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 속 중년은 내게 낯설다. 열띤 얼굴로 스펙터클과 서스펜스가 난무하는 세상을 헤쳐나가는 그들을 멀찍이 바라본다. 내 일상과는 너무 먼 초현실적인 세상처럼 보여서 하품이 쏟아진다. 내게 중년은 어쩐지 조금은 느슨하고 한풀 꺾인 기운에 가깝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라 불리는 ‘귀차니즘’이 작동하는 세계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하려고 하면 몸을 일으키는 게 버겁고, 기대할 게 한껏 적어져선 뭐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내일도 또 그다음 날도 같은 역에 내리는 삶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고민마저 소파에 누워 발가락을 꼼질 거리며 김희애의 울분에 찬 얼굴을 보는 순간 사그라진다. 오늘은 TV를 끄고, 예민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중년을 그린 영화를 소개할까 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중년 부부에게 닥친 권태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켜켜이 쌓인 권태가 연인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과정을 좇는다.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린 두 남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뉴욕 맨해튼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교외 지역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신혼집을 꾸린 부부는 쉽사리 중산층에 편입한다. 하지만 잔잔한 호수엔 돌을 던지고 싶기 마련인 걸까? 거창한 계획과 안정된 직장, 변함없는 풍요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는 어김없이 권태에 찌들기 시작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질식할 것처럼 느껴진 에이프릴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남편에게 프랑스 파리로 떠나자고 재촉한다. 프랭크 역시 반복되는 직장 생활에 지쳐가던 차에 그녀의 제안에 선뜻 동의한다. 잠시나마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들뜨기만 한 두 사람. 하지만 평온은 얼마 못 가 바닥을 드러낸다. 프랭크가 회사로부터 승진 권유를 받으면서 이민 계획을 취소하고, 떠나려는 에이프릴에게 다시 머무르리라 통보하면서 갈등은 들불처럼 번진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권태의 기본 구조는 공허 속을 부유하는 상태에 가깝다. 안정이라고 믿는 그 지점에 나를 놓아두고는 불안에 시달리는 식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특별한 의미 없이 세상에 던져진다. 그러면서도 오직 제 선택에 의해 모든 게 정해진다. 인간은 이런 막연함을 견디지 못해 권태를 느끼고 동시에 초조해한다. 우리는 권태를 해소하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켜지만 즐겁긴 잠시뿐이고, 인터넷 쇼핑으로 근사한 옷을 걸쳐도 환희는 얼마 못 가 불식 간에 사라진다. 한 해에 한 번쯤 스카이스캐너를 뒤져 유럽 행 티켓을 끊어도 일시적인 쾌락에 불과하다. 하이데거는 표면에 드러나는 권태를 대충 수습하는 걸 오인된 도피로 해석했다. 오히려 실존에 닿은 깊은 권태를 막지 못하면서 점점 더 심각한 권태에 빠질 뿐이다. 프랭크는 눈앞에 놓인 승진, 화려한 집, 경제적 풍요, 기껏해야 마약, 흔한 불륜, 그놈에 술, 습관과 같은 담배로 그날 하루를 견딘다. 제가 가진 걸 지켜내느라 권태에 몰린 아내를 모른 척 외면한다. 반면 에이프릴은 제 삶을 개혁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실존을 위해 그를 설득했지만, 프랭크가 임신한 아이를 핑계로 계획을 망가뜨리자 고의로 유산시킨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프랭크가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하루하루가 똑같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장면이다. 죄다 비슷한 모자를 쓰고 같은 종착지를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광경은 전체주의 사회가 지닌 키치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 틈에서 프랭크는 못 견딜 만큼 공허하다. 그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가졌지만, 제가 사는 모습이 그 누구의 중년과 다르지 않음에 냉소적인 말을 뱉는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권태에 관해 이런 문장을 남겼다. "그것은 공황처럼 엄습하는 권태였으며,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까지 진행된다. 예를 들면 토론회, 강연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낯선 밤 파티, 집단적인 놀이 등을 통해 내가 맛보는 권태." 이처럼 권태는 일상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나는 늘 거대한 계획을 세우며 인생을 꾸려나가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놓치기 싫어 변화를 겁낸다. 중년이라는 시기는 인생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 손실을 감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나이다. 오히려 용기를 내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을 실패자로 간주하는 식으로 자기변명에 급급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공허는 근원적이면서 숙명적인 고통이다. 프랭크처럼 '시간 죽이기' 따위로 권태와 불안을 벗어나려 해봤자 그의 목을 죄는 건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달라질 게 없다는 조바심뿐이다. 프랭크는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아내와 술 한잔을 걸치고 근사한 춤을 추지만, 쏟아지는 비명을 틀어막을 수 없다. 현실의 문턱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으니까.

 

<위아영>(2014)

노아 바움벡의 영화 <위아영>은 40대 부부가 주인공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조쉬’(벤 스틸러)는 매사 자신만만하고 여전히 젊은 감각을 갖고 있다고 믿고 산다. 영화 제작자인 ‘코넬리아’(나오미 와츠)는 조쉬의 든든한 조력자다. 두 사람은 직업적인 성취, 문화 소양, 경제 능력을 고루 갖춘 영화인으로 화려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부부는 재능 넘치고 영악한 20대 커플 제이미(애덤 드라이버), 다비(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늙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조쉬 부부는 요즘 뜨는 패션을 하고 20대의 쿨한 감각을 배우며 젊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힙스터를 흉내 내고 안정된 또래 친구를 멀리한다. 감각의 최전선에 서기 위해 브루클린을 종횡무진 쏘다닌다.

영화의 원제는 'While We're Young'이다. 한때 조쉬는 참신한 예술가라는 칭호를 얻었으나, 이제 그의 영화 연출 방식은 고리타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제 막 불혹에 다다른 그는 자신에게 닥친 중년이라는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 조쉬는 다큐멘터리 거장으로 존경받는 장인어른의 그늘에서 늘 열등감에 시달려왔다. 설상가상으로 밑에서는 젊은 힙스터가 치고 올라오는 통에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빅토르 위고는 말했다. "40세는 청춘의 노년기이다. 50세는 노년의 청춘기이다." 결국 40대라는 나이는 이도 저도 아니라는 말이다. 조쉬는 도대체 자신이 나이를 먹는 동안 뭘 성취했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기에 이른다. 난 종종 영국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의 말을 인용한다. “세상의 모든 쓸모 있고, 감동적이고, 고무적인 업적은 25세에서 40세 사이의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 조쉬는 8년째 제작 중인 영화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설명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더는 기회가 없을 거라는 두려움뿐이다.

영화의 막바지, 결국 다시 변한 게 없는 일상으로 복귀한 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조쉬는 코넬리아와 집 앞 계단에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맥주를 마신다. 개체의 순환과 쇠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에겐 오늘 닥친 현실이다. 같이 늙어가는 부부는 서로를 토닥인다. 이야기의 결말은 부부가 아이를 입양해서 또 다른 도전을 위해 공항 수속을 밟는 모습이다. 인간은 결국 세포를 전달하는 매개에 지나지 않은 걸까? 그걸 묵묵히 인정하는 꼴은 얼마나 버거운가? 자연은 생식 이후의 인간에겐 도통 관심이 없다. 집 앞 공터에서는 아이들이 친 야구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간다. 공의 볼품없는 움직임과는 별개로 그건 그 나름대로 유려함을 가진다. 그걸 막을 도리는 없어 보인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