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작가는 1981년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등단한 이래 꾸준히 작품을 써왔다. 사실 그의 소설은 명성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동료 작가와 평단의 지지에 비해 판매고는 따라오지 않았다. 철학적인 농도가 짙은 데다가 신학적 세계관이 맞물려 독자에 진입 장벽이 있다. 이승우는 국가와 집단의 폭력을 개인 관점에서 풀어낸다. 외부 요인을 차단한 채 한 사람의 내면을 파고든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공간도 없을 만큼 촘촘한 사유가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승우는 집단을 중시하는 한국에서 도외시했던 군중 속 한 개인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점차 개인적으로 변해가는 것에 부채감이 있던 시절부터 이승우는 속된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누군가를 적었다. 소설 속 인물은 혼자라는 안온함, 독서라는 평안을 위해 이단자가 된다. 그는 혼자일 때 비로소 삶의 아이러니와 마주할 수 있다. 이런 고립을 도모하는 방식은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요즘 독자에 익숙하다. 최근 들어 그의 작품은 유럽 언론과 클레지오를 비롯한 문인들에 의해 가치를 재조명받고 있다. 한국 독자도 더는 이승우의 작품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여러 고독이 모인 이 도시는 그의 소설과 같은 정서를 공유한다. 오늘은 작가 이승우의 대표작을 세 권을 소개한다.

 

<생의 이면>(1993)

소설은 소설가 ‘박부길’의 삶을 좇는다. 화자는 박부길의 평전을 집필하는 작가다. 은둔 작가인 박부길을 취재하기 위해 그가 쓴 글을 발췌하고, 어렵사리 그를 인터뷰한다. 박부길은 사회 부적응자이며 연애에도 무능하다. 주변에 있으면 딱 피해야 마땅한 녀석이다. 어두침침한 방에서 온갖 책을 독파하며 세상과 등졌다. 가까스로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지만, 별 이유도 없이 여자의 뺨을 후려갈긴다. 작가만 아니면 무뢰한이라 불리기에 적당한 인간이다. 어려서 부모에게 버려진 상처가 온 얼굴에 드러나 있다. 난 박부길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를 마주하기 싫어졌다. 박부길의 유일한 재주는 글쓰기다. 그는 극심한 열등감을 종교의 구원과 엮어 글로 풀어낸다.

차마 누군가에게 하지 못했으리라 짐작되는 사연이 소설에 녹아있는 경우가 있다. 손으로 상처가 만져질 듯 느껴져 표지에 적힌 작가 소개란을 들춰보게 된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작품을 쓰게 된 걸까? 난 <생의 이면>을 읽으며 이승우라는 인간의 어둠이 상상했다. 소설은 개인에 감춰진 비릿한 속내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생의 이면>은 이승우 작가의 자전적인 인생사와 겹쳐지고, 한 사회와 화해하지 못한 외로운 영혼이 현현한다. 박부길은 나와 먼발치에 있어 온전한 공명을 이루기 어렵지만, 그를 지켜보면 묘한 쾌감이 들기도 한다. 그건 아마 노골적으로 사회에 등을 진 이방인을 향한 매혹일 것이다. 나 역시 박부길처럼 궤도를 이탈하고자 하는 욕구를 품고 산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짐짓 웃어넘기지만, 고개를 수그리고 집단에 기생하는 내 처지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생의 이면>을 읽고 있으면, 박부길처럼 모두를 향해 손사래 치고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가치를 냉소하고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들끓는다. 박부길이란 인물은 실제 마주하긴 싫지만, 소설론 엿보고 싶은 단독자다. 스스로 테두리를 치고 어둠으로 침잠하는 그의 기질은 숭고한 데가 있다.

 

<사랑의 생애>(2017)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엔 ‘형배’라는 남자가 있다. 형배는 사랑을 향한 갈망과 그에 못지않은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다. 형배는 자신에게 어렵사리 사랑을 고백하는 후배 선희를 터무니없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는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라 하며 마치 자신을 낮추는 듯 보이지만, 실은 사랑을 하나의 자격으로 끌어내린다. 선희는 형배의 말에 "너는 마치 그 말을 독립선언문 낭독하듯 하고 있는 거 알아?"라며 그의 오만을 경멸한다. 형배는 선희에게서 자신을 연민하는 눈빛을 읽어낸다.

몇 년 후 형배는 한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선희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낀다. 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선희의 귓바퀴에 새겨진 점이 촉매로 작용한다. 그는 선희를 자주 만나던 시절에도 그 점(사소하고 별거 아닌 존재의 대명사)을 몰랐지만, 몇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선희에 매혹을 느낀다. 본인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거절한 사랑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서 되살아 난 셈이다. 그 느닷없음에 당황한 선희는 단호하게 형배를 거절한다.

<사랑의 생애>의 첫 문장을 상기한다. “인간은 고작 사랑의 숙주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기생체는 시도 때도 없이 전염한다. 그저 번식할 수 있다면 가릴 게 없다. 이 지독한 놈은 약도 없어서 뜻하지 않게 생겼다가 그새를 못 참고 사라진다. <사랑의 생애>에 등장하는 인간(숙주)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사랑이 있지만, 말만 번지르르할 뿐 정작 사랑이 눈앞에 닥치면 옴짝달싹 못 한다. 기생체의 농간으로 내 사랑을 받아달라며, 날 버리지 말라고 애원한다. 사랑의 증세로 평소 믿지 않았던 바에 매달린다.

저마다 가진 사랑이 다르다는 건 그 증세를 예측할 수 없게 하고, 그로써 타인의 사랑을 측정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랑 안에 거하면 딴짓 안 해도 더할 나위 없지만, 내 뜻과 다르게 사랑이 사라지면 구제할 길이 없다. 오늘도 무수한 연인이 상대에게 이러저러한 이유로 헤어지자고 할 테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모독이며 무책임한 입발림이다. 사랑이 사라지는데 이유가 있다면 시작 역시 까닭이 있을 터다. 하지만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틈에 사랑에 빠진다. 나중에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지만 그건 막연한 믿음에 불과하다. 이승우는 보통에 가깝고 특별한 데라고는 없는 남녀상열지사에 주석을 달며 이 소설을 완성했다. 어느 카페에서든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연인의 속사정에 끼어들어 사랑의 불가해함을 증명한다.

 

<지상의 노래>(2013)

<지상의 노래>는 여러 시공간에서 펼쳐진 이야기가 중첩되는 구조다. 미시적 이야기가 모여 어떤 얼개를 만들고, 가뭇하게만 했던 서사가 위용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질감보다는 양감이 가진 확장력에 의지한다. 알려지지 않았던 수도원에 그려진 벽서를 찾아낸 강상호, 강상호의 책을 읽고 벽서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차동연, 차동연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준 장 씨, 장 씨 이야기에 나오는 한정효라는 화자 그리고 이들이 맞물리며 비어져 나온 어떤 시간이 있다. 누군가의 경험은 그 자체로 실현이지만, 어느 날 시간이 지나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경험을 해석할 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왜곡과 선동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역사를 기술한다. 역사는 누구 말처럼 승자도 패자도 아닌 그저 그런 이가 기록한 정황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서로에 영향을 주고받는 양상은 그 자체로 운명적이다. 그것이 비록 사건의 집합에 불과해도, 우리는 이야기가 파열하는 힘으로 책장을 넘긴다. 우연과 우연이 뒤섞여 우리는 결국 핍진한 결과물을 손에 쥔다. <지상의 노래>는 마치 서사의 불가해한 힘을 예찬하듯 방대하다. 역사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미미한 개인이 마주한 진실은 우리 예측대로 순순하지 않다. 가끔 우린 터무니없는 현실을 마주하며 강렬한 해방감을 맛보곤 한다. 그래서 문학은 잊힌 누군가를 위한 노래가 되기도 한다.

이승우는 <지상의 노래>에서 한 치의 구멍도 허락하지 않을 기세로 문장을 쌓아간다. 그가 구축한 허구의 세상은 공고함을 자랑한다. 마치 벽돌공처럼 중문으로 문장을 인위적으로 닫는다. 모든 가능성을 다 품어낸 폐쇄적 문장은 느슨함이 없어 쉽게 지치지만, 이런 태도엔 어떤 결기 같은 게 서려 있다. 온전한 문장을 숭배하는 작가의 세계관이 자리한다.

 

메인이미지 영화 <버닝> 스틸컷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