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낮은 지붕을 동경했다. 유럽의 오두막을, 일본의 주택을, 미국의 마당 딸린 집을 부러워했다. 하늘을 찌를 정도로 고개를 빳빳이 든, 오직 주거를 위한 공간인 높은 아파트가, 나는 부끄러웠다. ‘아파트 키드’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나의 고향이 될 수 없다며, 언제나 허상의 공간을 그리워했다. 아파트가 가진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의미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 의미는 대개 재개발 이후에 들어오는 것. 치솟는 집값을 앞장서서 조장하고 있다는 것, 높고 거만한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아파트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 아파트도 버려질 수 있다는 것. 그곳 역시, 우리의 고향이었던 것을.

여기, 그리운 시선을 담아 ‘아파트’를 그려낸 작품들이 있다. 낮은 지붕의 것들만큼이나, 때 묻고 정겨운 삶을 품은 아파트들을 소개한다.

 

라야, <집의 시간들>

“안녕, 둔춘주공아파트”

이 단 한 마디의 언어가 우리에게 어떤 여운을 남기는 걸까.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터를 지켜낸 ‘둔촌주공아파트’가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을 ‘고향’으로 품고 있던 이인규 씨가 사진과 글귀를 담은 서적을 출간했다. 그곳에 담긴 아파트들은, 우리가 비난하고 미워했던 아파트들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녹음이 우거진 곳에 우뚝 서서,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여과 없이 늙어버린 아파트의 모습은 어딘가 우리의 삶과 닮아있었다.

<집의 시간들> 트레일러

그리고 이번엔 둔촌주공아파트에게 주는 또 다른 ‘안녕’을 영화를 통해 구현해내었다. 둔촌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주민들의 목소리를 인터뷰하여 재구성한 <집의 시간들>이 지난 25일 정식 개봉했다. 이 영화는 이제 곧 ‘사라질’ 둔촌주공아파트를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록한다. 기억들은 세밀하고, 둔촌주공아파트가 품은 장소들은 구체적이다. 그리고 이 기억의 틈으로, 결코 잊힐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스며든다. 흔들리는 나무속에, 느리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에, 바래진 벽 틈 속에 자리 잡은 삶의 기억들은 <집의 시간들>을 통해 영원히 기록되었다. 현재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

 

 

옥인 콜렉티브, <옥인동 바캉스>

옥인 콜렉티브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올해의 작가상’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회회 작품보다는, 대개 미디어로 이루어진 이 특별한 작가들 속에, ‘옥인 콜렉티브’라는 그룹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옥인 콜렉티브는 종로구에 위치했던 ‘옥인 아파트’가 재개발이 확정되어 철거되기 전, 이곳을 기록하기 위해 처음 결성되었다. ‘강제 철거’라는, 단어만 보아도 가슴이 쿵 내려앉는 상황 속에서 남겨진 주민들과 떠난 주민들의 흔적 곳곳을 탐사하기 시작한 그들은, 이 아파트를 기록하며 체념된 삶과 희망찬 삶의 두 박자를 함께 그려낸다.

'옥인 콜렉티브' 인터뷰 영상

이들이 완성한 <옥인동 바캉스>는 절망적인 상황을 역시 ‘절망적’으로만 그려내는 것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갈 사람들의 희망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은 을씨년스러운 아파트 위에 모여 파티를 연다. 죽어가는, 어두운 아파트에 점 찍힌 불빛과 웃음들은, 우리가 이 아파트를 기억해야만 하는 그 이유를 알려주는 듯하다.

 

 

홍성우, 아파트 프로젝트

마지막으로, 홍성우 작가의 아파트들을 소개한다. 아파트의 빛과 그림자라는 키워드로 담아낸 그래픽 디자이너 홍성우 작가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색다른 여운과 감각을 제시한다. 단조로운 ‘네모 박스’ 위로 비춰진 조각 조각의 빛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너무나 일상적인 아파트의 풍경을 역시나 하나의 ‘작품’으로 보게 만든다.

여기에 구현된 아파트들은 특별하지 않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처럼 낡지도 않았고, 곧 버려질 위기에 처해진 무엇에서 느낄 수 있는 처연함도 없다. 이 사진들에는 아파트를 빛내주는 그 어떤 소재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우뚝 서 있는 아파트만이 빛과 어우러져 있을 뿐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특별하지 않은 것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지 않을까.

홍성우 작가는 모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아파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키워드인데, 단순히 짓고 부수던 것을 넘어 광범위하게 아카이빙하는 자체가 의미 있는 일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홍성우 작가 사진 출처 - 텀블벅 

홍성우 작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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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파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라는, 거창한 제목을 들이댔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다. 누군가에게 아파트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낮은 지붕과 오두막, 가옥이 아니어도 여전히 아파트에서는 삶의 냄새가 난다. 우리의 삶을 닮은 이곳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메인 이미지 <집의 시간들> 스틸컷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