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컷

 

페이시스 플레이시스(Faces Places)

누벨바그의 유일한 여기수, 아녜스 바르다의 새 다큐멘터리가 극장을 방문했다. 제목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원제는 <페이시스 플레이시스>(Faces Places)다. 젊은 영화감독이자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제이알(JR)과 아흔의 나이에 접어든 아녜스 바르다가 조금은 즉흥적인 프로젝트에 나선다. 무려 바르다의 쉰두 번째 작품이 된 이 영화는 신구 세대의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할 법한 우정을 보여준다. 장 뤽 고다르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하는 새까만 선글라스의 아티스트 JR, 그리고 투톤의 단발머리를 한 통통한 수다쟁이 할머니 아녜스 바르다(바르다는 한 영화에서 자신을 ‘통통한 수다쟁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의 인간 기행이 펼쳐진다.

아녜스 바르다

두 사람은 우연과 영감이 이끄는 대로 프랑스 곳곳을 누비는 특별한 여행을 떠난다.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포토 트럭에서 이들의 얼굴을 출력한다. 출력된 얼굴은 JR의 손을 거쳐 생동하는 벽화로 다시 태어난다. 이 일환의 프로젝트를 말로 설명하는 건 역시 무리다.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닌 실제 삶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진한 인생들, 그들에 바치는 바르다의 존중과 경외,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던 제 인생을 예술 작품으로 마주한 사람의 북받친 표정들. 이를테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선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방금 늘어놓은 설명은 금세 잊어도 좋다. 인생이 통째로 들어앉은 하나의 표정 앞에 이 말들은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컷

 

 

경외로 쌓아 올린 시네마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관람 뒤엔 기묘한 행복과 충만이 샘솟는다. 바르다는 ‘경외’라는 재료로 영화를 만든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를 보고, 그 관찰은 포착과 고찰로 이어진다. 여러 편의 훌륭한 극영화를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가장 ‘바르다스러운’ 영화의 정수는 다큐멘터리에 있어 보인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인 <도큐멘추어>(1980)도 있었던 데다, 그 비슷한 시도는 그의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거듭돼 왔다. 언제나 통통한 수다쟁이 바르다의 목적지가 없는 사색이 뼈대를 이루고, 실체(혹은 영혼, 혹은 본질)와 유령(혹은 이미지, 혹은 표상)을 오가는 재미난 상상이 끊임없이 발휘된다.

제이알(JR)

필자가 바라본 아녜스 바르다는 유쾌한 사색가이며, 늙지 않는 찬미자이고, 여전히 꿈을 꾸는 예술가다. 고백하자면 빈틈없이 예민했고 날이 서 있던 나의 마음 한구석은 지난 주말 바르다의 영화들로 숨통이 트였다. 또 어떤 영화는 오랜 여운에 시달리게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영화에 감사를 느낀다. 다시, 내게 도착한 경외를 그에게 돌려드린다. 아녜스 바르다! 비바 라 비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포스터

 

 

바르다의 다른 영화 세 편

 

<방랑자>

Vagabondㅣ1985ㅣ드라마
<방랑자> 스틸컷

원제는 <Sans Toit Ni Loi>로 ‘법도 지붕도 없이’라는 의미다. ‘모나’(상드린 보네르)라는 이름의 여성은 법도 지붕도 없이 방랑하는 떠돌이다. 영화는 차가운 땅에서 모나의 시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모나를 만난 적이 있는 이들의 짤막한 인터뷰와 플래시 백으로 구성된다.

<방랑자> 트레일러

<방랑자>는 이른바 실존에 부치는 찬가다. 세속과의 결별을 선택한 모나의 방식은 겉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떻게 본다면 누구보다 삶 자체를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인간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래 던져진 존재라는 실존적 물음이 모나의 삶을 통해 되풀이되고 이것이 우리를 어지럽힌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들 중에는 “그 아가씨는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요“라는 언급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곧잘 허무주의에 빠지는 까닭이 실존과 현실 사이를 애매하게 배회하기 때문일지도.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The Gleaners and Iㅣ2000ㅣ다큐멘터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스틸컷

유명 화가 밀레의 작품 <이삭 줍는 여인들>에서 시작해 ‘줍다’라는 행위를 전방위적으로 좇아가는 이야기. 이삭줍기는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낱알이 뜯긴 벼 이삭을 줍는 행위이자 무가치한 존재의 잉여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 영화가 따라가는 궤적 역시 동일하다. 버려진 것들은 사실상 온전히 100%의 역할을 다한 채로 버려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남은 가치를 줍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트레일러

바르다의 내레이션에 의하면, “배부른 세상에서 여전히 허리를 숙이는 사람들이 있다.” 형편이 여의치 않은 빈민들의 줍기에 관한 영화라는 식의 연민 어린 시선으로 이 영화를 대한다면 그건 명백한 오역이다. 이것은 교육 수준이나 벌이와는 무관한 줍기의 영화다. 되려 이들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줍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바르다는 줍는 행위가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The Beaches of Agnesㅣ2008ㅣ다큐멘터리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스틸컷

아녜스 바르다의 자화상을 담은 지극히 사적인 영상 르포르타주. 여든 살이 된 바르다의 출생부터 현재까지를 찬찬히 더듬는다. 프랑스인 어머니와 그리스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오 남매 중 셋째였던 아녜스는 영화광이 아니었다. 그는 사진작가로 먼저 활동했고, 이미지만으로는 전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남기고자 영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트레일러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장 뤽 고다르, 알렝 레네, 크리스 마르케 등의 예술가와 함께였던 누벨바그에 대한 회고를 비롯해 인생의 반려자 자끄 드미와의 삶, 페미니즘, 여행, 가족과의 파편들을 나열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 또렷이 남은 해변의 잔상으로부터 시작해 아녜스 바르다의 삶과 예술, 사색과 상념들과 조우하는 이 영화는, 여전히 생기 넘치는 바르다의 시각과 언어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어떤 충만에 이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메인 이미지 출처 ‘FANDOR’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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