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시장은 1980년대에 이르러 다양성이 공존하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록, 발라드, 댄스, 트로트 같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은 주류와 언더그라운드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이문세, 유재하, 인순이, 김완선, 시나위, 들국화 등 실력파 뮤지션과 퍼포머가 대거 등장한 시기도 바로 이때. 격동의 1970년대를 보내고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화려하게 꽃 피운 80년대의 대중음악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1. 탄압으로부터 싹 튼 록 스피릿, 전성기를 맞이하다

그 시절 한국의 청년문화는 1975년 뮤지션들의 대마초 파동과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대부분 싹이 잘려 나갔다. 이때 대한민국 록의 선구자격인 신중현의 영향력 아래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그룹사운드가 하나 둘 등장한다. 1977년 데뷔한 산울림을 시작으로, 송골매, 들국화, 시나위, 부활 같은 밴드들은 한국식 록음악을 선보이며 소위 록의 르네상스를 맞이하는 데 일조한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에서 박해일이 부르기도 했던 ‘세상만사’(1979)와 2집 수록곡 ‘어쩌다 마주친 그대’(1982)로 80년대 초반 최고의 인기를 누린 송골매의 영상을 보자. 보컬 구창모와 현재 명 DJ로 명성 높은 배철수의 젊은 시절이 새삼 멋지다.

송골매 Mix곡('어쩌다 마주친 그대', '산꼭대기 올라가', '모두 다 사랑하리')(1984)

 

2. 컬러 TV가 불러일으킨 댄스 음악의 호황

영화(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로 국민을 우민화 한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에 힘입어 가요계는 70년대에 비해 훨씬 가볍고 흥에 취한 분위기를 띤다. 또한 가정마다 컬러 TV가 보급되면서 비디오 지향적 가수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가요톱10>, <젊음의 행진> 같은 가요 프로그램 위주로 활동하며 인기를 끌었다. ‘한국의 마돈나’라 불러도 좋을 김완선의 댄스곡과 아크로바틱 퍼포먼스로 인기를 끌었던 소방차, ‘빙글빙글’(1984), ‘슬픈 인연’(1985)처럼 댄스곡과 발라드를 두루 섭렵했던 나미가 대표적이다. ‘강변가요제’, ‘MBC 대학가요제’에서 이선희, 이상은, 신해철, 유열 같은 실력 있는 뮤지션을 많이 배출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나미 Mix곡(‘인디언 인형처럼’, ‘보이네’, ‘사랑이란 묘한거야’, ‘빙글빙글’)(1988)
이상은 ‘담다디’(1988) (Live)

 

3. ‘조용필’이란 장르, ‘조용필’이란 이름의 왕좌

“영어권 음악을 비틀스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누듯,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평론가 임진모) 1979년 발표한 1집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신시사이저를 도입하고(‘단발머리’), 이후 트로트, 블루스, 민요, 동요, 오페라, 심지어 ‘킬리만자로의 표범’(1985)처럼 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조용필은 지금도 서태지를 비롯한 수많은 가수에게 가장 존경하는 가수로 꼽힌다. 지금까지 발표한 정규앨범만 19개이고, 특히 80년대에는 연말 ‘KBS 가요대상’, ‘MBC 가요대상’에서 대상을 무려 11번이나 휩쓸었다. 가히 ‘조용필’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한국 대중음악사에 진한 획을 그은 조용필은 최근까지도 앨범을 발표하며 A Living Legend, 살아있는 전설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조용필 ‘고추잠자리’(1981)
조용필 '바운스'(2013)

 

(메인 이미지 조용필 비정규 앨범 <조용필 특선>)
(본문 상위 이미지 김완선 2집 <나홀로 뜰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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