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 그는 생의 마지막 문턱을 넘을 뻔했다. 돌연 찾아온 인후암 때문에 예기치 못한 공백기에 들어가면서 그는 깊은 고독과 무기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언제 죽더라도 후회 없도록 부끄럽지 않은 것들을 좀 더 남기기 위해서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그가 견뎌낸 인고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정답은 영화에 있다. 삶의 마지막에 섰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The Revenant | 2015 |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톰 하디, 도널 글리슨

작곡가로, 영화음악가로, 사회운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류이치 사카모토가 비보를 전해 들은 건 2014년이었다. 20대 이후로 가장 긴 공백기를 갖게 되었다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나직이 고백하는 그의 음성에서 그간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작업은 결국 중단되었다. 투병 중이던 그에게 어느 날 희소식이 전해진다. 평소 그가 존경하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으로부터 신작의 영화음악을 맡아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 작품이 바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다. 그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잊은 채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을 배경으로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동료에게 복수하는 사냥꾼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숲에서 곰을 만나 큰 상처를 입은 뒤 죽기 일보 직전에 발견된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동료인 ‘피츠제럴드’(톰 하디)가 자신의 아들을 무참히 죽이고 자신을 땅에 묻은 채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복수를 결심한다. 찢긴 상처로 인한 고통과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복수하겠다는 마음 하나 때문이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스틸컷

글래스의 모습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역시 거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맛보았으니 말이다. 음악을 쌓아가는 과정을 레이어해달라는 감독의 주문에 작업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치료와 작업을 병행해야 했던 그에게 버티기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다행히 작품은 성공적으로 완성되었고,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일어서게 된다.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불편함이 그를 자극하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끝에서 출발한 그의 두 번째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메인테마

 

<솔라리스>

Solaris | 1972년 |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 출연 니콜라이 그린코, 아나토리 소로니친, 올가 바르네트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활동을 재개한 류이치 사카모토는 기존의 앨범 콘셉트를 뒤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새 앨범을 구상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감을 준 것은 바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솔라리스>다. 폴란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혹성 솔라리스에서 벌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을 탐사하기 위해 우주정거장으로 파견된 과학자 ‘크리스’(도나타스 바니오니스)가 겪게 되는 미스터리한 일들을 그린다.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미쳐 기억을 소환시키는 솔라리스에서 크리스는 독극물 주사로 자살한 아내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는 인간의 유약함,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까지 이어지며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한다. 촛대를 띄우며 크리스와 아내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장면에서 흐르는 ‘코랄 전주곡’은 거대한 솔라리스 바다의 물소리와 뒤섞여 대단히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감정을 도출한다. 그가 앨범 작업 기간 내내 이 곡을 연습하기 위해 유독 피아노 앞에 자주 앉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영화 <솔라리스>에 삽입한 바흐의 코랄 전주곡

“지속되는, 사라지지 않는, 약해지지 않는 그런 소리를 내내 동경해 왔다.”,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혐오가 내 안에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의 소리에 유독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과 사물의 소리를 음악으로 간주한 타르코프스키 감독처럼 직접 소리를 채집해 모은다. 새소리, 숲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 빗방울이 바구니에 부딪히는 소리, 빙하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피아노 소리까지. 그건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생을 붙드는 작업이기도 했다. 자연이 조율해준 가장 순수하고 영원한 소리를 채집해 만든 앨범이 바로 2017년에 완성된 <async>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컷. 빗소리를 채집하는 류이치 사카모토

<async>의 제작과정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특별전시회 <Life, Life>가 있다.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리는 단독전시로 <async> 제작과정 뿐만 아니라 백남준, 알바 노토(Alva Noto) 등 거장들과의 협업, 야마구치 정보예술센터(YCAM)에서 작업한 대규모 미디어 설치 등 다양한 미디어 아트와 실험적인 사운드를 선보인다. 2층에서부터 4층까지 층마다 연결된 공간을 따라가다 보면 자유롭고 진보적인 자연인이자 세계인으로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인간적인 면모와 마주하게 된다.

Alva Noto & Ryuichi Sakamoto Insen 공연(2006)

 

메인 이미지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컷

 

Writer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고, 아날로그적인 것을 좋아한다. 느리게 책을 읽고 오래 생각하고 아주 조금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