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로우>(2016)와 <프레시>(2022)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인간의 카니발리즘(cannibalism: 동족을 먹는 행위)을 소재로 한 작품을 다루고 있습니다. 불쾌감을 일으킬 수 있는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동물의 살인지 모를 붉은 ‘생고기’가 꽃 모양으로 쌓여 있다. 피가 흘러나와 주변을 흥건하게 적신다. 카메라가 서서히 줌 아웃 되면, 속옷만 입은 다섯 남자가 식사 준비를 마친 채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배경은 새하얗다. 줌 아웃은 이어지고, 이 초현실적 공간 전체를 상자 혹은 냉동고 속에 가두듯 위로 문이 닫힌다.

미미 케이브의 영화 <프레시> 엔딩크레딧 도중 삽입된 쿠키 영상을 묘사했다. 시작부터 대뜸 영화의 끝을 언급한 것은, 작품이 문제 삼으려는 바를 상징적으로 요약하고 있어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아’. 그는 슈퍼마켓에서 매력적인 남자 ‘스티브’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스티브는 사실 인육을 소비하고 판매하기도 하는 ‘카니발’(cannibal)이었고, 노아는 갇혀 ‘고기’가 될 위기에 처한다. 스티브가 ‘사냥’하는 것은 오로지 젊은 여성, 재력과 권력이 있는 남성으로 구성된 그의 ‘고객’들이 원하는 ‘상품’의 종류다.

<프레시>를 관람하며 줄리아 뒤크루노의 <로우>가 종종 떠올랐다. 간결하고 강렬한 제목을 지닌 두 작품 모두, 카니발리즘을 소재로 여성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모로 달랐다. 워낙 다르므로 억지로 엮어 비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명확한 메시지를 신선한 방식으로 전하는 <프레시>와 ‘날것의’ 개성으로 가득한 <로우>. 각 작품이 어디서 출발해 관객을 어디로 이끄는지, 그 과정에서 묻거나 풍자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피다, 만나거나 갈라지는 지점을 찾아보기로 한다.

 

프레시

“벨 꺼지라고 해.(F*** Bell.) 야수도 꺼져.(F*** Beast.)”
“내가 바로 야수다!(I am the beast!)”

<프레시>에서 노아와 그의 절친 ‘몰리’가 체육관에서 복싱을 연습하며 장난스레 외치는 말들이다. 수동적으로 왕자님을 기다리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둔 픽션을 향한 농담조의 비판이다. (후에 노아가 <미녀와 야수>의 벨처럼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지지 않고 스티브를 처단하리란 복선이기도 하다.) <프레시>는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딱히 없는 그대로 훌륭하다. 재치있는 각본과 세련된 연출로 사회적 미소지니와 섹시즘을 건드린다. 디테일이 독특한 편집이 영화적 재미를 더한다. 현대의 감수성을 당연하다는 듯한 작품 톤에 반영한 위트로 레이시즘까지 툭 치고 지나가고, 몰리가 바이 혹은 팬섹슈얼임을 드러내는 가벼운 대사를 통해 퀴어 가시화도 잊지 않는다. 연기 스타일도 이에 어울리게 별 여지가 없다. 노련한 배우들의 재능과 매력이 장면의 텐션을 살려낸다. 불편을 유발하는 모든 표현법의 의도는 분명하다. 피와 살, 뼈가 등장하는 화면은 자극적이나, 혼란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영화의 시작, 노아는 데이팅 어플로 만난 남자 ‘채드’와 저녁을 먹는다. 그는 청바지에 넉넉한 상의를 받쳐 입은 노아를 향해 “우리 어머니 세대 여자들은 외모에 더 신경을 썼다”며 성차별적 감상을 늘어놓고, 아시안 여성인 직원을 하대하며 “영어를 알아듣는지 모르겠다”는 둥 인종차별 발언을 한다. 이 답없는 인물을 두고 노아와 직원은 시선을 주고받는다. 노아가 예의 바르게 다음 만남을 거절하자 욕을 남기고 자리를 뜨는 마무리까지 이토록 ‘완벽’할 수가! 사소한 해프닝처럼 보이는 이 오프닝은 <프레시>의 방식을 맛보기로 드러낸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은 해프닝으로 넘길 수 없는 것들이나, 핵심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작품은 톤을 적절히 조절하며 첫 시퀀스에서 보였던 태도를 유지한다.

스티브가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 <프레시>는 평범한 로맨틱코미디처럼 보인다. 관객은 노아를 범죄 피해자로 보기 이전 의견과 취향을 지닌 여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의 시니컬하고 솔직한 유쾌함, 스티브의 어설픈 듯 젠틀한 매력에 빠져들고, 케미 넘치는 로맨스에 어느 정도 몰입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복선이 있었으나, 영화는 ‘필요할 때’가 되기 전까지는 ‘싸함’을 첨가하지 않고 적당히 달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스티브의 집에서 칵테일을 마신 노아가 쓰러진 후에야, 제목과 오프닝 크레딧이 화면에 뜬다. 이와 같이 장르를 반전시키는 영리한 편집은 색다른 집중력을 유도한다. 이후 <프레시>는 다크코미디, 이스케이핑 스릴러, 그리고 슬래셔까지 발을 걸친다.

도입부에 설명했듯 <프레시>의 포식자, 소비자와 공급자는 모두 재력과 권력을 지닌 남성. 고객들의 니즈에 응하기 위해 스티브는 속옷 등 여성들의 물건을 고기와 함께 보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렇듯 카니발리즘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며,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고깃덩어리로 보는 미소지니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어쩌면 순수한 식욕과 물욕만을 지닌 자처럼 보이기도 했던 스티브 역시 이에서 자유롭지 못한 까닭은, 그가 공급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마음에 드는 포로’에게 주는 잡지에는 “당신의 남자를 만족시키는 열 가지 방법” 따위의 꼭지가 있다. 그가 노아에게 끌리는 서사는 ‘너는 다른 여자와 달라’ 류 클리셰를 따르고, “너도 엉망이거든.”이라고 말하는 등 상대를 깎아내리는 작업을 수반한다. “타인에게 자신을 주는 것”이 “굴복”이고, “사랑”이라고 말하는 스티브, 그는 와이프의 다리를 잘라먹고 본인은 튼튼한 두 다리로 조깅을 즐기는 남자다. 탈출 작전으로 스티브를 유혹하는 데 성공한 노아는 디너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이에 앞서 스티브는 노아에게 연분홍색 원피스와 메이크업 도구를 가져다준다. 상대 남성의 정형화된 취향에 맞추는 행위. 극단적인 상황이기는 하나 이성애규범적으로 조성된 ‘데이트 시장’의 모습이 연상될 수밖에 없고, 이는 오프닝과 연결된다.

플롯과 설정에서 조던 필의 <겟 아웃>이 떠오르기도 했던 <프레시>. 그러나 클라이맥스에서 <프레시>는 조력자의 도움을 허용하지 않는다. <겟 아웃>과 달리 그 위치에 있는 인물인 바텐더 폴이 영화에서 초점을 둔 소수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노아를 걱정하던 친구 몰리는 어떤가. 조력자의 위치에 두는 대신 같은 것을 겪게 만든다. 이러한 전개는,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남성 구원자(디즈니 왕자님) 없이 오로지 피해자 여성들의 연대로 가해자를 물리치는 결말로 이어진다. 결국 노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과 감정적으로 교류했고, 그들과 함께 탈출했기 때문이다. 후반부 전개가 살짝 허술해 보인다 해도, 노아가 스티브를 물어뜯는 장면의 쾌감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스티브가 경계심을 그리 쉽게 풀었던 까닭은 애초에 “약한 계집애들”(스티브 본인의 대사다.)이라고 낮잡아 봤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스티브의 와이프 ‘앤’과 같이 고깃덩어리를 자처하는 여성들에 대한 비판도 함께 싣고 간다. 그들 역시 피해자임을 잊지 않으면서, 미소지니와 성차별적 폭력을 재생산하는 데에 역할을 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영화를 소개하며 ‘현대적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적기도 했듯, 어떤 면에서는 세상이 성평등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도 있겠다. (노아와 몰리가 “꺼지라”고 했던 디즈니 영화에서 크루엘라 드 빌과 같은 주인공을 세우는 시대이니.) 그러나 이런 식의 통제는 전 세계적으로 아직 남아있거나, 교묘하게 숨는 쪽으로 발전했거나, 도리어 조직적이고 공개적인 형태로 악화되기도 했다. 작품의 마무리는 노아의 휴대폰 화면에 채드가 보낸 메시지가 뜨는 장면. 허구적인 서사를 오프닝의 현실과 연결하는 엔딩까지, <프레시>는 이처럼 깔끔한 작품이다.

<프레시>에서 꺼낼 수 있는 또하나의 이야깃거리는 ‘육식에 대한 의식’이다. 인육을 스크린에 담을 때 영화는 절단된 신체 부위, 손질된 생고기, 그리고 익히고 버무려져 요리가 된 형태 모두를 보여주는데, 관객은 이를 현실의 인간이 소비하는 ‘고기’와 겹쳐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것이든 다른 동물의 것이든, 고기를 탐하는 인간의 입을 카메라는 자주 클로즈업한다.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짚는 정도, 특유의 분명함이 적용되는 부분은 아니다. 노아는 스티브를 속이기 위해 인간의 살을 먹을 때 매번 그 주인의 이름을 물었다. 애초에 육식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그지만, 아마 이후 동물의 살 앞에서 이 끔찍한 경험을 필연적으로 되새기게 되지 않을까?

 

로우

비거니즘과 연결될 가능성은 <로우>에도 있다. 주인공 ‘쥐스틴’이 어려서부터 채식을 해왔기 때문은 아니다. <로우>는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경계를 흐리는 표현을 자꾸 삽입한다. 작품의 배경인 수의학과 선배들의 통제 하에 신입생들은 ‘네 발’로 기어 지하 클럽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붉은 물감이 묻은 채 목이 매달린 양 인형이 장식처럼 걸려있다. 학생들은 억지로 동물 내장을 먹은 후 원숭이와 사람의 유사성에 대한 논쟁을 한다. 주인공 쥐스틴의 꿈 속에는 묶여 레일 위를 강제로 달리는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자신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위험한 짐승’으로 다루어지는 씬도 있다.

자신의 ‘입맛’을 잘 아는 어른 여성인 노아와 달리 관계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어 보이는 쥐스틴. 그에게 이입은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오프닝부터 미스터리한 긴장을 심어 놓는 <로우>는, <프레시>와 달리 ‘이상한 영화’다. <프레시>가 로맨틱코미디에서 이스케이핑 스릴러 겸 다크코미디로 반전된다면 <로우>는 표면적으로는 성장영화의 공식을 따르나, 그 내용물과 디테일이 전부 생소하다. ‘여성성’ ‘여성적인 욕망’에 의문을 던지는데, 서사와 장면은 특정한 방향성을 제시하기보단 기존의 것을 뒤집고 뒤틀며, 불쾌감과 기이한 해방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결말 역시도 매듭을 짓는 대신 경계를 흐리고 질문을 던지는 쪽으로 뻗는다.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은 어렵고, 시도할 때마다 달라진다.

부모와 언니를 따라 수의학과에 진학한 쥐스틴이 집을 떠나 낯선 공간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 사건의 시작. 픽션에서 부모나 집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계기로 그려지기도 하는 대학은, <로우> 안에서는 위계와 전통에 기반한 폭력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곳이다. 이는 상당히 이성애규범적인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선배들은 남근을 과시하는 묘사가 들어간 노래를 합창하고, 신입생들이 춤추며 밤을 새도록 강제한다. ‘여자애들은 핫하게 입어야 한다’고 강요하고 주저하면 기저귀를 채우며, 남학생과 여학생을 한방에 가두기도 한다. 신입생들은 두려워하다가도 즐거워하며, 자유를 빙자한 통제에 기만당한다. 쥐스틴도 마찬가지다.

<프레시>에서 폭력과 카니발리즘의 주체는 미소지니적 성욕을 중심으로 모인 남성들의 소비집단, 그 욕망을 적극적으로 해소하도록 돕고 또 재생산하는 스티브가 최전선에 있었다. <로우>에서는 폭력의 주체와 카니발리즘의 주체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대학에는 집단적으로 ‘마초 남성성’을 전시하는 ‘선배 집단’이 있고, 그 최전선에는 쥐스틴의 언니 ‘알렉스’가 있다. 그는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동생을 억압하는데, 이 와중에 털을 다듬고 화장을 하는 등 제 몸을 ‘여성적인’ 것으로 만든다. (인육 섭취는 ‘집단에서 허용되는 폭력’이 아니라 ‘괴물스러운’ 것이므로 몰래 해왔다.) 부모의 식단관리로 채식을 하던 쥐스틴은 알렉스의 강요로 동물의 내장을 먹게 된다. 몸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데, 식중독 증상으로 발진이 일어난 피부는 아물며 벗겨진다. 그는 이후 육식을 갈망하게 되고, 그 갈망의 끝에 인간의 살이 있음을 깨닫는다. 십 대인 주인공 또 다른 ‘쥐스틴’의 피부가 벗겨진다는 설정이 있는, 감독의 단편 <주니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것이 탈피 후 다음 단계로 변태하는 상징이라면, 껍데기를 벗고 욕망의 객체가 되었던 <주니어>에서 더 나아간, 욕망의 주체로의 성장이다.

줄리아 뒤크르노는 자주, 여성의 신체를 연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괴물’의 것으로 만든다. <주니어>의 쥐스틴과 <로우>의 쥐스틴(그리고 감독의 다음 작품 <티탄>의 ‘쥐스틴’까지)을 연기한 배우는 가랑스 마릴리에. 가녀린 팔다리와 커다란 눈을 지닌 그가 피가 날 때까지 흰 피부를 긁거나 머리카락을 잔뜩 토해내는 모습, 혹은 생고기를 게걸스레 베어물거나 눈이 돌아간 채 타인이나 제 살을 물어뜯는 모습은, 그 자체로 전복적인 이미지가 된다. 이는 배우가 지닌 대담한 범위 덕이기도 하다. 그는 단단함, 고집스러움, 영리함, 미성숙함, 위태로움, 위험함을 넘나들며, 그 전부를 각각 혹은 동시에 한 몸 안에 담아낸다.

쥐스틴이 카니발리즘을 처음 경험하게 되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알렉스가 동생의 몸을 여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반강제로 제모를 해주다 사고로 손가락이 잘리고, 그것을 쥐스틴이 먹는 전개다. 이후 쥐스틴은 선배들에 의해 물감을 뒤집어쓴 채 남학생과 좁은 방에 갇히게 되는데, 비자발적인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키스하던 도중 상대의 입술을 물어뜯는다. 이는 노아가 스티브의 신체를 물어뜯은 것처럼 생존을 위한 의식적 리벤지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 유사한 데가 있는 두 장면이지만, 거기서 오는 쾌감은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다. 쥐스틴은 ‘피해’로 인해 ‘가해’의 성질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주변 인물들의 포지션 또한 입체적이다. 단순 억압자로 보였던 알렉스는 쥐스틴의 식욕이 깨어나도록 돕는 존재. 자신이 겪었던 성장을 동생이 겪게 하고 방법을 전수해 주려고 하는, 일종의 ‘조력을 시도하는 자’이기도 하다. 쥐스틴의 육식과 성에 관한 경험을 돕는 룸메이트 아드리안은 알렉스와는 다른 의미의 조력자다. 쥐스틴이 원하는 대상이기도 하나, 이들의 관계는 심화된 유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대개 쥐스틴의 시선이 닿는 곳에 존재하던 아드리안은 결국 피해자가 되고 만다.

<로우>의 카니발리즘은 <프레시>의 그것처럼 성욕과 연결되지만, 둘은 함께 묶일 수 없다. 유전이라는 원인이 있기도 하나, 그 발현으로 보았을 때도 이는- 사회현상과 권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순수한 욕망에 가깝다. 스스로 조절하기 힘든 이 주체성은 의도적으로 불완전하다. 작품은 주인공이 ‘유전적 특수성과 포식자의 지위를 받아들이고 안정을 찾는’ 결말로 닫히지 않는다. 신입생이자 여성, 그룹 내 약자인 쥐스틴은 ‘최약자’는 아니다. 우등생이고, 백인이며, 무조건적 보호자가 있고, 규범적 여성성에 들어맞는 신체를 갖고 있다. 그중 본인이 원해서 갖게 된 특징은 거의 없지만, 알렉스처럼 억압의 재생산자와 카니발리즘의 주체 모두가 될 잠재력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쥐스틴이 극복해야 하는 대상은 자신을 물리적으로 가두는 남성적 가해자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성장은 본성을 이해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변화를 겪은 후 욕망을 실현하고 부정하기를 반복하며 깨달은 다음,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억제해야 하나, 그 방법은 불분명하다. 관객은 쥐스틴과 함께 이 과정을 겪어나가며, 혼란과 불쾌를 느끼고 고민하게 된다. 작품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쥐스틴은 카니발리즘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를 거부했고, 아드리안을 해한 알렉스를 폭력으로 응징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엔딩에서 쥐스틴의 아버지가 말했듯, 그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라 믿고 싶다. 흉터로 가득한 가슴을 내보이는 아버지를 응시하는 눈에 담긴 복잡한 괴로움, 거기 아무것도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이 있다.

 

영화는 이렇게 같은 소재로 다른 색을 지닐 수 있다. <프레시>는 노아 개인의 특수한 경험에서 출발해 분명한 표현법으로 사회적 미소지니를 비판한다. 영화적 볼거리를 개성 있는 형태로 제공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로우>는 쥐스틴의 욕망과 심리를 파고들며 힘의 관계, 이미지에 카오스를 들이붓는다. 남성적이고 집단적인 폭력이 허용되는 세계에 순진한 먹잇감이 되기를 거부하는 괴물 여성을 던져 넣어 물을 흐린다. 깔끔하게 문을 닫으며 픽션에서 현실로 넘어오는 <프레시>와 가능성이 소용돌이치는 열린 문으로 관객을 이끄는 <로우>. 두 작품이 남기는 불편함의 가치는 각각 필요하고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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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제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쓴다. ‘안 쓰지 못해 쓴다’고 버릇처럼 말한다. 픽션에 과몰입하고 듣던 음악을 또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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