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의 젊은 나이에 신경안정제 과용으로 생을 마감한 영국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는 생전에 다이나 워싱턴(Dinah Washington, 1924~1963)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재즈를 듣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엘라 피츠제럴드를 들었어요. 그러다 좋은 재즈 음반들을 많이 갖고 있는 오빠가, ‘아냐, 다이나 워싱턴이야.’ 하더라고요. 다이나 워싱턴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죠.” 다이나는 1940년대 시카고의 클럽에서 인기를 끌던 스타 가수였다. 클럽 종업원으로 일하던 그를 발굴하여 자신의 밴드 가수로 키워낸 라이오넬 햄턴(Lionel Hampton)과 결별하고, 솔로로 나선 1946년부터는 발표하는 곡마다 차트의 상위권에 진입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블루스의 여왕(Queen of Blues)”이라 불렀으며, 레코드 업계에서는 히트제조기라는 의미로 “주크박스의 여왕(Queen of Jukebox)”이라 부르기도 했다.

뉴포트(1958)에서 'All of Me'를 부르는 다이나 워싱턴

다이나의 창법은 공격적이고 다이나믹하다. 평론가들은 “노래를 요리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능수능란했고, 레퍼토리는 블루스, 재즈, 가스펠, 팝을 넘나들었다. 한때 그의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Quincy Jones)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이나는 멜로디를 마치 계란처럼 손에 들고, 깨서 후라이를 하고 굽고 튀기고 다듬어서 냉장고에 넣는다”라고 묘사했을 정도다. 초창기 다이나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쳤던 유명 재즈 피아니스트 조 자비눌(Zoe Zawinul)은, “그는 노래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는 매일 밤 노래할 때 마다 울어서 옷이 다 젖었어요. 청중도 따라 울곤 했죠.” 하고 그를 회고했다. 두 사람의 말 대로 다이나는 뛰어난 성량과 격렬한 창법으로 감정을 흠뻑 실어서 노래했다. 어떤 평론가는 이에 “드라마 창법” 또는 “신들린 목소리(Haunting voice)”란 용어를 붙이기도 했다.

팝 차트 4위와 그래미의 영광을 안긴 ‘What Difference a Day Make’(1959)

하지만 ‘혼란의 여왕(Queen of Turmoil)’이란 별칭이 시사하듯 그의 사생활은 복잡다단했다. 주변에는 항상 남자들이 득실거렸고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다. 그는 가정주부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결혼이라는 예식은 중요시하여, 39년의 짧은 인생에서 7번이나 결혼을 하였다. 주위 사람에 따라 9번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오래 지속된 관계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세 번째 남편과 2년 반의 결혼 생활을 유지했을 뿐, 대부분 수개월 만에 파탄이 났다. 디트로이트의 유명한 풋볼 선수였던 마지막 남편과 비교적 행복한 생활을 보냈으나, 자신의 사망으로 결혼 생활은 6개월 만에 끝나게 된다. 7명의 법적 남편과 수많은 외도 대상들을 언론에서는 “여왕의 남자들(Queen’s Men)”이라 불렀다. 그의 히트곡 중 ‘Evil Gal Blues’는 다이나의 남성 편력과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곡이다.

I’ve got men to the left, men to the right. (왼쪽에도 남자, 오른쪽에도 남자)
Men every day and men every night! (낮에도 남자, 밤에도 남자)
I’ve got so many men, I don’t know what to do. (남자는 많으나 뭘 할지를 모르겠어.)

 

‘Evil Gal Blues’(1944). 후일 평론가로 유명해진 레오나드 피더 작곡이다

그는 사치스런 행각과 과격한 언사로 늘 구설수에 올랐다. 어디서나 화려하게 꾸미고 다녔으며 구두, 모피 코트, 보석, 자동차를 사들이는 데 많은 돈을 썼다. 언어는 거칠기로 유명했으며, 그에게 의지하는 주변인들은 그의 기분을 살피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한번은 색소폰 연주자였던 다섯 번째 남편의 악기를 무대 위 관중들 앞에서 벽으로 집어 던지기도 했다. 당시 경쟁자였던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과는 대면조차 하지 않았다. 운전은 거칠었고 남자와의 몸싸움이나 주먹질도 주저하지 않았다. 상대가 클럽 소유자거나 듀엣 파트너거나, 밴드 연주자라도 말이다. 게스트 연주자로 세션에 참여했던 인기 드러머 맥스 로치(Max Roach)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격이 불같이 직선적이었지만, 정직하고 뒤끝이 없다는 평도 있다. 소동이 있고 며칠 지나면, 선물 공세로 상대를 다독였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그의 Haunting voice가 잘 드러나는 ‘Smoke Gets in Your Eyes’(1956)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우상이었던 다이나 또한 약물과 음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비만과 불면증 치료를 위해 많은 종류의 신경제를 복용했고, 음주 습관은 깊어 갔다. 1963년 겨울, 6개월 간의 서부 지역 공연을 마치고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디트로이트 집으로 돌아온 그는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에 깬 남편은, 거실에 쓰러진 채 의식이 없는 그를 발견했다. 의사는 그가 사망했음을 확인했고, 치사량의 수면제와 브랜디를 같이 먹은 것으로 드러났다. “진짜 몇 안되는 남자를 만났고 같이 늙고 싶다”며 남편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드러냈고, 남편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2,400달러 어치의 선물을 준비했지만, 모든 게 허사가 되었다. 다이나는 평소 좋아하던 흰색 모피를 입고 티아라 왕관을 머리에 두른 채 안치되어, 39년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다이나 워싱턴의 공연 모습을 담은 15분 길이 영상

다이나 워싱턴은 장르를 넘나든 크로스오버 가수였으며, 굳이 따지자면 재즈보다는 블루스나 R&B에 더 가까웠다. 흔히들 그를 20세기 최고의 가수라 불리는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라 하기도 한다. 두 사람은 디트로이트를 본거지로 창법이나 스타일 면에서 판박이처럼 비슷하였으며, 아레사가 등장할 때 “New Queen of the Blues”라 부르기도 했다. 침례교 목사였던 아레사의 아버지는 다이나의 장례식을 집전한, 오랜 인연을 맺은 사이이기도 했다. 패티 오스틴(Patti Austin) 또한 다이나가 대모(Godmother)로서 어릴 때부터 키운 가수이다. 다이나는 미국의 여성 리듬앤블루스 싱어 계보의 대모였던 셈이다.

어린 패티 오스틴과 대모 다이나 워싱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