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는 누구 한 명 죽어야 끝이 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죽음은 영화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키워드이고, 그렇기에 가장 많이 소비되는 불행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많은 영화 안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삶을 반추한다. 하지만 때론 죽음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잔잔한 ‘생의 기록’으로 삶을 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누구도 해치지 않으려 애쓰는, 무해하기에 사랑스러운 중화권 영화들을 소개한다.

 

 

허안화 감독 <천수위의 낮과 밤>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정 여사는 고등학생 아들과 둘이서 살고 있다. 영화는 정 여사, 그리고 정 여사와 친해진 혼자 사는 이웃집 할머니의 소소한 일상을 통해 서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에 이렇다 할 특징적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장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고, 집안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먹는다. 하지만 이 일상이 쌓이고 쌓일수록 관객들은 이 두 사람의 삶에서 따뜻한 ‘인생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천수위의 낮과 밤> 오프닝 신

‘천수위’는 홍콩의 변두리 지역으로,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는 곳이다. 빈부격차와 가난함의 상징이 되어버린 ‘천수위’를 영화 속 배경으로 채택하면서,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미 여실히 드러난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감독은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관객들이 그저 ‘바라보도록’ 영화를 만들었다. 관객들은 그저 이 인물들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천수위의 낮과 밤>(2008)의 영문 제목이 ‘The way we are’인 것처럼, 흘러가는 그들의 시간과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순간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 <자객 섭은낭>

“인간이 인간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자객 섭은낭>(2015)의 기획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자객’이라는 말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지만, 영화는 이 자객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지를 사유한다. 자객 섭은낭은 함부로 인간을 죽이지 않는다. 그는 출중한 무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기로 결정’한다. 자신을 배반한 정인의 연인이 ‘자신’처럼 될까 봐 두려워하며 그 연인을 보호하고, 암살해야 하는 이가 아들과 노니는 모습에 마음을 뺏겨 그를 죽이지 못하고 돌아선다. 영화는 섭은낭의 갈등을 아주 느리고, 담담하고, 아름답게 연출한다.

<자객 섭은낭> 트레일러

제목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무협 영화를 생각했다면 단단히 실망할 수도 있다. <자객 섭은낭>은 화려한 검무 대신 고뇌하는 섭은낭의 얼굴을 보여주고, 피 튀기는 애정 전선 대신, 연민과 연대의 서사로 영화의 절반을 채운다. 섭은낭이 싸우는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니다. ‘자신’일 뿐이다.
이 영화에 화려한 액션 신은 없다. 그러나 그 자리를 채운 인간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삶에 대한 깊이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내내 어루만지고 위로한다.

 

 

지아장커 감독 <24City>

영화 제목인 ‘24 city’는 중국 사천성에 있는 한 아파트의 이름이다. 이 아파트는 중국 정부의 주도로 세워진 공장 ‘팩토리 420’을 재개발하여 만들어졌다. 감독은 이 공장에서 일했던 5명의 노동자들이 전하는 덤덤한 이야기를 통해 현대 중국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24city>(2008)는 이상한 영화다.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인 것처럼 그 포맷을 차용하여 만들어졌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 중 몇 명은 실제 노동자이지만, 몇 명은 감독이 섭외한 전문 배우들이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중국 사람들은 얼굴만 보면 딱 아는 명배우들도 등장한다. 다큐멘터리인 줄 알고 보던 사람들은, 배우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그 ‘이질적임’에 놀라게 된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서 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지아장커 감독은 이러한 ‘거리 두기’를 통해 스크린 속 노동자들의 ‘진짜’ 모습을 관객들이 고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4City> 트레일러

영화 <24 city>는 노동자들의 일상과 표정에 집중한다. 지워져 버렸던, 혹은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그들의 이야기가 천천히, 넓게 퍼지면서 그 시절 현대 중국의 시대상을 비춘다.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을 ‘그들의 시선과 입’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현대 인민들의 삶’이 아닌, 인민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삶을 관객들이 멀찍이 느낄 수 있도록 세밀하게 짜여 있다. 그렇기에 더욱 안전하고 무해하며, 아름답다.

 

죽음과 고통을 통해 생을 바라보는 것과, 생생한 삶으로 생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 따질 수는 없지만, 생의 감각으로 삶을 어루만지는 것은 이미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