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매년 4월 21일 ‘과학의 날’이면 중대한 선택에 직면하곤 했다. 고무동력기를 만들 것인가 글라이더를 만들 것인가. 당시 우주정보소년단이었던 필자는 망설임 없이 고무동력기를 선택했다. 조금 더 만들기 복잡하고 비행시간이 긴 고무동력기가 당시 또래 사이에서는 확실히 인기였다. 모든 아이들이 둘러앉아 모형 비행기를 만들고, 운동장에서 날려 기록을 재던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색다르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전시가 열렸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만들어보았을 추억의 고무동력기가 파랗게 물들어 2019년 을지로에 착륙했다.

국내 남성복 브랜드 ‘네이머클로딩’이 런칭 2주년을 맞아 기획한 그래픽 디자이너 협업 전시 프로젝트 <Bluer Flight>. 네이머클로딩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과거의 워크룩, 밀리터리룩을 그들만의 개성을 담아 재해석한다. 필요를 넘어서
특정 시대에 종속되지 않는 가치를 만드는 것이 브랜드의 모토. 특유의 디자인과 만듦새로 차근히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다. 처음 ‘고무동력기’를 떠올린 건 공군복을 베이스로 한 디자인을 구상하면서였다고 한다. 단순한 디자인 차용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옷에 담긴 스토리까지 전달할 방법을 고민했고, ‘고무동력기’에 생각이 닿았다.

네이머클로딩 2019 Season Collection ‘But is Bluer' Part. 3/4 Lookbook

기존의 시선에서 벗어나 ‘고무동력기’를 ‘인쇄 매체’로 규정해 개념을 확장했다. 날개와 꼬리를 이루는 종이에 그래픽 작업을 인쇄해 고무동력기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를 담은 인쇄물이 되도록 한 것이다. 전시를 위해 국내 그래픽&일러스트 디자이너 3팀에게 네이머클로딩의 그래픽 아이덴티티인 체크 패턴을 재해석한 작업물과 자신들만의 개성을 담아낸 작업물을 요청했다.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오래오 스튜디오, CBR Graphic, 효자맥주가 함께했고, 각자의 색깔이 뚜렷한 팀인 만큼 재미있는 작업이 탄생했다.

위에서부터 오래오 스튜디오, CBR Graphic, 효자맥주의 고무동력기

전시 장소는 을지로 4F. 방산시장 안의 좁은 골목에 숨어있는 이곳은 인쇄소를 카페로 재탄생 시킨 곳이다. 녹슨 철제 간판, 어지러운 배선이 드러난 기계들, 자갈로 가득 찬 바닥까지. 을지로의 감성을 그대로 살려 오래된 주변 건물들과도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우러진다. 이름처럼 전체 4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러프한 벽면과 인테리어로 특유의 분위기를 내뿜는 곳. 널찍한 1층에는 테이블 없이 오로지 대형 폐인쇄기가 놓여있어 공간의 역사가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을지로와 인쇄소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수없이 많이 이곳을 찾았을 그들과 더없이 어울리는 전시. 지금은 멈춰버린 인쇄기의 공간을 포스터와 인쇄물로 가득 채워 <Bluer Flight>를 위한 인쇄소가 문을 연듯했다.

을지로 4F. 전시 <Bluer Flight> 전경

3층 안쪽 벽면을 가득 채운 파란 고무동력기. 쪽빛을 주제로 <But is Bluer> 시리즈를 전개해온 네이머클로딩의 아이덴티티가 잘 나타나는 컬러 선택이었다. 하늘을 나는 대신 나란히 줄을 지어 매달린 모형 비행기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사람들을 맞았다. 그래픽 패턴이 입혀진 날개를 달고 일자로 전시된 모습은 마치 나비표본을 보는 것처럼 화려하고 강렬했다. 커다란 테이블에는 조립하기 전 상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고무동력기 도면과 부품을 놓아 디테일을 살렸다. 각 스튜디오의 작업이 담긴 포스터도 재료의 일부. 탐나는 포스터를 떼어다가 점선대로 자르면 날개와 꼬리가 된다. 마음에 드는 패턴의 고무동력기를 직접 만드는 재미까지 잡은 전시. 어떤 디자인을 고를까 즐거운 설렘이 전시장을 맴돌았다.

작은 공간이지만 볼거리가 풍부했던 전시장엔 네이머클로딩이 특별히 원단으로 제작한 고무동력기도 전시되었다. 다양한 원단을 손바느질로 꿰어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의 고무동력기. 고무동력기 모양의 앙증맞은 스티커와 그래픽이 들어간 티셔츠, 맨투맨 등 다양한 굿즈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패키지 맛집으로 소문난 브랜드인 만큼 패키지 하나도 허투루 준비하지 않고 제대로 맛을 냈다. 인쇄 시 사용하는 잉크 통을 똑 닮은 패키지에 굿즈 티셔츠를 담아 한 층 더 완성도를 높인 것. 브랜드의 색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수놓은 고무동력기.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들어맞는 전시였다.

이번 전시는 패션 유통 플랫폼 ‘스몰 바이츠’의 후원으로 열렸다. 스몰바이츠는 국내외에서 엄선한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의 프리오더 플랫폼. 될성부른 브랜드를 지원해 그들이 소신 있는 디자인과 과감한 도전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 구매자는 브랜드의 컬렉션을 가장 먼저 받아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색다름을 추구하는 패션 플랫폼답게 브랜드의 새로운 시도를 함께했다.

고무동력기를 주제로 추억의 한 조각을 세련되게 재현해낸 프로젝트 <Bluer Flight>. 다채로운 패턴 옷을 입은 고무동력기가 패션과 그래픽 디자인의 만남을 신선하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경계를 허무는 네이머클로딩의 실험은 모험적이며, 그래서 더욱더 재미있다. 그래픽 디자인 신(scene)에서 주목받는 스튜디오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 눈이 즐거웠던 전시. 네이머클로딩은 패션 분야에만 머물지 않고 재밌는 시도를 계속해서 궁리하고 있다. 매년 돌아올 런칭 기념일에 진행될 협업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첫 프로젝트는 기분 좋은 비행을 마쳤다. 새롭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브랜드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네이머클로딩 사이트
네이머클로딩 인스타그램
스몰바이츠 사이트

 

오래오 스튜디오

오래오 스튜디오는 강민경, 김가영, 박계현, 정예슬로 결성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이다. 한글 타이포그라피 작업을 기반으로, 평면에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디자인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며 사람과 사회에 필요한 시각적 소통을 돕는 디자인을 지향한다.

오래오 스튜디오 홈페이지
오래오 스튜디오 인스타그램

 

CBR Graphic

채병록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2014년부터 디자인 스튜디오 CBR Graphic을 운영해왔다. 포스터라는 매체를 통해 개념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일종의 시각 실험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 단체나 기업과 협업 활동도 한다. 그의 작품은 빅토리아앤알버트 미술관(V&A Museum), 뮌헨국제디자인박물관(Die Neue Sammlung) 그리고 국립한글박물관에 영구소장 되었으며 전시되고 있다. 그는 작품 활동과 더불어 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 강의도 진행한다.

CBR Graphic 홈페이지
CBR Graphic 인스타그램

 

효자맥주

효자맥주는 2015년부터 이태원, 서울, 파주를 기점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3인 이규찬, 이우재, 정인지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맥주는 음악이자 그림이며 공연이라 말한다. 효자맥주는 '맥주'를 매개체로 다양한 문화영역에 존재하는 아티스트들과 함께 파티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그들의 활동은 현실에 안주하는 이들을 위트있고 즐거운 활동으로 연결시키는 것에 있다.

효자맥주 홈페이지
효자맥주 인스타그램

 

Writer

김혜인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