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뮤지컬 영화는 지금 우리에겐 현란한 탭 댄스와 색색의 비주얼, 그리고 꿈과 사랑을 천진난만하게 노래하는 젊은 청춘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야기를 노래와 춤으로 전하는 뮤지컬 영화의 감각적인 표현 방식은 복잡한 서사와 설정 없이도 주인공의 감정선에 폭 빠져들게 해 1930~50년대 미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화려한 비주얼로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 세계를 만든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사람들에게 현실로부터 도망칠 도피처가 되어줬지만, 꿈과 사랑을 손쉽게 이루는 ‘아메리칸 드림’ 서사에 요란하기만 한 껍데기를 갖췄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한편 고전 뮤지컬 영화의 알맹이는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려는 단순하고도 순수한 방식에 있다. 뿜어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는 단순함 말이다. 뮤지컬 영화의 기존 역법과 편견을 뒤집은 영화 <라라랜드>의 감독 다미엔 차젤레는 이 단순함에 매료되어 뮤지컬 영화를 찍고 싶다는 동기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1952) 스틸컷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진 켈리는 연인을 바래다주고 행복감에 빠져, 비 오는 거리를 걷다 갑자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죠. 매우 감정적인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는 것, 그 외엔 자신의 감정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 노래와 춤에 빠져드는 것, 그것이 뮤지컬의 본질인 것 같아요.”

- 다미엔 차젤레 인터뷰 중


이처럼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려는 고전 뮤지컬 영화의 본질적인 방식을 따라 주인공의 감정선을 아름답고도 처연하게 표현한 현대 영화들이 있다. 고전 뮤지컬 영화에 헌사를 바치는 동시에 자신만의 색깔을 더해, 이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두 영화 <라라랜드>와 <셰이프 오브 워터>를 샅샅이 살펴보자.

 

고전 뮤지컬 영화에 현대적 감각을 더하다, <라라랜드>

영화 <라라랜드> 스틸컷

<라라랜드>(2016)는 고전 뮤지컬 영화를 향한 감독의 헌사 그 자체다. 다미엔의 고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려는 듯 <라라랜드>는 첫 오프닝부터 고전 뮤지컬 영화를 표방하며 시작한다. 2.55:1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큼지막한 자막으로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은 마치 1950년대 뮤지컬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전반적인 색감 역시 원색을 포인트 컬러로 활용해 색채가 화려한 고전 뮤지컬 장르를 연상시킨다.

‘A Lovely Night’ 탭 댄스

다미엔은 고전 뮤지컬 영화의 기법과 양식을 표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인공들이 겪는 본연의 감정을 녹여내는 데 더욱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탭 댄스를 얼마나 정확하고 정교하게 추느냐’보다 ‘두 주인공의 감정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매 순간에 담겼는지’가 최우선이다. 두 남녀가 탭 댄스를 주고받는 장면(‘A Lovely Night’)은 현란한 안무로도 유명하지만, 서로를 향한 끌림을 숨기고 장난스럽게 ‘밀당’하는 과정을 스탭 하나하나에 꾹꾹 담았다는 점이 더욱 탄성을 자아낸다. 영화의 대표적인 음악 ‘City of Stars’나 ‘미아’의 오디션 장면 속 노래(‘The Fools Who Dream’) 역시 배우의 가창력이나 기술적인 정교함을 강조하기보다는, 라이브로 부른 그들의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살려냈다. 어딘가 약간은 거칠고 투박한 배우들의 호흡과 음정이 오히려 주인공들의 희망과 상실감을 더욱 여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인위적인 믹싱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

오프닝 넘버 ‘Another Day of Sun’

<라라랜드>의 이야기는 큰 틀에서 봤을 때 꿈과 낭만을 좇는 젊은 청춘들이 사랑에 빠진다는 고전 뮤지컬 영화의 서사 법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라라랜드>의 줄거리를 짧게 요약한다면 ‘꿈을 이루려는 두 남녀 주인공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오프닝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에도 ‘이 영화는 꿈을 향해 다가가는 예술가들의 힘찬 여정을 담겠구나’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미아의 오디션 장면

그렇지만 영화는 관객이 예상한 대로 그런 환상적이고 나이브한 전개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들의 상실과 절망의 감정에 집중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던 뼈아픈 과정을 고전 뮤지컬 영화의 색채 속에 담으며 이전과는 색다른 뮤지컬 영화 장르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구축해낸 것이다.

영화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미아와 세바스찬의 테마 음악은 고전 뮤지컬 영화 속 음악처럼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연주됐다가, 잔잔하면서 구슬픈 단조의 멜로디로 끊임없이 변주된다. 이는 마치 고전 뮤지컬 영화를 본떠서 관객을 환상의 세계로 빠뜨렸다 다시 상실의 이야기로 관객을 홍수에 빠뜨리는 <라라랜드> 영화 자체를 대변하는 것 같다.

 

나의 이 마음을 들어주세요, <셰이프 오브 워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스틸컷

어두운 어른 동화 <판의 미로>(2006)로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기예르모 델 토로가 이번엔 고전 뮤지컬 영화의 힘을 빌려 조금은 더 다채로운 빛깔과 희망적인 목소리가 담긴 영화를 선보였다. <셰이프 오브 워터>(2017)는 냉혹한 전쟁 속에서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들이 서로의 ‘다름’을 보듬는 과정과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어른 동화다.

함께 고전 뮤지컬 영화를 보는 ‘일라이자’와 ‘자일스’

영화 속 주인공 일라이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제한됐지만, 자신의 세계가 뚜렷하고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그는 평소 친구 자일스와 고전 뮤지컬 영화를 TV로 보는 것이 취미이고 때때로 같이 영화 속 발동작을 따라 하며 탭 댄스를 주고받는다. 출근길에도 그는 가끔 혼자 복도에서 탭 댄스를 추며 밖으로 표출하지 못했던 자신의 예술적 세계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처럼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고전 뮤지컬 영화는 일라이자의 역동적인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단서이자 그가 감정을 분출하는 수단이며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한 통로이다.

괴수와 교감하는 일라이자

일라이자는 글렌 밀러와 베니 굿맨의 레코드를 가져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괴수’에게 다가간다. 다른 누구에게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의 예술적 세계를 처음으로 드러내며 정신적 교감을 이룬 그는 점차 그 생명체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한 폭씩 쌓여간 그의 감정은 어느새 분출을 앞둔 화산처럼 뜨겁게 들끓는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렇지만 목소리를 내지 못해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어 답답했던 그는 사랑의 감정을 절절하게 노래 부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때 일라이자가 상상 속에서 부르는 노래는 1943년에 나온 고전 뮤지컬 영화 <Hello, Frisco, Hello>에 삽입한 ‘You’ll Never Know’로, 그해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곡이기도 하다. 노래를 부르는 자신의 모습 말고도 일라이자는 괴수와 함께 스윙 댄스를 추는 모습을 상상한다. 흑백 프레임에 담긴 그의 상상 속 춤사위는 1930년대에 나온 <스윙 타임>에서 고전 뮤지컬의 영화계의 대표 아이콘인 프레드와 진저가 추는 춤과도 매우 닮았다.

일라이자의 상상 속 스윙 댄스

항상 보던 TV 속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주체하지 못하는 사랑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이 장면이야말로 고전 뮤지컬 영화의 본질을 포착해낸 순간이 아닐까? 고전 뮤지컬 영화의 근본은 그저 화려한 겉 포장이 아닌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려는 순수함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순수함의 언어를 빌려 주인공의 아름답고도 처연한 감정을 감각적으로 전달해 관객들이 자신의 이성을 넘어서는 사랑의 모습을 포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Writer

소소한 일상을 만드는 주위의 다양한 것들을 둘러보길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들엔 사람들의 일상을  단단하게 지켜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공연, 영화, 책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소개해, 사람들의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문화예술 큐레이터가 되길 꿈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