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계절이다. 전기장판을 깔고, 그 위에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워, 귤을 하나씩 까먹으면서 드라마를 몰아 볼 생각만 해도 설레는 계절. 그리고 우리에겐 넷플릭스가 있다.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 교도소에 복역 중인 여자들,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중학생들과 마약 하나로 대륙을 호령한 두목이 우리를 기다리는 그곳. 드라마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꿈의 공간. 그 안에서라면 영하의 겨울 날씨도 따뜻하기만 하다.

비디오를 집으로 배달해주는 비디오 대여사업으로 시작해 미디어 업계의 괴물로 크기까지 넷플릭스는 사실 광고가 필요 없었다. 넷플릭스 관계자도 인정했다시피 “훌륭한 콘텐츠 자체가 마케팅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넷플릭스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넷플릭스에게 필요 없었던 건 전통적인 의미의 광고일 뿐. 넷플릭스는 광고업계도 인정할 만큼 혁신적인 마케팅으로도 유명하다.

넷플릭스가 펼쳐온 광고 캠페인들 중 흥미로운 것들을 한데 모아봤다.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면 기사를 다 읽고 나면 ‘내가 찜한 콘텐츠’에 들어갈 드라마들이 대거 늘어나게 될 거라는 것. 오늘 밤은 그 드라마들을 몰아보느라 잠들기 힘들 수도 있다는 것. 감당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살펴보자. 넷플릭스가 자신들의 드라마를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광고했는지를 말이다.

 

2016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4의 ‘FU2016’ 캠페인

드라마보다 현실 정치가 더 드라마틱했던 2016년. 드라마는 설 자리가 없어 보였다. 드라마 주인공보다 더 강한 캐릭터의 대선 후보들부터 명대사를 방불케 하는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 마지막 순간까지 엎치락뒤치락한 지지율까지. 하루하루가 반전으로 가득한데 누가 굳이 드라마를 보겠는가. 이런 와중에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4가 스트리밍된다는 것을 알려야 했던 넷플릭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넷플릭스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모두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은근슬쩍 자신들도 현실 정치의 일부인 척 끼어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트럼프로부터 가로채 왔다. 역시 정치의 달인 ‘프랭크 언더우드’다운 행보였다.

FU2016 광고, ‘프랭크 언더우드의 가상 대선 광고’

시작은 TV 광고 한 편. 2015년 12월,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 토론을 보던 유권자들은 아주 익숙한 선거광고 한 편을 접했다. 뻔하디뻔한 광고였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미국 국민들의 면면에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웅장한 음악과 펄럭이는 성조기까지. 선거 광고의 모범 답안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터. 하지만 여기까지 보고도 채널을 돌리지 않은 이들은 놀라운 반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선거 광고의 주인공은 바로 프랭크 언더우드였던 것. 이 광고는 방영되자마자 SNS를 뜨겁게 달궜다. 광고가 방송된 지 24시간 만에 조회수는 거의 7백만 건을 기록했다. 실제로 프랭크 언더우드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은 걸 트럼프나 힐러리가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의 뜨거운 반응이었다.

FU2016 광고, ‘프랭크 언더우드가 말하는 미국의 대통령’

TV 광고는 시작에 불과했다. 넷플릭스는 FU2016.com이라는 웹사이트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얼핏 프랭크 언더우드의 선거용 사이트처럼 보이는 이 웹사이트에서는 FU라는 글자로 자신의 프로필 사진을 꾸밀 수 있는 간단한 프로세스도 제공했다. FU가 욕설처럼 느껴진다고 스스로 타락했다며 자책할 필요는 없다. FU는 프랭크 언더우드의 약자이기도 하지만 교묘하게 욕설처럼 느껴지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FU라는 글자를 자신이 반대하는 것 앞에 붙여 SNS 프로필 이미지로 쓰지는 않았을 테니까.

출처 – The Inspiration room
출처 – the TOMMY B 

캠페인은 오프라인까지 뻗어 나갔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그린빌(Greenville, 드라마 팬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곳, 바로 프랭크 언더우드의 고향)에는 프랭크 언더우드의 가상 선거대책본부가 차려졌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드라마 속 프랭크 언더우드가 앉았던 책상에 앉아 사진을 찍고, 각종 FU2016 캠페인 굿즈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무료 음식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음식에는 ‘프레디 BBQ’라고 쓰여있었다. 프랭크 언더우드가 단골로 삼았던 바로 그 음식점! 드라마 팬으로서 이 BBQ만은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은 건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출처 – Only in Your State

여기에 절묘한 옥외광고도 거들었다. 뉴욕과 워싱턴DC의 지하철에도 FU2016 포스터가 걸려있었는데 문구가 심상치 않다. 미국 국기 앞에 당당히 자리 잡은 프랭크 언더우드. 거기까진 선거광고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헤드라인이 “Push in the Right Direction” 이다. 해석하자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자” 정도인데. Push라는 단어가 걸린다.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1을 본 사람이라면 ‘Zoe’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티저 광고는 또 어떤가. “Back on Track”이라니. 어쩐지 Zoe의 망령이 캠페인에 함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4 트레일러, ‘Tracks’ 편

칸 광고제 심사위원 중에도 <하우스 오브 카드>의 팬이 많았던 것 같다. 미디어통합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준 것을 보면 말이다. 미국 대선을 앞지르는 화제성에 칸 광고제 그랑프리까지 얻어간 <하우스 오브 카드>. 프랭크 언더우드에겐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이나 값진 승리일지도 모르겠다.

FU2016 캠페인 설명

 

2016 <나르코스> 시즌2의 ‘Narcos Spanish Lessens’ 캠페인

한 <나르코스> 팬이 말했다. <나르코스>를 통해 무료로 스페인어를 배울 수 있다고. 넷플릭스는 이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 <나르코스> 시즌2를 스트리밍하기에 앞서 시즌2도 홍보할 겸 <나르코스> 스페인어 강좌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어학원에서는 가르치지 않을 법한, 하지만 그 어떤 단어보다도 활용도가 높은 스페인어 단어들을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강사가 되어 직접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Coma mierda(eat shit)”나 “Hijo de puta(son of a bitch)” 같은 단어들. 이 얼마나 생생한 스페인어인가!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Narcos Spanish Lessons’ 캠페인 중 ‘coma mierda(Eat Shit)’편
‘Narcos Spanish Lessons’ 캠페인 중 ‘Hijo de puta(Son of Bitch)’편

강좌 하나가 게시되면 게시된 당일과 다음 날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15000개의 비슷한 내용이 올라왔다. 캠페인은 5200만 명에게 노출되었고, 조회수는 1330만 건을 기록했다. <나르코스>의 소셜미디어 계정의 팔로워 수도 50%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니 <나르코스> 시즌2가 대성공을 거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016년 3분기 넷플릭스는 목표보다 55% 더 많은 가입자를 확보했다. 넷플릭스의 CEO는 주주 연설에서 회사의 가장 큰 성공요소로 <나르코스> 시즌2를 꼽았다. CEO까지 인정한 대히트였다.

‘Narcos Spanish Lessons’ 캠페인 설명

팬들은 아쉬워했고, 넷플릭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소셜 미디어에 짧게 올렸던 강좌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언어교육 앱인 Babbel 앱과 손잡고 제대로 된 스페인어 수업을 시작했다. <나르코스> 버전의 스페인어 수업은 일반 Babbel 수업과 비슷했지만 사용자에게 <나르코스>의 장면 장면을 보여주며 스페인어를 가르친다는 점이 달랐다. 그러니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동기부여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수업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스웨덴어까지 여섯 개의 언어로 스페인어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어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간 것이다. 마약에 이어 스페인어도 전 세계를 중독시켜버린 셈이다.

넷플릭스와 Babbel 앱이 합작한 스페인어 과정

넷플릭스는 이미 알고 있다. <나르코스>의 줄거리를 듣는 것보다 <나르코스>에 열광하는 팬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드라마를 아직 보지 못한 이들의 구미를 더 당긴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넷플릭스의 광고 캠페인들은 대체로 드라마의 기존 팬들을 위한 것이다. <나르코스>의 팬들에게 <나르코스> 스페인어 강좌를 열어주고, <하우스 오브 카드>의 팬들에게 프레디 BBQ와 ‘FU2016’ 티셔츠를 나눠준다. 이쯤 되면 넷플릭스 드라마 팬질은 한 번쯤 해볼 만한 일인 것 같다.

 

2017 ‘Netflix Is A Joke’ 캠페인

출처 – D and AD
출처 – Claudia Eller 트위터 

2017년 9월, 어느 날부터인가 수상한 옥외광고가 뉴욕과 LA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얀 바탕에 까만 글씨의 카피는 달랑 한 줄. “Netflix is a Joke”. “넷플릭스는 농담이다”라니. 이렇게 대놓고 1위 스트리밍 회사를 저격할 수가 있나. 사람들은 넷플릭스의 경쟁사나 넷플릭스를 목표로 하는 신생회사들을 의심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은 쏠렸지만 이렇다 할 답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2017년 에미상 시상식 전까지는 말이다.

‘Netflix Is A Joke’ TV 광고

2017년 9월 17일 에미상 시상식, 시상식 중간에 광고가 하나 방영됐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는 물론 <기묘한 이야기>, <더 크라운>,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중간에 Jerry Seinfeld, Dave Chappelle, Ellen DeGeneres 그리고 Chris Rock과 같은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끼어들어 농담을 하는 광고. “Netflix is a Joke”의 의미가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Netflix is a Joke”는 다름 아닌 넷플릭스에서 곧 시작할 스탠드업 코미디을 홍보하기 위한 캠페인이었던 것. 넷플릭스가 넷플릭스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스탠드업 코미디 또한 충분히 재미있다면서.

넷플릭스는 사실 오래전부터 스탠드업 코미디에 공격적으로 투자를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스탠드업 코미디의 강자는 그동안 HBO였다. 넷플릭스의 CCO(chief content officer)인 Ted Sarandos는 <GQ>와의 인터뷰에서 “HBO가 우리처럼 되는 것보다 더 빨리 우리가 HBO처럼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HBO는 넷플릭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지난 몇 년간 최고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모두 넷플릭스가 공개한 프로그램들이었던 것. Louis C.K. 2017이나 Dave Chappelle's The Age of Spin and Deep in the Heart of Texas 그리고 Ali Wong: Baby Cobra가 그러했다. 게다가 2017년에는 Jerry Seinfeld, Dave Chappelle, Ellen DeGeneres, Chris Rock, Louis C.K. 그리고 Amy Schumer 등의 코미디언들과 특별급 1100만 달러에서 2천만 달러 규모의 계약까지 체결했다.

이미 드라마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넷플릭스가 왜 이런 도전을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한 번 제작할 때마다 제작비가 1억 달러를 쉽게 넘어버리는 반면, 스탠드업 코미디는 1천만 달러나 2천만 달러 선에서 탑 레벨의 코미디언을 캐스팅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1억 명이 넘는 가입자를 보유한 넷플릭스가 아니던가. 드라마에 안주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넷플릭스는 지금까지의 넷플릭스를 우습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일들을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Netflix Is A Joke’ 캠페인 중 Dave Chappelle 편
‘Netflix Is A Joke’ 캠페인 중 Seinfeld 편

 

넷플릭스의 광고 캠페인이 이 정도가 다라고 생각할까 봐 겁난다. 넷플릭스 드라마들에 등장하는 강하고 거침없는 여성 캐릭터들을 한데 모아 마치 오래된 교육 영상처럼 만든 ‘Rules for the Modern Woman’(현대 여성을 위한 규칙)을 비롯해 <블랙미러> 세 번째 시즌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가상의 기술 ‘넷플릭스 비스타’ 소개 영상까지…. 지면 관계상 다 담지 못했을 뿐 근사한 광고 캠페인이 너무도 많다.

#SheRules 캠페인 중 ‘Rules for the Modern Woman’ 영상
블랙미러 시즌3 홍보를 위한 ‘Netflix Vista’ 소개 영상

 

메인 이미지 출처 – D and AD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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