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삶을 만드는 일이다. 공간은 만든 사람의 생각과 이야기를 담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또다시 공간에는 감정, 관념, 추억이 쌓이고 세대에 걸쳐 이어진다. 그리고 언젠가 인간의 삶처럼 폐허가 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어디에 머무는가의 문제는 단순히 공간적 작용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과 직결된다. 그렇기에 한 인간만큼이나 공간은 소중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공간에 인간적 정서와 따스함을 담으려 노력했던 건축가가 있다.

이미지 출처 – WIKIPEDIA ‘Jun Itami’

 

공간에 따뜻한 체온을 불어넣는 건축가 ‘이타미 준’

이미지 출처 – WIKIPEDIA ‘포도호텔’

재일 동포 건축가 ‘이타미 준’. 본명은 ‘유동룡’으로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평생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그의 활동명인 ‘이타미 준’은 처음 한국을 방문할 때 이용한 ‘이타미(伊丹) 국제공항’과 절친한 작곡가 ‘길옥윤’의 이름인 ‘윤(潤)’을 합쳐, 국적을 떠나 자유로운 국제적 건축가가 되겠다는 의미로 지었다. 일본의 시골학교에서 한국어 이름으로 보낸 학창 시절, 무사시공업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나온 사회에서도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과 한국 어디에도 온전히 섞일 수 없는 역사의 경계에 서 있던 그. 정체성의 갈등으로 그의 내면에는 짙은 어둠이 존재했다. 하지만 끝까지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잃지 않았고, 한국의 건축과 예술을 조명했다. 특히 조선의 도자기나 목공의 선, 무명을 중시한 그의 건축은 도자기를 빚는 도공처럼 원초적이고 철학적이다. 동양인 최초로 프랑스 국립 ‘기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 문화훈장’, ‘김수근 문화상’, 일본에서 외국인 최초로 ‘무라노 토고상’을 받았다.

그런 그가 말년에 맡은 제주도 프로젝트. 제2의 고향인 제주에서 내면의 어둠을 뛰어넘어 본연의 모습을 자유롭게 표출했다. ‘비오토피아’ 단지 내의 ‘핀크스 클럽 하우스’, ‘수풍석 박물관’, ‘포도호텔’, ‘방주 교회’ 등 제주의 자연과 지역성을 담은 작업을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의 든든한 지원군은 재일사업가 김홍주 회장. 김 회장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교감했다. 좋은 공간에 대한 건축주와 건축가의 의지와 철학은 작품으로 녹아들었다.

 

제주도의 자연을 전시한 ‘수풍석 박물관’

이미지 출처 – 다큐멘터리 ‘이타미준의 바다’(2019) 스틸컷

수풍석 박물관은 휴양형 거주 단지인 ‘비오토피아’ 내부에 있어 관람은 하루에 두 차례 이뤄지는 투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오토피아 완공 이후 부지 내 박물관을 고민하던 김홍주 회장에게 이타미 준은 인위적인 수집이 필요 없는 자연 박물관을 제안했다. 제주도를 대표하는 소재인 돌, 바람, 물을 테마로 자연을 전시하는 것. 김홍주 회장은 약주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던 그 자리에서 바로 이타미 준의 콘셉트을 샀다. 그렇게 시작된 박물관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합일하여 사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탄생했다.

 

빛과 돌 그리고 기도, 석(石) 박물관

이미지 출처 – PINX BIOTOPIA 홈페이지

산화 강판으로 만든 석(石) 박물관은 빨갛게 녹이 슨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황색을 띠던 외벽이 시간이 흘러 붉은색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비와 바람을 맞고 자연스럽게 색이 변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어둠이 드리운 텅 빈 내부에는 오직 창과 돌만이 존재한다. 천장에 뚫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시간에 따라 모양과 밝기를 달리해 내부를 비춘다. 정오에는 정확하게 빛이 바닥에 놓인 돌 가운데를 통과하고, 시간에 맞춰 다른 각도로 빛을 감상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다큐멘터리 <이타미준의 바다>(2019) 스틸컷
이미지 출처 – PINX BIOTOPIA 홈페이지

수풍석 박물관의 모든 건축물은 제주도의 산방산을 향해 있다. 석 박물관에 난 창 너머로는 돌로 조각한 부처의 손과 복숭아가 놓여있고, 그 뒤로는 산방산이 보인다. 이타미 준은 특히 산방산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산에는 자연 석굴에 불상을 둔 ‘산방굴사’(山房窟寺)가 있다. 불상이 있는 산을 향해 놓인 돌로 만든 부처의 손. 동양 철학적 사유가 담긴 기도와 명상의 공간이다.

 

바람의 노래를 듣는 풍(風) 박물관

수풀 사이에 헛간의 모습을 한 풍(風) 박물관은 적송(赤松)을 판으로 이어 바람이 드나들도록 했다. 완공 직후에는 적송의 붉은색을 띠었지만, 세월이 지나 지금은 고동색으로 변했다. 짙은 고동색이 건물에 중후한 맛을 더한다. 언뜻 직사각형으로 보이지만 한쪽은 직선, 반대쪽은 휘어져 곡선 모양으로 되어있다. 이는 바람의 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전달한다. 이곳에 있으면 판자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바람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해가 위치를 달리하면 독특한 모양으로 생기는 그림자.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가 작품이 되는 곳으로 무형의 바람을 청각적,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공간은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에는 박물관을 지키는 양 모양의 수호 동상이, 반대편에는 사색을 위한 공간이 존재한다. 돌 위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사색을 하다 보면 자연과 하나 됨을 느낀다.

 

내면세계의 구체화 수(水) 박물관

이미지 출처 – PINX BIOTOPIA 홈페이지

수(水) 박물관은 들어가자마자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돌담을 지나면 세로로 긴 문 사이로 하늘, 벽, 물, 용 모양의 상징물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지붕이 없는 둥근 천장으로 하늘과 빛이 쏟아져 직사각형의 호수 위를 채우고 바람이 파동을 만든다. 다른 곳은 명상을 위한 개인적인 공간이라면, 이곳은 명상을 통해 구체화한 내면세계가 떠오른다. 사방이 막힌 공간. 고요한 수면에 집중할 때, 성인의 숭고한 내면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미지 출처 – PINX BIOTOPIA 홈페이지
이미지 출처 – 다큐멘터리 ‘이타미준의 바다’(2019) 스틸컷

이곳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림자가 그림처럼 드리워진다. 사면에서 보는 모습이 모두 달라 구석구석 놓인 돌의 위치마다 옮겨가며 감상하길 추천한다. 천장이 열려있기에 비가 오는 날이면 빗줄기가 호수를 때리고, 수많은 물방울이 아름답게 튀어 올라 장관을 이룬다고. 비 오는 날, 맑게 갠 날, 눈이 오는 날 사시사철 모두 다른 모습으로 즐길 수 있다.

이타미 준은 수풍석 박물관을 통해 건축이 매개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여준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대답하는 하나의 몸짓으로서의 작업.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은 이어진다. 제주의 자연과 오롯이 소통할 수 있는 박물관에는 건축가 이타미 준의 삶, 건축물의 삶이 살아 숨 쉰다.

 

참고자료 감독 정다운, 다큐멘터리 <이타미준의 바다>(2019)

 

Writer

김혜인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