈 음악을 하는 가족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재즈를 선보이며 외도를 즐겼다. 요즘도 여전히 새로운 재즈 음반뿐만 아니라 팝, 힙합 음반을 사는데도 열심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