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쳐다보지 마라>(1973)의 니콜라스 뢰그, <붉은 수수밭>(1988)의 장예모, <맨 인 블랙>(1997)의 배리 소넨필드, <무간도>(2002)의 유위강. 감독으로 이름을 알린 네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촬영감독 출신이라는 거다. 이들은 각각 로저 커먼, 프랑소와 트뤼포, 첸 카이거, 코엔 형제, 롭 라이너, 서극, 왕가위 등 다양한 감독들의 작품에서 촬영을 담당했다.

촬영감독으로서 렌즈를 바라보던 이들이 영화감독이 되어서 보여준 세계는 뚜렷한 개성을 자랑한다. 이젠 감독으로서 더 잘 알려진 이들은 촬영감독 시절에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까? 촬영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영화감독들이 촬영감독 시절에 찍은 작품들을 살펴보자.

 

니콜라스 뢰그의 촬영, <화씨 451>

니콜라스 뢰그

니콜라스 뢰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개봉 당시에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혹평에 시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작품들은 많은 마니아를 가지게 됐고, 현재 활동하는 감독 중 니콜라스 뢰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이들 또한 많다.

영화 <쳐다보지 마라>

니콜라스 뢰그는 <워커바웃>(1971), <쳐다보지 마라>(1973),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1976)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의 커리어는 촬영감독으로 시작됐다. 로저 코먼 감독의 <죽음의 가면>(1964)을 시작으로 <007 카지노 로얄>(1967)과 존 슐레진저 감독의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1967)까지 촬영으로 참여했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프랑수와 트뤼포가 레이 브래버리의 SF소설을 각색해서 연출한 영화 <화씨 451>은 니콜라스 뢰그가 촬영을 맡은 대표작 중 하나다.

영화 <화씨 451>

책을 금지하는 세상에서 ‘몬태그’(오스카 베르너)는 사람들이 숨긴 책을 찾고 태우는 일을 하고 있다. 몬태그는 퇴근길에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클라리스’(줄리 크리스티)에게 신경이 쓰이는 가운데, 서장(시릴 쿠삭)은 몬태그에게 곧 승진을 시켜줄 테니 일에 더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책을 태우는 게 자신의 업이라고 생각한 몬태그는 우연히 책을 읽으면 어떨지 상상하게 되고, 직접 책을 읽어본다.

<화씨 451> 트레일러

니콜라스 뢰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워커바웃>(1971)과 <쳐다보지 마라>(1973)에서 연출과 촬영을 겸하기도 했는데, SF 장르인 <화씨 451>에서의 촬영 경험은 상상력 가득한 니콜라스 뢰그의 연출작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니콜라스 뢰그의 작품은 정형화되지 않고 예측 불허인 게 매력인 동시에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정답이 없는 영화 세계에서 그의 개성은 오히려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우는 강점이기에, 많은 감독이 그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게 아닐까?

 

장예모의 촬영, <황토지>

장예모

중국 감독 중 가장 세계적으로 알려진 감독은 90년대 초반이나 지금이나 장예모일 거다. 감독 데뷔작인 <붉은 수수밭>(1988)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으며 단숨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수상 기록으로만 보면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서도 그만큼 많은 수상 기록을 가진 감독이 드물다. <홍등>(1991)과 <귀주 이야기>(1992)로 각각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황금사자상, <인생>(1994)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책상 서랍 속의 동화>(1999)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집으로 가는 길>(1999)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는 등 국제영화제에서 장예모의 수상 기록은 압도적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

장예모의 필모그래피는 연출이 아닌 촬영으로 시작된다. 장예모가 촬영으로 참여한 대표작은 <패왕별희>(1993)로 유명한 첸 카이거 감독의 데뷔작 <황토지>(1984)다. 90년대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인 장예모와 첸 카이거는 북경전영학원 동문으로, 첸 카이거는 데뷔작 <황토지>의 촬영을 장예모에게 맡겼다.

영화 <황토지>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챙기며 살아가는 소녀 ‘추이차오’(바이슈에)의 집에 민요를 수집하러 온 ‘구칭’(왕학기)이 잠시 머물게 된다. 팔려 가듯 시집을 가는 게 당연한 마을이기에, 구칭은 추이차오를 보며 옌안 지역에 가면 여성도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추이차오는 탈출을 꿈꾸면서도, 곧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시집을 가게 될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며 힘들어한다.

<황토지> 트레일러

장예모와 첸 카이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중국을 담아냈고, 결국 중국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감독들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두 감독이 뭉친 작품 <황토지>는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긴 호흡의 장면들이 많다. 영화 속 지루해 보이는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희망 없이 계속 이어지는 삶이기도 하다. 메시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느린 호흡을 만들어 낸 촬영은 결국 <황토지>가 중국 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위강의 촬영, <열혈남아>

유위강

유위강 감독은 전지현, 정우성 주연의 <데이지>(2006)를 연출하며 국내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감독이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정이건 주연의 <고혹자>(1996) 시리즈는 그를 흥행 감독으로 만들었고, 유위강의 최고 걸작이라면 맥조휘와 함께 연출한 <무간도>(2002) 삼부작이다. <무간도>에서도 연출과 촬영을 겸하는 등, 감독으로 이름을 알린 지금도 촬영을 겸할 때가 많다.

영화 <무간도>

주윤발 주연의 <용호풍운>(1987) 촬영감독으로 데뷔한 유위강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이름은 왕가위다. 유위강은 최근 국내에 재개봉한 왕가위의 <중경삼림>(1994)에도 촬영으로 참여했다(1부는 유위강, 2부는 크리스토퍼 도일이 촬영). 유위강과 왕가위의 인연은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1987)에 유위강이 촬영으로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왕가위 감독의 촬영감독이라고 하면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촬영을 맡은 크리스토퍼 도일부터 떠올리지만, 데뷔작을 함께 한 촬영감독은 유위강이다.

영화 <열혈남아>

‘아화’(장만옥)는 지인의 소개로 ‘소화’(유덕화)의 집에 머물게 된다. 건달로 지내는 소화는 함께 다니는 동생 ‘창파’(장학우)에 대한 애정이 크다. 창파는 계속해서 사고를 치고 다니고 소화는 이를 수습하기 바쁜 가운데, 아화와 소화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 커지는 것을 느낀다.

<열혈남아> 트레일러 

<열혈남아>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스타일과 정서를 처음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유위강 감독의 작품에서 왕가위 감독의 영향을 느끼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무간도>에서 촬영과 연출을 겸할 때도, 왕가위 감독과 주로 호흡을 맞춘 크리스토퍼 도일과 함께 촬영을 맡기도 했다. <열혈남아>와 <중경삼림>의 촬영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미 감독으로 자리 잡은 유위강이 왕가위와 다시 호흡을 맞추는 날을 꿈꾸게 된다.

 

배리 소넨필드의 촬영, <미저리>

배리 소넨필드

할리우드에서 시리즈 영화를 성공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배리 소넨필드는 <맨 인 블랙>(1997)을 삼부작까지 만들면서 대중들에게 성공적인 시리즈로 각인시킨다. <맨 인 블랙> 외에도 <아담스 패밀리>(1991)는 속편까지 제작되며 성공을 거두었고, <겟 쇼티>(1995),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1999) 등 배리 소넨필드의 필모그래피는 해당 장르의 문법에 자신의 개성을 더한 장르 영화로 가득하다.

영화 <맨 인 블랙>

할리우드에서 상업적인 감각으로 이름을 알린 배리 소넨필드지만, 그의 커리어 시작은 코엔 형제와 함께였다. 지금은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와 주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코엔 형제이지만, 데뷔작 <블러드 심플>(1984)부터 <아리조나 유괴 사건>(1987), <밀러스 크로싱>(1990)까지 배리 소넨필드가 촬영을 맡았다. 롭 라이너 감독도 훗날 자신의 대표작이 된 두 작품의 촬영을 배리 소넨필드에게 맡겼는데, 바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미저리>(1990)다.

영화 <미저리>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저리>는 스릴러와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작품이다. ‘미저리’ 시리즈로 유명한 소설가 ‘폴 쉘던’(제임스 칸)은 운전 중에 폭설로 인해 차가 전복되며 의식을 잃는데, ‘애니 윌킨스’(캐시 베이츠)가 폴을 구하고 자기 집에서 보살핀다. 애니는 폴에게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고, 몸을 다친 폴은 애니의 집에 갇힌 신세가 된다.

<미저리> 트레일러 

스릴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촬영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미저리>가 지금까지 관객들에게 기억되는 이유 또한 공포를 극대화한 촬영 때문일 거다. 배리 소넨필드가 감독 데뷔 후에도 장르 영화의 문법을 충실히 해낼 수 있었던 건, 장르적인 특성을 살린 작품들의 촬영감독으로 참여한 경험 덕분이 아닐까? 감독 데뷔 이후로는 촬영을 맡고 있지 않지만, <미저리>를 보고 있으면 그가 직접 연출한 작품에서 촬영을 직접 맡았으면 영화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상상해보게 된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용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