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많은 남자분일 줄 알았어요"

서점에 오시는 손님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다. 정확히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아직 제대로 들어본 적 없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기분 좋다. (물론 손님은 실망하셨을 수도 있지만) 의외의 순간들은 작게나마 짜릿함을 주니까. 음악이나 책에 관한 의외의 순간도 있다. 학창시절 교실에서 말없이 책만 읽었을 것 같은 사람이 무대 위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보인다든지, 말 한마디 잘못 걸었다가는 건강한 신체 어딘가를 영영 고장 낼 것 같은 사람이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는 시 한 수를 쓱쓱 적어 내려가는 감수성을 보인다든지. 자기 상상을 배신당하는 순간의 당혹함과 짜릿함은 참으로 반갑지 않은가.

음악가들이 쓴 책은 대부분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한편으로 전혀 다른 분야의 이야기들이 음악가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거쳐 책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세 음악가의 음악과 함께 그들의 매력을 배가시킬 ‘의외의 책’들을 만나보자.

 

<맛에 빠진 록스타>

알렉스 카프라노스 ❙ 마음산책 ❙ 2010.07.20

‘프란츠 퍼디난드(Franz Ferdinan)’는 2004년 스코틀랜드에서 결성된 밴드다. 주로 록밴드, 포스트 펑크로 분류되는데 그보다도 ‘소녀들을 춤추게 하라'는 지향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직 그 이름이 낯선 이들을 위해 일단 그들의 공연 영상부터 보자. 

Franz Ferdinan 'Take Me Out'

정말 사람 신나서 돌아버리게 하는 프란츠 퍼디난드는 데뷔 앨범으로 영국 음반 차트 3위에 이름을 올리고 두 번째 앨범으로 1위까지 차지, 투어를 통해 전 세계 팬들을 만나왔다. 이 밴드의 프런트 맨 알렉스 카프라노스는 2005~2006년 투어 기간에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 음식 칼럼을 썼는데, 이를 모아 엮은 책이 바로 <맛에 빠진 록스타>다. 밴드 결성 전 요리사, 바텐더, 배달원 같은 다양한 경험을 쌓은 알렉스. 이 책은 그가 투어 중 만난 세계의 음식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그가 요리사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 프란츠 퍼디난드 (이미지 출처- acontrecourant.fr)

20여 년 전 인터넷도 없고 방송 채널도 서너 개뿐이고 해외여행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던 시절, 노란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한 외국인이 거리를 지나가면 모든 사람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시선 집중하던 그때에는 외국산 초콜릿 하나만으로도 세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게 산 넘고 물 건너 사는 사람들이 먹는 것이라고?’ 막연한 선망과 미지에의 모험심 같은 것들을 실현하는 느낌마저 들어 한입한입 아껴 먹곤 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시절의 향수를 느낀다. 지금이야 서울 어디에서나 세계의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레시피까지 다 나오는 시대이니 세계 맛집 여행 책이 무슨 재미가 있냐고 생각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책에는 그 흔한 음식 사진 한 장 없다. 대신 낯선 단어(이디아자발, 체리스트루데, 엠파나다, 크렘 앙글레즈 같은)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심을 자극하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식이 어떤 맛일지, 개성 강한 식당들에서 다른 언어와 처음 보는 음식들을 맛보는 느낌은 어떨지 온전히 상상할 시간을 제공한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는 수천만 관객을 춤추게 하는,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를 거침없이 얘기하는 록밴드의 프런트 맨이다. 무대 위 에너지가 어디 가겠나. 그의 글에도 음악처럼 거침없는 결들이 그대로 살아있어 단순한 미식 여행기라고 치부하면 안 될 에너지가 농축되어 있다. 기이한 식당 주인들의 이야기나 옆 테이블 손님들의 천태만상 등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음식 이야기라기보다는 ‘음식과 식당의 풍경들’이라고 덧붙여도 좋겠다. 아, 그 앞에 ‘알렉스 카프라노스의 눈으로 본'이라고도 반드시 붙여야겠다.

미국, 프랑스, 영국, 홍콩, 일본 등 그가 갔던 맛집을 그대로 투어하기는 어렵겠지만, 책에 언급한 식당 근처에 여행을 가게 된다면 한 번 들러 그 맛을 직접 경험해보면 어떨까. (참고로 한국에서 맛본 김치전의 이야기도 짧게 언급하고 있다.)

 

<서른 살에 처음 시작하는 스윙 살사 탱고>

깜악귀 ❙ 북하우스 ❙ 2010.06.07

‘눈뜨고 코베인’이라는 밴드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밴드다. 아니, 다시 얘기하고 싶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알아야 할 밴드다. 이들의 노래부터 들어보자.

눈뜨고 코베인 ‘아빠가 벽장’

멤버들 가운데, 어쩐지 기묘한 외모와 희한한 목소리로 괴상한 가사를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저 남자. 그의 이름은 깜악귀이며 눈뜨고 코베인의 보컬이자 거의 모든 곡의 작사 작곡을 맡아 하는, 밴드의 척추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눈뜨고 코베인의 음악은 펑크, 모던록, 사이키델릭, 레게 같은 장르의 다양성뿐 아니라 멸망, 죽음, 불륜, 파괴, 미래, 외계인 같은 가사의 방향도 여타 밴드와는 다른 곳을 향한다. 이 독창적인 밴드의 프런트 맨은 어느 날 갑자기 불어온 춤바람 때문에 방바닥에 궁둥이를 붙일 날 없이 춤을 추러 다녔는데 참으로 고맙게도 이 책을 통해 그 춤바람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출간한 건 저자가 춤에 빠진 지 2년 정도 됐던 2010년이다. 전문가라 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이고 초보자라 하기엔 꽤 진도를 나간 그 시점은 춤에 대해 문외한인 독자에게 아주 적합한 수준의 정보들을 제공한다. 춤 문화의 전반적인 이야기와 스윙, 살사, 탱고의 차이, 들어볼 만한 각 장르의 음악과 각 장르를 다룬 영화, 춤을 배울 수 있는 동호회와 춤을 출 수 있는 장소 등이 세심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처음 춤을 배우게 된 동기와 춤으로 떠난 여행기까지. 덕분에 ‘내 인생에 춤이란 없어’라고 생각하는 춤에 일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재미있게 읽으며 음악과 문화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나아가 ‘이거 한 번 배워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 스윙 댄스 중 하나인 린디홉을 추는 스윙 댄스의 전설 프랭키매닝의 모습. 96세에 세상을 떠난 그의 추모식에서도 사람들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책에는 유튜브로 찾아볼 수 있는 댄스 정보도 함께 실려 있다.

제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른 살에 처음 시작하는'이라는 수식이 붙어있다. 저자 역시 그즈음 춤을 시작했고 그것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삶이 아무리 팍팍해도 삶을 즐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춤이 그것을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고 보니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것도 모자라 춤의 세계로 안내까지 해주는 깜악귀 같은 음악가가 있음에 새삼 고맙다. 흔해 빠진 취미들로 점철되거나 하루하루가 게으름의 연속인 자신의 일상을 탈피하고 싶다면, 정말로 삶을 즐길 어떤 것을 찾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춤을 시작해 보는 것이 삶의 활력소가 되어줄 것이다. 춤은 생각보다 가까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곁에 있다고 그가 알려줬으니.

 

<다르마 행려>

잭 케루악 저 ❙ 김목인 역 ❙ 시공사 ❙ 2015.10.28

저음의 목소리와 차분한 말투,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을 가진 음악가 김목인. 이지적이고 자상한 남자의 이미지지만, 그의 노래나 말을 잘 들어보면 생각보다 솔직하게 허를 찌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노래에서 말이다.

김목인 ‘불편한 식탁’
우리가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해서
내가 당신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말아요
내가 당신과 직업이 같다고 해서
‘무슨 말인지 알잖아?’라고 말하지 마요
- 김목인 ‘불편한 식탁’ 가사 가운데

과도한 수식이나 감정의 과잉 없이 담백하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 가사는 그가 참 좋아하는 작가 잭 케루악의 문체와도 꽤 닮았다. 그는 잭 케루악의 소설을 한국에 소개하고자 <길 위에서>를 혼자 번역할 정도의 팬이라고 밝힌 바 있다. 번역 작업을 마치고 출판사를 찾아갔지만,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서가 출간되는 바람에 출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뒤, 마침내 번역가 김목인의 이름을 달고 잭 케루악의 두 번째 번역서 <다르마 행려>를 출간했으니 그야말로 ‘성공한 팬'이라 할 수 있겠다.

다소 생소한 제목을 보면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주로 불교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며 전생에 죄를 지어 미국으로 강등되어 환생했다고 신세 한탄하는 미국인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히치하이크, 캠핑 등을 하며 어떤 일들을 겪는다. 그게 다다. 정말이다.

그래도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 1950년대, 미국의 물질 중심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가치관에 거부반응을 일으킨 청년들은 도시 문명에 반감을 품고 개개인의 깨달음을 통해 자신만의 자유를 찾는 삶을 지향했다. 특히 동양의 선불교 사상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는데 잭 케루악 역시 자신을 비구라고 여길 만큼 불교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게리 스나이더라는 시인을 만나 수행의 과정을 함께 했고, 이들이 만나 겪은 일들을 토대로 ‘소설’이라는 옷을 입혀 출간한 것이 <다르마 행려>다. 이 책은 일반적인 소설의 플롯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과는 거리를 두고 단지 그들이 유랑하며 겪는 영적인 경험과 성찰 같이 그들이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간결하지만 가볍지 않은 문장들로 펼쳐 놓는다. 그러한 문장들일수록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해치지 않고 전달하는 역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목인은 이 책을 번역하며 원문의 느낌을 해치지 않기 위해 당시의 재즈 음악에 맞추어 다듬어 보기도 하고 오디오북을 참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원작자의 말투나 습관까지 꿰차고 있을 정도로 애정이 넘치는 성실한 역자이기에 책을 읽기도 전에 품었던 믿음은 책의 마지막을 덮을 때까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다. 과도한 수사나 흥미로운 줄거리의 전개 없이도 하나의 묵직한 문학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힘, 그리고 그 이야기의 원래 결을 깨지 않고 오롯이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번역가의 열성과 끈기. 우리는 운이 좋게 그 둘을 한 번에 만나 좋은 책을 곁에 둘 수 있게 됐다.

 

Writer

오래된 정경들이 넘치는 동네에서 작은 음악 서점인 ‘초원서점’을 운영한다. 방송작가, 스크립터, 콘텐츠 기획 등을 거쳐 공연 카페에 오래 머물렀다. 2016년 5월 연 초원서점에서 음악과 닿아 있는 다양한 장르의 서적들을 판매하고 음악과 음악 서적 관련 행사들을 기획, 진행하며 ‘음악으로 말을 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가사가 아름다운 한국 음악들을 특히 좋아한다.

초원서점
주소 서울 마포구 염리동 488-15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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