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말, 대만 인디록 밴드 Gigantic Roar의 보컬이자, 힙합 아티스트로서도 활발히 활동 중인 레오 왕(Leo 王)이 싱글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공개하며 팬들과 음악 매체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1분경부터 등장하는 매력적인 음색의 여성 보컬, ‘9m88’에 대한 관심이 쏟아졌는데, 뮤직비디오 출연 이전에 음악 활동이 전무했던 신인 뮤지션이라 뉴페이스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컸다. 레오 왕의 노련한 래핑과 그루브한 비트 사이로 당당히 치고 들어오는 소울풀한 보컬과 카메라를 여유롭게 응시하며 리드미컬하고 감각적인 모션을 선보인 신인 같지 않은 신인, 9m88의 강렬한 첫인상을 다시 보자.

Leo 王 ‘陪妳過假日’(feat. 9m88) MV

9m88은 타이베이 디자인 계열 명문 대학인 실천대(Shih Chien University)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뉴욕 유명 패션 디자이너 제이슨 우(Jason Wu)의 작업실에서 인턴십을 하기도 한 패션학도였다. 하지만 패션 업계의 높은 진입장벽에 어려움을 느끼고 평소 관심 있던 음악으로 진로를 돌린다. 미국 동부에 위치한 음악학원 더뉴스쿨(The New School)에서 6~7살배기 어린 아이들과 함께 기초적인 음악이론에 대해 공부하고, 작은 공연장에서 커버 곡들을 부르며 뮤지션의 꿈을 키워갔다. 평소 대만 독립 뮤지션들과 콜라보 작업을 원해 틈틈이 자작곡들을 메일로 보냈지만, 번번이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 신곡 피처링으로 재즈 보컬이 필요했던 레오 왕과 인연이 닿았고, 브루클린으로 레오 왕을 직접 초대해 음악 작업과 뮤직비디오 촬영을 진행했다.

‘陪妳過假日’ 뮤직비디오 촬영 비하인드 컷. 출처- 9m88 페이스북

뮤직비디오는 저예산으로 촬영됐다. 9m88의 대학 동기이자, 대만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상 감독 Kao Cheng Kai가 연출을 맡았고, 그의 크루들이 함께 촬영을 진행했다. 헤어&메이크업과 스타일리스트로 9m88와 그의 친구들이 나섰으며, 촬영에 도움을 준 스텝들은 대부분 레오 왕과 9m88의 인맥을 통해 섭외했다. 영상은 일반 뮤직비디오 제작 비용의 반도 안 되는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지만, 기대 이상의 반응을 끌어내며 9m88는 레오 왕과 함께 대만의 여러 공연장에서 공연을 펼치고, 음악 매체와 인터뷰를 하는 등 대만 인디 신의 기대와 주목을 받는 루키로 단숨에 떠올랐다.

9m88 '九頭身日奈' MV

1 Tracy는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자신을 뽐내지
2 Linda는 깍쟁이야. 시기와 질투를 꽁꽁 감춰두고 얘기를 안 하지
3 Catherine은 정신이 좀 산만해. 세계가 멸망할까 봐
4, 5 B와 J의 사이에는 우정을 넘어선 뭔가가 있지
6 Victoria의 비밀은 아무도 몰라. 싸구려 향수로 사랑의 신호를 날리지
7 Joanne은 재즈 가수인데 뜨지를 못해
8 Lisa는 무심해서 생리대를 잃어버려도 신경을 안 써
9 Janet은 사랑이 필요해. 하지만 Tinder에는 좋아요가 안 달려

아홉 머리의 히나노
내 삶은 무기력해
인생은 음료수처럼 마시기만 하면 시원해지는 게 아니야

완벽한 작업물이 아니면 음원 발표를 꺼린다고 밝힌 9m88이 2017년 1월 자작곡 싱글 ‘九頭身日奈(Nine Head Hinano)’를 발표했다. 9m88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풍성한 펌 헤어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과장스러운 복고 패션에 걸맞는(?) 키치한 화면과 9m88의 ‘깨발랄’한 연기가 돋보이는 뮤직비디오도 함께 공개했다. 9m88의 절친한 친구이자 포토그래퍼, 영상 감독인 Sid and Geri가 연출을 맡아, 서로 다른 모습과 개성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다양한 투영을 ‘아홉 머리의 히나노(Nine Head Hinano)’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재치 있게 풀어냈다. 가사에서 등장하는 7번째 ‘히나노’, Joanne는 9m88 자신으로, 무명 재즈가수 시절의 설움도 살짝 토로했다. 9m88의 독특한 정체성을 아낌없이 드러낸 곡으로, 레오 왕의 피처링에서 들려주었던 R&B 소울을 덜어내고, 한층 부드럽고 느긋한 재즈 창법을 살렸다.

“So I know there's so many of you(이 안에 수많은 네 모습이 존재하는 걸 알아).” 그러니 ‘Catherine처럼 정신이 좀 산만해’도, ‘Janet처럼 Tinder에 좋아요가 안 달려’도 꾸밈없이 솔직하게 살면 된다고 9m88은 말한다.

대만 온라인 음악방송 <樂人TV>에서 자작곡 ‘Eyes’를 부르는 9m88

실천대 재학시절, 선택과목으로 재즈수업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재즈의 매력에 눈을 뜬 9m88는 존 콜트레인이나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를 들으며 재즈의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9m88은 재즈 사운드를 밑바탕에 묵직하게 깔고 그 위로 일렉트로니카나 R&B 같은 다양한 형태의 리듬을 조화롭게 얹어낸 음악을 들려준다. 첫 싱글 ‘九頭身日奈(Nine Head Hinano)’에서 일렉트로닉 비트 위에 느긋한 재즈 사운드를 부드럽게 띄워 보냈다면, ‘Eyes’는 로맨틱한 분위기의 밴드 연주와 풍성한 소울 보컬, 몽환적인 스캣이 리드미컬하게 어우러진 곡이다. 악기와 리듬을 온몸으로 느끼며 환한 미소로 노래하는 9m88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흐뭇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9m88 'BB88'

역시 같은 음악방송 <樂人TV>에서 9m88는 중화권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방대동(方大同)의 'BB88'를 커버해 불렀다. 세련된 팝 댄스곡 느낌이 물씬 풍기는 원곡이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9m88 특유의 진득한 재즈 보컬로 곡의 매력을 한층 살렸다.

대만 독립패션 브랜드 Y-Z Studio의 2017 S/S 시즌 컬렉션에 모델로 참여한 9m88. 출처- 9m88 페이스북

9m88이라는 뮤지션의 매력을 완성하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은 아무래도 ‘패션’일 것이다. 대학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만 패션 브랜드 Ne Sense에서 근무하는 등 패션업계의 사람들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9m88은 올해 4월, 대학교 후배가 런칭한 패션 브랜드 Y-Z Studio에 모델로 깜짝 참여했다. 평소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익살스럽고 독특한 패션 세계를 과감히 보여주는 9m88은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나’답게 보여지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무드임을 아는 ‘진짜’ 멋진 아티스트다.

9m88 '巴黎,我想跟你一起去(Let's Go To Paris From New York)' MV

2017년 4월, 9m88은 대만 유명가수 후상정(侯湘婷)의 곡 ‘巴黎,我想跟你一起去'를 자신만의 색깔로 재해석한 커버 버전의 음원을 발표했다. 첫 싱글 ‘九頭身日奈(Nine Head Hinano)’에서 독특한 연출력을 선보였던 Sid and Geri 감독이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았으며,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재즈 가수 겸 피아니스트 Louisa Rosi가 피처링에 참여했다. 매끄러운 피아노 선율에 두 재즈 보컬의 달콤한 화음을 부드럽게 얹어낸 사랑스러운 보사노바 곡이다.

이미지- 9m88 페이스북

9m88는 자신만의 호흡으로 느긋하게 노래하는 가수다. 오랜 무명시절을 겪으면서도 좋아하는 일을 소신 있게 견지했고, 자신의 또렷한 개성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자신의 날’을 맞았고, 뮤지션으로서 대중과 평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한꺼번에 모든 것을 꺼내 보이려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공연장에서 묵묵히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며 결과물들을 차근히 꺼내 보였다. 9m88는 최근까지도 뉴욕과 대만을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고 있다. 한편 틈틈이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고, SNS를 통해 뮤직비디오 촬영 소식을 팬들에게 전하기도 한다. 9m88의 이토록 반짝이는 개성과 여유롭고 느긋한 음악을 두고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볼 일이다.

9m88 인스타그램
9m88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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