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1915~1959)는 다른 가수들에 비해 약한 성량에도, 독특한 창법과 내면의 감정을 노래에 담아 재즈 여제로 올라선 레전드이다. 당시 가수들이 풍부한 성량으로 가스펠 창법의 노래를 했다면, 그는 억양과 템포를 짧게 조절하는 새로운 창법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재즈 평론가 존 부시가 “미국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라고 평가하였듯이, 후대의 팝, 재즈 가수들은 그의 음반을 들으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위한 영감을 얻는다. 지금도 수많은 영화나 광고 영상들은 그의 노래를 삽입하여 독특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마지막 앨범 <Lady in Satin>에 수록된 'I'm a Fool to Want You'는 로맨스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사는 격정적이었고 불행의 연속이었다. 미국의 공황이 휩쓸던 194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한 해 평균 12만 달러(당시 기준)를 벌어들이던 스타였지만, 술과 마약에 찌든 생활과 불행한 결혼 생활로 연예 신문의 한 면을 장식했다. 해가 갈수록 거칠어지는 목소리와 체중 감소로 고생하다가 마지막 앨범 <Lady in Satin>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이듬해인 1959년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이후 그의 은행 통장에는 고작 70센트가 남아 있었고, 병실의 이불 밑에서 한 신문사로부터 원고료로 받은 750달러가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그의 인생을 불행으로 이끈 배경을 세 개의 키워드로 풀어 보았다.

빌리 홀리데이의 애견으로 유명해진 ‘Mister’

 

이보다 더 불우할 수 없는 어린 시절

두 살 무렵의 빌리 홀리데이(1917)

10대의 미혼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여러 친척의 집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미혼모로 배가 불러오자 집에서 쫓겨났으며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도 재즈 연주자가 되기 위해 모녀를 떠났다. 어머니는 그를 언니 집에 맡겨 놓은 채 열차 청소부 일을 위해 자주 집을 떠났고, 혼자 남겨진 어린 그는 외숙부의 성폭행 시도를 가까스로 피한 적도 있을 만큼 힘들게 지냈다. 어릴 때부터 학교를 자주 무단결석하던 홀리데이는 12세 때 퇴학 처분을 받아 영원히 학교와는 담을 쌓게 된다. 어머니와 외숙모를 따라 뉴욕 할렘으로 온 그는, 14세부터 그들을 따라 매춘부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경찰의 급습 때 체포되어 모녀는 교화소에 장기간 구금된다. 교화소를 나와 생계를 위해 할렘의 나이트클럽에서 빌리 더브(Billie Dove)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고, 18세이던 1933년 프로듀서 존 하몬드(John Hammond)에게 발탁되어 스타의 길로 들어선다.

1935년 듀크 엘링턴의 <A Rhapsody of Negro Life>에서 버림받는 여인 역을 맡은 빌리 홀리데이

 

술과 마약에 찌든 인기가수 생활

1949년 마약 소지죄로 재판정에 들어가는 빌리 홀리데이

1940년대 들어 그의 인기는 최고로 치솟았다.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아픈 상처를 노래에 실어 청중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가수였다. 전성기인 1945년 무렵 그는 연간 25만 달러를 벌어들이던 절정의 스타였다. 그러나 마약 중독자인 남자 친구와 사귀면서 시작한 아편 습관은, 1945년 어머니 사망 이후 심해져 갈수록 더욱 강한 마약을 찾게 되었고, 원래부터 좋아하던 술은 폭음으로 변해갔다. 그가 처음 마약소지죄로 체포된 건 1947년이었고, 10개월간 수감생활을 마친 뒤에도 1949년 또다시 체포됐다. 당시 연방 마약수사국의 리스트에 오르기도 한 감시의 대상이었다. 1956년에는 남편과 함께 투숙했던 호텔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여러 차례 술과 마약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허사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마약 소지로 적발된 건 1959년 간경화로 입원했던 병원의 입원실. 그러나 그의 사망으로 재판은 열리지 않은 채 사건은 종결되었다.

1957년 재즈 레전드와 함께 자신의 오리지널 ‘Fine and Mellow’를 노래하는 홀리데이. 색소폰 레전드 레스터 영(Lester Young)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강한 남자’에 대한 환상과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

마지막 남편 루이 맥케이는 마피아 조직의 일원으로 알려졌다

빌리 홀리데이는 44년의 인생에서 3명의 남편을 두었으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많은 유명인과 염문을 뿌렸다. 첫 남편 지미 먼로(Jimmy Monroe)는 바람둥이 트롬본 연주자로 그에게 마약을 가르쳤고, 그의 수입은 부부가 마약을 구입하는데 탕진되었다. 두 번째 남편 조 가이(Joe Guy)는 2류 트럼펫 연주자로 그에게 지속적으로 헤로인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었다. 마지막 남편 루이 맥케이(Louis McKay)는 마피아 조직의 일원으로 그를 마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며 함께 재기를 노렸으나 곧 부부 싸움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홀리데이의 재산과 이름을 도용하여 무모한 사업을 벌였고, 홀리데이가 사망할 때는 이미 별거한 상태였다. 그의 강한 남자(Strong Man)에 대한 환상은 항상 참담한 결과로 돌아왔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는 만나지 못하였다. 그가 쓴 가사에는 이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이 배어있다.

My man don’t love me. (내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He treats me oh so mean. (그는 나를 매정하게 대해요.)

1949년 녹음한 ‘Crazy He Calls Me’는 2010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오른 명곡이다

레이디 데이(빌리 홀리데이의 애칭)는 사망한 후에 더욱 매스컴과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장례식에는 1천 명이 넘는 팬들이 모였다. 많은 음반이 사후에 발매되었고, 4개의 그래미상도 모두 사후에 수여되었다. 1972년에 개봉한 그의 일생을 담은 영화 <Lady Sings the Blues>에서는 인기 R&B 가수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가 그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아카데미 5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다.

영화 <Lady Sings the Blues>(1972)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