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직접 겪기 전에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것들이 있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이를테면 젠더 문제 같은 것들. 그런 문제에 따르는 세상의 편견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원하는 ‘나’에 한 발짝 가까워진 소녀들이 있다. 짧지만 결코 얕지 않은 두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책 두 편을 소개한다.

 

<말라깽이 챔피언>

집안에서 하나뿐인 여자아이, 게다가 막내딸이라는 수식어는 으레 그런 편견을 불러일으킨다. ‘얼마나 귀여움을 독차지할까!’ 하지만 남자들뿐인 집에서 ‘파블리나’의 자리는 일종의 사각지대다. 하루에 열 시간씩 택시를 모는 아빠는 눈가에 다크서클이 드리울 만큼 피곤하고, 몸집이 몇 배나 되는 세 명의 오빠들은 파블리나를 이름 대신 ‘말라깽이’라 부르며 온갖 힘쓰는 내기로 집안일을 떠넘긴다.

출처 - blaine.org
출처 - booktopia

그 사이에서 파블리나가 숨 쉬는 방식은 바로 피아노를 치는 것. 손가락을 자유롭게 놀리며 파블리나는 자신이 하나의 인격체임을 느끼지만, 오빠들과 억지로 레슬링을 하다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들어버리자 피아노를 그만두고 의외의 선택을 한다. 바로 권투를 배우는 것!

출처 - pinterest
출처 - kinder books

파블리나의 결정에 오빠들은 코웃음을 친다. 마침 왼손잡이 선수가 필요해 파블리나를 받아준 권투 코치조차 “권투는 계집애가 할 만한 운동이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파블리나는 기죽지 않고 건반 위를 날아다니던 손에 빨간 글러브를 끼운다. 날쌔게 줄넘기를 하고 잽을 날리는 시간이 거듭되면서 파블리나는 강력한 왼쪽 펀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더 이상 오빠들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출처 - blaine.org

사실 파블리나는 링 위에 오르는 것이 두렵다. 양손은 이미 퉁퉁 부어올라 조금만 움직여도 마디마디가 아리고, 상대가 누구든 오롯이 혼자서 버텨내야 하는 외로운 시간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조금 더 자라면 가슴에 천을 감아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벌써 숨이 콱콱 막힌다.

그렇지만 파블리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힘센 오빠들에게 치이는 말라깽이 막내가 아니라 제힘으로 제 위치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시합에서 승리해 공식적인 챔피언이 된 날,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아온다. 처음부터 원했던 건 주먹을 웅크리고 누군가에게 잽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주먹을 활짝 펴고 손가락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이었기에.

짧은 분량 안에서 젠더 편견과 이민자 가정의 현실, 가족의 의미 등 다양한 문제를 짚어내는 <말라깽이 챔피언>. 그중에서도 ‘도전’은 가장 눈에 띄는 키워드다. 일상에서 우리를 옥죄는 편견은 수도 없이 많고, 거기에 도전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오랜 시간 ‘당연한 것’으로 굳어져 온 것에 맞선다는 건 곧 이 세상 전체에 맞서는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더라도 그곳에 머무르곤 한다. 때로는 살을 파고드는 고통까지도 묵묵히 감내하면서.

파블리나의 도전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그 도전에서 얻어낸 건 단순한 챔피언십이 아니라 ’말라깽이’ 대신 온전한 제 이름으로 불릴 기회였다. 권투를 배우며 몸 곳곳에는 멍 자국이 새겨졌지만, 앞으로 파블리나의 마음은 결코 멍들지 않을 것이다.

 

<하프>

출처 - 알라딘

누군가는 평범한 삶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루이즈’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자신을 지독하게 평범하다 여기는 루이즈는 틈만 나면 ‘특별한 나’를 꿈꾼다. 루이즈가 바라는 건 주변 사람들을 늘 웃게 할 만큼 재치가 넘치는 것도,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똑똑해 주목받는 것도 아니다. 대신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바랄 뿐이다. 그런 루이즈에게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새로 이사한 집 다락방에서, 연주할 때마다 얼굴이 아름다워지는 하프를 발견한 것!

출처 - 레미 쿠르종 블로그

엄마를 졸라 하프 선생님을 구한 루이즈는 매일 다락방에 틀어박혀 연습에 매진한다. 하프 옆에 거울을 가져다 놓고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거울 속 제 모습에 취한 루이즈는 급기야 학교 강당에서 연주회를 열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딱 한 가지 심각한 문제, 그러니까 다락방의 문은 하프를 가지고 나가기엔 터무니없이 작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출처 - Le Magasin de la Harpe
출처 - 레미 쿠르종 블로그

학교 측에서 준비한 하프로 연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루이즈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연주회를 취소하자니 이미 늦었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모습으로 무대에 오르자니 한숨만 나온다. 하프가 칼날이 번뜩이는 단두대처럼 보일 지경이다. 결국 루이즈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딱 한 가지라는 걸 깨닫는다. 바로 연주회 직전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 마침내 연주회 날, 손끝이 벗겨질 때까지 연습했던 곡을 사람들 앞에서 연주해 보인 루이즈는 난생처음으로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는다. 그토록 바라던 상상 속 모습 그대로.

누구나 특별해지기를, 그래서 누구보다도 돋보이기를 바란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아름다운 외모를 떠올리는 것은 비단 루이즈뿐만이 아닐 것이다. 누가 뭐래도 외모는 가장 한눈에 들어오는 요소니까. 하지만 돋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곧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라면, 외모로 인정받는다는 건 과연 어떤 존재로 인정받는 걸까. 아름다움이 곧 능력이라 불리던 때도 있었지만, 시간은 흘렀고 시대는 변했다. 예쁜 얼굴로 얌전히 앉아있는 인형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삶을 꾸려나갈 인격체로 대접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욱더 많아지는 요즘, 오로지 연주 실력만으로 박수갈채를 받아낸 루이즈의 미소는 그래서 더 아름답다.

 

레미 쿠르종의 일러스트레이션

<말라깽이 챔피언>과 <하프>를 모두 쓰고 그린 것은 프랑스 작가 레미 쿠르종이다. 그는 젠더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작가다. 그의 세계에서 약자들은, 이 경우 소녀들은 제힘으로 조금씩 날갯짓을 하며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갈 힘을 키운다. 그러니까 비록 몸집은 작을지언정 결코 약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느냐고.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여자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을 물려줄 것이냐고.

 

레미 쿠르종 블로그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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