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에 작품의 핵심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퀴어 커뮤니티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이섹슈얼인데, 우리의 레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은 충분치 못하다”(의역, 링크 – ‘them’)

‘바이섹슈얼’(bisexual)로 커밍아웃한 <하트스토퍼>의 스타 키트 코너의 말을 옮겼다. 과연 그렇다. 최근 몇 년 동안 영화나 TV 시리즈 속 LGBTQ+ 캐릭터는 급증했고 그 다양성도 제법 훌륭하게 뻗어나갔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고, 바이섹슈얼의 경우 더욱 그렇다. 픽션의 역사에는 “페이즈다”, “욕심이 많다”, “한편을 택하지 못한다” 따위의 말들로 작품과 시청자에 의해 매도 됐던 바이섹슈얼(혹은 팬섹슈얼(pansexual)*)이 있었다. 여기서 소개할 것은 그들이 아니다. 양성애적 지향을 뭉뚱그리거나 왜곡하지 않았던, 경우에 따라 ‘바이섹슈얼’임을 명시했던 최근의 TV 시리즈들이 있다. 네 작품 속 멋진 ‘바이’들을 소개한다. 모두 동시대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며, 넷플릭스에서 관람 가능하다.

* 팬섹슈얼 (pansexual): 다양한 모든 젠더의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

 

1. <브루클린 나인나인>(2013~2021, FOX), 로사 (& 아마도 제이크)

날마다 온갖 난리가 나는 뉴욕 브루클린 99 관할서. 제이크와 동료 형사들은 게임에 영혼을 바치고, 서 기물 파손은 일상이다. 이것이 시트콤의 재미 아니겠는가. 그러나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매력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여자로 사는 게 힘들다면) 여자이고 싶지 않아”라는 테리 반장의 어린 쌍둥이 딸 케그니와 레이시의 말에 제이크는 답한다, “그렇게 해도 괜찮아, 그게 너라면(if that’s who you are). 그건 완전 다른 주제의 대화이긴 하지만.” 이 시트콤이 ‘신세대’ 마니아층을 보유한 까닭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한결같이 크레이지한 웃음을 선사하는 와중 당연하다는 듯한 톤으로 올바른 감수성을 유지한다. 위 대사가 등장하는 네 번째 시즌 제16화의 중심 사건은, 테리 반장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 경찰에게 범죄자 취급을 당한 일. 이후 제이크와 에이미는 아빠가 겪은 부당한 일을 케그니와 레이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듯 <브루클린 나인나인>은 자주, 사회적 이슈를 진지하게 다룬다. 마지막 시즌의 첫 화가 반영한 시대적 현실은 펜데믹만이 아니다. ‘BLM(블랙 라이브즈 매러)’ 운동과 핵심 키워드가 적절한 타이밍에 언급된다.

이와 더불어 ‘허투루 다루지 않기 위해’ 웃음기를 적당히 뺀 것이 로사의 커밍아웃 에피소드(시즌5, 10화)다. 오프닝 크레딧에서 인상을 구긴 채 컴퓨터 모니터를 부서져라 쾅쾅 치는 이가 바로 로사 디아즈. 그는 “무슨 여자가 도끼도 없어”, “여섯 살 넘어서 생일을 축하하는 놈들은 다 지옥에 가야 해” 등 다수의 명대사를 보유한, ‘세상에서 가장 쿨한’ 형사다. 왕년에 토슈즈 끈 좀 묶었으며 기계체조를 할 줄 아는, 연기마저도 완벽한 다재다능한 여자. 풍성한 컬의 흑발과 스모키한 눈화장, 가죽 재킷을 고집하는 그가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걸걸한 목소리와 툭툭 던지는 말투는 일관된 이미지를 더한다. 캐릭터 못지않은 능력자인 배우 스테파니 베아트리체는, 로사를 연기할 때 원래보다 한 톤 낮춘 목소리를 사용했다. 생일 축하와 감성적인 대화를 싫어하고 동료들에게도 사는 곳을 알리지 않으며 극단적인 표현을 자주 쓰는 그는, 입양한 강아지에 대한 애정도 “만약 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고 자살 할거야.”라는 선언으로 드러낸다. (으레 시트콤의 등장인물이 그렇듯, 픽션적 재미를 위해 과장된 성격이다.) 그런가 하면, 동료 에이미에게 고급 유아차를 타주기 위해 이틀 동안 잠을 포기하고 콘테스트에 참가하는 의리, 낸시 마이어스 영화를 좋아하는 의외의 면 또한 지닌 매력덩어리다.

초반 시즌 로사는, 잠입수사를 끝내고 나사가 하나 빠진 채 돌아온 피멘토 형사를 비롯해, 남자와 연애하는 모습만을 보였다. 그러나 시즌5의 9화, 참견쟁이 보일 형사는 연인과 통화 중인 로사 주위를 맴돌다 상대방이 여자임을 알아채게 된다. 시청자가 알게 되는 것도 같은 타이밍. 쿨하디 쿨한 로사에게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다, 관심이 부담스러웠을 뿐. 보일이 입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임을 예견한 그는, 며칠 후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담백하게 ‘바이섹슈얼’임을 공개한다.

부모님에게도 알리기로 결심한 로사는 제이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제이크는 가장 바람직한 ‘앨라이’(ally)*가 되어 준다. 여기서 잠깐, ‘제이크는 과연 앨라이이기만 한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겠다. 물론 반쯤은 ‘재미’로 해보는 것이지만, 그의 언행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의심’이기도 하다. 로사가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할 때 할 말을 함께 생각해주던 제이크는, 이내 이입해 폭풍 연설을 쏟아낸 후 눈물을 글썽이고 만다. 늘 그렇듯 ‘배역에 몰입’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대체 어디서 그토록 준비된 커밍아웃 스피치가 튀어나왔는지는 의문이다. 이와 별개로 제이크는 종종 같은 젠더에게 끌리는 제스처를 보였다. 본인 취향의 남자를 목격하면 눈을 번득이며 ‘핫하다’고 반복해 말하는 것은 일상. 누가 알겠나, 그가 남자와 연애하는 에피소드는 없었고, 제이크 페랄타의 소울메이트는 에이미 산티아고지만, 그것이 제이크가 반드시 스트레이트라는 뜻은 아니다.

* 앨라이 (ally) : 지지자, 협력자. 퀴어와 관련한 맥락에서 쓰일 경우 성적 소수자를 지지하는 비 성적 소수자를 일컫는다.

다시 로사에게로 초점을 돌린다. 두 여자가 서로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음을 납득하지 못하는 부모님에게 상처 받은 그는, 잠깐 가족과 연락을 끊고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님이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며 그들은 다시 쿨한 디아즈 패밀리로 뭉친다. 이후 작품은 로사가 여러 여자들과 연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본인이 허락하는 만큼만.

<브루클린 나인나인> 시즌5, 로사가 동료들에게 커밍아웃하는 장면

 

2. <엘리트들>(Netflix, 2018~), 레베 (& 폴로)

한 학생이 학교 수영장에서 살해당했다. 진실은 좀처럼 깔끔하게 밝혀지지 않고, 관계와 상황은 꼬여만 간다. 하이틴 드라마 <엘리트들>의 구성은 <빅 리틀 라이즈>(HBO)의 첫 번째 시즌과 닮았다. 과거를 풀어나가는 파트와 현재 시점의 심문 파트가 촘촘히 맞물리며 진행된다. 사건의 발단은 굉장한 부자/권력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라스 엔시나스 고교에 세 가난한 청소년(사무엘, 나디아, 크리스티안)이 장학생으로 들어온 것. 괴롭히는 자, 동정하는 자, 이용하는 자들에 둘러싸인 세 사람이 무난한 학교생활을 하기는 글렀다. 보다못해 하차하는 팬들이 많은 스페인식 막장드라마지만, 적어도 시즌3까지는 나름의 메시지와 꽤나 탄탄한 짜임새를 지녔다. 주요 인물들은 강렬한 개성과 입체성을 뽐낸다. 초반에는 도통 정이 가지 않던 이 십대들에게 갈수록 빠져들게 되는 까닭은, 다사다난한 날들을 보내며 이들이 대폭 성장해서다.

예외적으로 첫 등장부터 시청자의 호감을 휩쓴 이가 있었으니, 시즌2에 합류한 레베카, 일명 ‘레베’다. 수준급 복싱 실력의 소유자, 할로윈 파티 의상으로 <킬 빌> 속 우마 서먼의 노란 트랙수트를 당연하다는 듯 골라오는 레베는, 로사와는 다른 종류의 쿨함을 지녔다. 순금 귀고리를 즐겨 하는 그는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고 하던 작은 가게가 대기업 경쟁사의 마케팅으로 망한 후, 레베의 엄마는 마약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해 떼돈을 번다. 엄마와 달리 레베는 가난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나름의 올바름을 지키며, “미래의 지도자들”이 부리는 허세를 비웃는다. 아픔을 잘 숨기므로 겉과 속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나, 앞뒤가 같고 뒤끝이 없는 여자. 호불호가 뚜렷하고 직설적이며 상당한 친화력과 적당한 오지랖을 겸비한 그는 장학생들과 좋은 친구가 된다. 외모도 연기도 시원스러운 배우 클라우디아 살라스는 주로 유머러스하고 터프한, 때로는 고민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레베다움’을 유지했다.

사무엘을 꽤 오래 짝사랑하던 레베는 결국 그와 연인이 되는데, 레베의 팬이 아니더라도 ‘얼른 차버리라’고 하고픈 연애다. 친구들이 소울메이트를 놓치지 않도록 적절한 조언을 해주던 그인데, 정작 본인은 자신을 이용하는 남자에게 푹 빠지도록 만드는 서사가 얄궂다는 생각도 든다. 사무엘에게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지만… 엄마가 감옥에 가고 빈털터리가 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내던 레베가 의지할 사람이, 그 원인을 제공한 자라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진실을 알게 된 후, 그는 별로 좋은 친구도 연인도 아니었던 사무엘의 뺨을 때리-는 대신 복서답게 주먹으로 날린다.

다시 싱글로 돌아간 레베의 다음 로맨스 상대는 여자. 레베가 처음 ‘여자에게도 끌린다’고 털어놓는 장면은 시즌3, 사무엘과 사귀기 전에 등장한다. 그 대화의 상대는 오픈리 게이인 안데르, 장소는 병원 대기실이다. 시즌3의 주요 사건 중 하나는 안데르가 백혈병에 걸린 일, 레베는 학교 구석에서 홀로 울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친구가 병을 홀로 끌어안지 않도록 돕는다. 성적 지향에 대한 고백도 안데르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이야기하던 중 이루어졌지만, 가벼운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깔끔하게 닫힌 전개를 억지로 다시 열어 만든 듯한 시즌4에는 ‘보기 힘든’ 면이 꽤 있다. 아무리 십대의 실수로 넘기려 해도 자꾸 선을 넘어버리는 부유층 전학생들에겐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도 ‘없는 게 나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까닭은, 레베와 새로 부임한 교장의 딸 멘시아의 로맨스 서사. 멘시아 역시 잘못을 저지르고 무모한 행동을 하지만, 제 형제들보다는 정감 가는 인물이다. 레베에게 상처를 주나 미워할 수 없는 정도다. 마침내, 애정을 준 만큼 돌려받는 레베를 목격한 것으로 관람 가치는 충분했다.

라스 엔시나스에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끌리는 학생이 또 있었다. 첫 시즌에서 우발적 살인을 하고, 시즌3에서 죽는 폴로다. 시즌1 초반에는 오랜 여자친구 카를라와의 사이에 다른 남학생을 끌어들이고, 시즌2에서는 “너는 바이”라는 안데르의 말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수긍한 직후 그를 유혹하기도 한다. 나중에는 카예타나, 발레리오와 다자연애를 하기도. ‘멋지다’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나, 스스로 겪는 혼란과 고통이 너무 커다란 탓에 저지른 범죄와 이기적인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는, 안타까운 틴에이저이기도 하다. 특히 폴로 역 배우 알바로 리코의 위태롭게 무너지는 연기는 인물에 대한 판단을 잠깐 유보하게 했다.

<엘리트들> 시즌4, 레베와 멘시아의 관계에 대한 배우들의 인터뷰 영상

 

3. <더 폴리티션>(Netflix, 2019~2020), 페이튼, 리버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위해 이미 인생 계획을 전부 세워 놓은 고등학생 페이튼 호바트. 그 대망의 첫 캠페인은 학생회장 선거다. 그러나 앞길을 막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은데… ‘지금은 21세기, PC가 트렌드.’ 페이튼과 그 ‘일당’의 전략 중 하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한다. 그게 맞고,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더 폴리티션>은 성적 지향, 인종, 환경, 질병 등 여러 이슈를 선거 한가운데로 끌어와 특유의 긴박한 코미디로 다루면서도, 감수성은 바르게 유지한다.

예민하고 성급한 페이튼의 리듬이 잠시 속도를 잊는 것은 주로, ‘친구’ 리버가 화면에 등장할 때다. 리버가 페이튼의 중국어를 가르치게 되며 만난 그들, 각자의 여자친구가 있는 두 남자는 서로 사랑에 빠진다. 페이튼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리버의 깊고 초월적인 눈동자, 그를 대하는 페이튼의 무력할 정도로 일렁이는 눈빛. 그들의 만남에는 딱히 ‘복잡한 관계’나 ‘밀회’의 뉘앙스가 없다. 초 단위로 휙휙 변하는 페이튼의 고난이도(?) 상태를 능숙하게 소화한 벤 플랫과 리버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입은 데이비드 코렌스웻, 두 배우가 맞춘 호흡은 훌륭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리버는 페이튼의 라이벌 후보로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구체적인 정책과 화려한 언변으로 승부하는 페이튼, 그러나 학생들의 환호는 리버를 향한다. 단지 훤칠한 외모 때문은 아니리라. 페이튼의 ‘옳음’이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빠르게 계산한 결과라면, 리버의 ‘바름’은 드물게 선하고 따스한 성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름 ‘river(강)’처럼 주변을 제 넓은 품에 감싸며 흐르는 이. 그 넘치는 마음이 그를 슬프게 했던 것일까, 리버는 첫 화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이후 리버의 여자친구 아스트리드가 선거에 출마하고, 캠페인은 점점 카오스가 된다. 그러나 리버는 이야기의 발단으로만 소비되는 인물은 아니다. 죽은 후에도 페이튼의 환상 속에 등장해 영혼의 잣대 역할을 한다. 그가 한숨 돌리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괴물’이 되지 않도록.

적고 보니 리버는 ‘팬로맨틱’(panromantic)*에 가까울 것 같기도 하다. 혹은 그저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성인(saint)이었을지도. 그렇다면 페이튼에 대한 감정도 단지 아가페의 일환이었을까? 그렇게 해석되지는 않는다. 짧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눈빛은 특별하고 아련했다. 그들을 바이섹슈얼이라고 정의하기는 힘들 수도 있겠다. 이 관계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굳이 이름 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 사이 존재했던 눈물나게 아름다운 사랑을, 작품의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 포착했다.

* 팬로맨틱 (panromantic) : 다양한 모든 젠더의 사람에게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는 사람
<더 폴리티션> 시즌1, 페이튼과 리버가 처음 입맞춤하는 장면

 

4. <하트스토퍼>(2022, Netflix), 닉

앞서 배우 키트 코너의 말로 글을 열었다. 사실 그가 이른 나이에 대중에게 커밍아웃하게 된 데에는 웃지 못할 사건이 얽혀 있다. 일부 <하트스토퍼> 팬들이 “성적 지향을 밝히지 않은 채로 바이섹슈얼을 연기하는 건 ‘퀴어베이팅’(queerbaiting)*”이라며 SNS에서 집요하게 문제삼았던 것. ‘성적 소수자로 설정된 배역을, 같은 소수성을 지닌 배우가 연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시대이기는 하나… 타인에게, 그것도 고작 열 여덟의 소년에게 커밍아웃을 강요하는 행위는 함께 연기한 배우 올리비아 콜먼이 말했듯(원문) ‘괴롭힘’이고 “불공정한 일”이다. 퀴어베이팅이라는 워딩을 제대로 사용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 퀴어베이팅 (queerbaiting) : 퀴어 피플을 끌어들이는 마케팅. 주로 미디어, TV 시리즈나 팝 뮤직비디오/공연 등에서 이성애적이지 않은 끌림을 묘사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성적 지향은 헤테로섹슈얼로 전제되는 (픽선 서사의 경우 퀴어-로맨틱한 관계로 정의되지 않는) 상황을 문제삼는 데에 쓰이는 용어다.

<하트스토퍼>야말로, 퀴어베이팅과 가장 멀리 있는 작품 중 하나일 테다. 십대 퀴어들과 앨라이들의 로맨스를 다룬 TV 시리즈. 그래픽 노블 원작의 매력을 살린 동화 같은 연출은 배우들의 톡톡 튀는 연기와 딱 어울린다. 새학기를 맞은 트루엄 남학교, 찰리는 옆자리에 앉는 닉에게 반한다. 침실에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표지를 비롯한 포스터들과 드럼 세트를 둔 찰리, 럭비팀 주장인 닉. 언뜻 각자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였던 그들은 사실 꽤나 잘 통했다. 인사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다가 럭비 연습을 하며 친해지고, 점점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를 단지 ‘우정’이라 여겼던 닉은 곧 ‘너와 나의 손이 맞닿는 곳에 흐르는 전기’를 감지하며, 스트레이트로 확신했던 자신의 성적 지향에 물음을 던지게 된다.

‘무해한’ 시리즈로 알려졌으나, 현실을 대강 예쁘게 포장한다는 뜻은 아니다. 무의미하게 드라마틱한 자극을 끼워넣지 않고 등장인물을 존중하는 와중, 작품은 퀴어 청소년이 당면한 폭력을 외면하지 않는다. 닉이 “Am I gay?(내가 게이일까?)”를 검색한 결과에는 퀴어혐오적 폭력에 관한 기사와, “전환 치료” 광고 같은 것들이 포함돼 있다. 게이인 찰리와 그의 친구이자 트랜스젠더인 엘이 동급생들에게 당했던 괴롭힘이 언급되기도 한다. 닉의 ‘친구’ 해리는 찰리를 향해 집요하게 “농담”을 던지고, 레즈비언 연인 타라와 다아시는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한 이후 동급생들의 불쾌한 언행을 마주한다. ‘무해한’ 것은 선하고 용기 있는 주인공들, 주변 인물들이다.

찰리가 한 발 물러서면 닉은 한 발 다가와 살핀다. 감정에 혼란을 느끼며 잠깐 거리를 두기도 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물론 실수도 하지만, 금방 솔직하게 털어놓고 용서를 구한다. 타인을 배려하고 소중히 여기며, 늘 스스로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작품 초반, ‘닉의 친구들은 작년 널 괴롭혔던 애들’이라며 걱정하는 친구 타오에게 찰리는 말했다. “닉은 쟤들이랑 달라, 착해.” 그의 감은 옳았다. 첫 만남부터 찰리를 끌어당긴 것은 닉의 선하고 건강한 아우라 아니었을까. 키트 코너에게도 같은 에너지가 있다. 초반 화에서 주로 찰리의 내면에 집중하던 작품은 갈수록 닉의 복합적인 감정 변화를 포착하는데, 때로는 슬픔으로 글썽이고 때로는 설렘으로 반짝이는 키트 코너의 다채롭고 섬세한 눈빛은 과몰입을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다.

비밀 연애를 하며 본의 아니게 자꾸 찰리의 마음을 다치게 해 속상해하던 닉은, 어렸을 때 좋아했던 <캐리비안의 해적>을 다시 관람하게 된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올랜도 블룸을 번갈아 응시하며 눈을 빛내고, 영화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bisexual”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한다. 바이섹슈얼리티 관련 영상을 제작하는 유튜버 ‘Courtney-Jai’의 비디오를 보게 되는데, 이때 작품은 시청자가 닉과 함께 코트니의 설명을 집중해 들을 수 있도록 장면을 연출한다. 이 경험들은 닉이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찾는 계기가 되고, 그는 이후 찰리와 그의 친구들에게, 이어 엄마에게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털어놓는다.

<하트스토퍼> 시즌1 공식 예고편

그러고 보면 여자인 로사나 레베와 달리 제이크, 페이튼과 리버의 경우 ‘같은 젠더에게 끌리는 지향’이 언어로 명시되지는 않는다. 폴로는 어떤가, 캐릭터적 매력은 있지만 워낙 특수한 이슈를 달고 있는 탓에 선뜻 ‘TV 속 바이섹슈얼 남자의 표본’으로 꼽기는 망설여진다. 과연 키트 코너의 말처럼 픽션 속 “바이섹슈얼 레프리젠테이션은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남자의 경우”. 그런 의미에서, <하트스토퍼>와 닉의 존재는 보물 같다. 닉이 <캐리비안의 해적>을 ‘다시 보았’듯, 픽션과 미디어는 많은 퀴어 피플이 자신이 ‘무엇’인지 고민하거나 정의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위에 인용한 인터뷰에서 키트 코너가 다음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그러한 여정과 경험들을 묘사할 수 있게 되어 정말로 기뻤다.”(원문)

앞날은 희망적이라고 봐도 될까, 다양한 퀴어 캐릭터를 포함한 흥미로운 작품들이 속속 기획되고 있다.(초반 시즌 방영 후 캔슬된 작품도 다수지만.) 그 중 하나는 애덤 실베라의 소설 <두 사람 다 죽는다(They Both Die at the End)>를 원작으로 하는 시리즈. 두 주인공 소년 중 하나가 바이섹슈얼이다. <브리저튼> 크리에이터 크리스 반 뒤센이 각색 작업 중이며, 래퍼이자 배우 배드 버니가 프로듀서로 합류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원문) 흥미진진한 플롯, 섬세한 감수성과 따스함까지 겸비한 스토리와 멋진 바이 캐릭터를 화면에서 만날 날을 기다려본다.

 

Writer

제 주제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쓴다. ‘안 쓰지 못해 쓴다’고 버릇처럼 말한다. 픽션에 과몰입하고 듣던 음악을 또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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