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넘쳐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볼 때마다 자주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야기 안에서 여성이 그려지는 방식에 대해 언제나 의문을 품고 있었다. 주변에 살아 숨 쉬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너무나 다양하여 몇 가지로 귀결될 수 없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미디어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은 쉽게 꾸며지고, 예측 당했으며, 한두 가지의 특성들로 귀결되곤 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소비하는 것에 크게 분노하던 때가 있었다. 여성이 부여받을 수 있는 문장과 단어의 한계가 곧 나의 한계를 뜻하던 때가 있었다. 이것이 과거형으로만 남아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물론 이 ‘때’는 지금도 계속 유효하다. 내가 나의 서사를 의심하고, 그 가능성을 의심할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직접 여성의 서사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찾아다녔던 것은 ‘여성 영웅’의 이야기였다. 강인하고, 완전하고, 흔들림 없는 닮고 싶은 여성 영웅들. 강렬한 모습과 이야기에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지만, 공허함을 떨칠 수는 없었다. 내가 보고자 했던 것은 불완전하고 미숙하지만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닮은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나의 친구들과 가족과 선배들의 이야기였다. 그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느슨한 연대로 묶여 외롭지 않게, 다시 한번 세상을 헤엄쳐 갈 힘을 얻곤 했다.

그리고 이제 2019년이 되었다. 정말 다행히도, 매년 새로운 여성 서사를 발견할 수 있는 매체는 늘어가고 있다. 2018년과 2019년의 신간들 위주로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만화들을 소개한다.

 

이슬아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2018년은 이슬아 작가의 해였다. ‘일간 이슬아’로 혜성처럼 등장하여, 감정을 건드리는 문체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슬아 작가가 장편 만화를 출간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아, 읽기 전에 나름 (울지 않으려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책장을 펼쳤다가, 그의 일생과 그 일생을 가득 채운 엄마 복희의 이야기에 울고 웃어버렸다.

아름답고 비범했지만 ‘슬아’의 엄마로 남아주었던 ‘복희’. 그리고 그 복희가 준 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는 딸이 되어 그에 대한 글을 쓰고 말았던 딸, 슬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달콤하고도 비릿하게 다가오며 수많은 딸들과 엄마들의 서사를 그림과 문장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렇지만 엄마의 훌륭한 표본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님을 내내 기억하며 용기를 내어 책을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고를 수 없었던 인연 속에서 어떤 슬픔과 재미가 있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1960년대생 여자와 1990년대생 여자가 살아가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일 테다. 나를 씩씩하게 만든 이야기니까 누군가에게도 힘이 된다면 좋겠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만화를 보고 눈물을 지었던 이유는, 결코 복희의 ‘완벽한 모성’에 탄복해서가 아님을 밝혀둔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모성이 아닌, 딸과 엄마로 만났지만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두 여성의 연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슬아 엄마는 ‘복희’라는 그 이름 그대로 등장하며, 슬아만큼의 서사와 결을 가진 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두 사람이 연대를 이루는 방식은 때로는 너무나도 가깝게, 때론 조금은 거리를 유지하며 길고 길게 유지된다. 엄마와 딸의 ‘연대’가 이토록 평범하고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왜 이제까지 모르고 지내왔을까.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홍보 이미지, 출처 – 이슬아 인스타그램 

책을 읽으며 필연적으로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도대체 왜 나를 사랑할까?’, 반문하던 시절에 이미 깊이 엄마를 사랑하고 있었던 유년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엄마의 나이와 엄마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시절 우리에게도 이만큼 서로를 사랑하며 연대하던 수많은 추억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엄마와 딸이라는 진부한 이유가 아닌, 그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곱씹어본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를 적극 추천하는 동시에,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한 후 책장을 넘기기를 조심스럽게 권유해본다. 깊이 묻어두었던 추억이 한번에 달려들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정원 <올해의 미숙>

“야, 미숙아! 미숙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장미숙은 고개를 숙인다. “미숙아”라는 말을 하며 반 친구들은 그를 비웃는다. 장미숙은 말그대로 미숙이기도 하면서, 미숙아가 아니기도 하다.
<올해의 미숙>은 미숙아, 라고 불리는 장미숙의 유년시절과 현재까지의 기억, 닳고 닳아 빨갛게 드러난 아픈 기억들을 하나씩 들추어낸다. 시대를 성찰하는 시인 아버지를 두었지만, 그 아버지는 시대가 아닌 가정에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따랐지만, 존경하던 아버지의 모습과 그 현실적 모습의 괴리에 점점 어긋나버린 친언니. 분노를 꾹꾹 눌러담으며 삶을 사는 어머니. 장미숙은 어딘가가 멈춰버린 채로 그렇게 꾸역꾸역 삶을 살아간다.

<올해의 미숙> 북트레일러

하지만 그 불행에도 불구하고, 장미숙은 어른이 된다. 여전히 조금은 모자라고, 지독히 현실적인 삶을 사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살아간다. 그리고 미숙은 본가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진 개 ‘절미’를 데리고 나온다. 어딘가 멈춰버린 미숙과 절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까. 불안하고 위태하면서도, 방에서 뛰쳐나오는 강아지 절미와, 그런 강아지를 보드랍게 쓰다듬는 미숙의 손길을 볼 때마다 조금은 안도하게 된다.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것과 달리 가난의 모습은 홀쭉하지 않다 가난의 주머니는 불룩하다. 그 주머니엔 이를테면 냄새와 흉터와 눈치와 질병과 자책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 <올해의 미숙>에는 장미숙의 미숙함 말고 미숙한 어른들과 아이들이 등장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이런 일들이 다 있어,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 말고도, 이 책을 통해 그걸 다시 겪으며 속상해 올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 황정은 소설가의 추천사 중에서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미숙. <올해의 미숙>을 응원한다. 내년도 내후년도 어차피 언젠가는 ‘올해’가 될 테니, 미숙은 언제나 현재를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수많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미숙을 닮은 ‘우리’의 올해도, 역시 외롭지 않길 바란다.

 

김예지 <저 청소일 하는데요?>

청소일을 하면서 느꼈던 많은 감정과, 맞닥뜨린 현실의 이야기를 친근감 있는 그림체로 훌훌 풀어버린 <저 청소일 하는데요?> 김예지 작가.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생계를 직접 책임져야 했던 그가 선택한 일은 ‘청소일’이었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응원해주고 그 길을 함께 가꿔준 엄마의 적극적인 추천이기도 했다. 만화 속 ‘나’는 엄마와 직장 동료가 되어 함께 일을 하고, 고충을 나눈다.

하지만 청소일을 하는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결코 녹록치 않은 것이었다. 더욱 힘든 것은 ‘나’ 마저도 청소일에 갖고 있는 편견들이었다. 시선에 위축되고, 불쾌한 일을 겪을 때마다 자괴감에 빠져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청소일을 계속한다. 청소 전문 장비들을 갖추고, 더욱 프로페셔널하고 진지하게 일을 대한다. ‘나’는 이 일을 통해서, 오히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직접 겪지 않았으면 결코 알 수 없었던 일들을 겪어 오며,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저 청소일 하는데요?> 북트레일러

<저 청소일 하는데요?> 책 말미에 붙여진 물음표와 같이, 자신의 선택과 삶을 기꺼이 감당하는 당당한 여성의 모습은, 그를 바라보는 다른 여성들에게도 또 다른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 ‘내 선택’과, 그 선택을 지지하고 책임지는 모습에서, 삶을 정당하고 올곧게 살아가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독자들이 청소일하는 하는 주인공을 연민 혹은 동정의 눈으로 보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 주인공을 보고 불행으로 우월감을 느끼게 하지도 않는다. ‘나’는 곧 우리이며, 우리가 곧 ‘나’이다.

김예지 작가는, 일과 정체성에서 오는 혼란과 고민들이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되어 이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조금 다르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행복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작가와, 그 행복함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을 보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작은 계기를 얻을 수 있다.

 

이 글을 쓰고, 이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마음 가득 행복한 충만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야기의 힘이 이렇게 크다니, 라고 다시 한번 놀라기도 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우리의 서사는 무궁무진하다. 물론 이 ‘무궁무진’에는 물론 좋은 것만이 들어있지는 않다. 그 주머니 안에는 불행과 행복, 슬픔과 분노 등이 한데 섞여 있다. 하지만 그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이 주머니를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삶을 살아갈 자격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으로 우리의 삶이, 다양하게 ‘무궁무진’하길, 또다시 바라본다.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