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는 재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있다. 비밥, 쿨, 모덜, 퓨전으로 이어지는 재즈 변혁기의 중심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를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라고 하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겠지만, 재즈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이노베이터 또는 거물이라는 데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는 강점과 약점이 뚜렷한 인물이라 알려졌다. 강점은 그를 재즈의 변혁을 이끈 리더로 군림하게 했지만, 약점은 많은 에피소드를 양산하며 대중과 언론의 비난과 관심의 대상이 되게끔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란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에피소드 몇 가지를 간추려 본다.

 

델로니어스 몽크와의 ‘Fight Session’

마일스는 195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델로니어스 몽크와 앨범 <Bag’s Groove>를 녹음하면서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가는 장면을 연출한다. 마일스는 자신의 솔로 연주 부분에 몽크가 자꾸 끼어들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심하게 다투었다. 당시 스튜디오의 많은 사람이 이를 목격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마일스는 후일 인터뷰에서 “우선 몽크와 나는 매우 가까운 사이이고, 그는 몸집이 커서 그와 싸운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단지 내가 연주할 때는 물러나 있으라고 말한 것뿐”이라며 부인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스튜디오에서 연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Fight Session”이라고 부른다.

‘Fight Session’ 당시 녹음된 <Bag’s Groove>의 타이틀곡

 

24곡 모두 한 번 만에 녹음한 ‘Marathon Session’

마일스는 컬럼비아 레코드와 좋은 조건의 계약을 앞두고 기존 프레스티지(Prestige)와의 계약 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네 장의 앨범을 더 출반해야 했다. 그래서 1956년 5월, 10월 자신의 퀸텟과 두 번의 세션을 열어 24곡 모두를 한 번에 녹음한다. 24곡을 한꺼번에 납품(?)받은 프레스티지는 이들을 매년 LP로 출반하는데, 앨범 제목을 이전에 냈던 <Walkin’>에 이어 특별한 의미 없이 ‘Cookin’’(1957), ‘Relaxin’’(1958), ‘Workin’’(1959), ‘Steamin’’(1961)이라는 동명사로 시작하도록 했다. 이 네 장은 모두 호평을 받으며 음반 수집가들의 컬렉터즈 아이템(Collector’s Items)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두 번의 세션을 “마라톤 세션(Marathon Session)”이라고 불렀다.

‘마라톤 세션’에서 첫 출반된 <Cookin’ with Miles Davis Quintet>

 

경찰 구타사건과 빌 에반스와의 결별

1959년 8월 25일 마일스는 뉴욕의 재즈 클럽 버드랜드(Birdland)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한 백인여성을 택시로 안내했다. 이를 지켜보던 경찰관이 마일스가 연주자인 줄 모르고 “계속 가던 길을 가라(Move on)”고 명령하자, 마일스는 뒤돌아보면서 “For what?(뭣 때문에?)”라고 응수한다. 실랑이가 벌어졌고, 경찰 3명이 가세해 구타사건으로 번졌다. 200여 명의 행인이 이를 지켜보면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경찰이 연루된 상징적 인종차별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사건은 향후 그의 행동과 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평소 인종 문제에 대범했던 마일스는 자신이 고용했던 백인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를 “whitey(흑인들이 백인을 가리키는 비어)”라 부르며 괴롭히더니, 두 사람은 그해 말 결별했다.

경찰서로 연행되는 마일스. 보석으로 석방 후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된다

 

1년 만에 깨진 펑크 퀸과의 결혼생활

가정폭력 문제로 별거 끝에 이혼한 마일스는, 1968년 뉴욕의 펑크 퀸(Funk Queen)으로 불린 19살 연하의 모델 겸 가수 베티 마브리 데이비스(Betty Mabry Davis)와 재혼한다. 베티는 “70년대의 마돈나(Madonna)”로 불리며 당시의 평범하고 보수적인 여성상을 거부한 ‘컬트’적인 존재였다. 두 사람은 1년 만에 이혼하지만, 마일스는 베티를 통하여 지미 헨드릭스(Jimmy Hendrix), 슬라이 스톤(Sly Stone)과 같은 록, 펑크 음악을 접하면서 퓨전 재즈(Fusion Jazz)를 구상하게 된다. 두 사람의 파국은 마일스가 아내와 지미 헨드릭스를 로맨틱한 관계로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번의 이혼 모두 그의 의처증이 파국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베티의 생에 관한 다큐 프로그램 중 일부

 

오만하며 참을성이 없다는 세간의 평가

그는 매스컴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오만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 예시로 곧잘 관객을 등지고 연주하는 그의 태도가 표적이 되곤 한다. 그는 화를 참지 못하는 조급한 성격이었고, 폭음과 마약 과용 그리고 잦은 스캔들로 구설수를 몰고 다녔다. 그의 불같은 성격 탓에 세 번의 결혼 모두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그를 통해 발굴된 많은 재즈맨들이 그를 떠나면서 리더로 성공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그의 집착하는 성격은 레코딩 세션에서 동료 연주자들을 다그쳐 최고의 기량을 뽑아내는 리더십으로 발휘되기도 해, 수많은 걸작이 만들어졌다. 1991년 그의 사망 후 <뉴욕타임스> 기사에 그의 성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데이비스는 변덕스러운 성질과 대중에의 오만한 발표, 그리고 무대 위에서는 카리스마와 냉담한 태도로 유명했다. 한동안 그는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연주했고, 솔로를 하지 않을 때는 무대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대중에게 비친 그의 모습은 화려하고 타협을 모르며 극도로 개인적이었다. 그는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를 몰았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를 말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마일스의 마지막 해 공연 모습. 자주 등을 보이는 그를 볼 수 있다

그는 호흡 문제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기관지에 튜브를 삽입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듣고, 감정이 폭발하여 결국 뇌출혈로 사망한다. 그의 불같은 성격이 명을 앞당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