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중고 음반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서 음반 재킷들을 구경하고 곡제목들을 보며 촌스럽게 느껴지는 옛 음반 디자인에 낄낄대면서도 그 시절을 회상하거나 상상해 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음반 발매일에 맞춰 음반 가게 앞에 줄을 서는 일도, 대단한 의식을 치르듯 새 음반의 비닐을 조심스럽게 벗겨 빳빳한 가사집을 펼치는 순간의 환희도, 신줏단지 모시듯 커다란 장식장에 음반들을 진열해 놓는 일도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먼지 쌓인 중고 음반들이 날 좀 봐달라며 여기저기서 손짓하는 것만 같은 중고 음반 가게에 들어서면 그 시절 사람들이 가졌던 그 열의들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만 같다. 오늘 소개할 책들은 마치 그 음반 가게를 통째로 책 속에 옮겨 놓은 것 같은 책들이다. 한 장의 음반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 같았던 그 황홀했던 순간을 세 권의 책을 통해 만나보자.

 

1. 전설의 시대를 완성한 전설의 디자인 그룹의 완전한 카탈로그

<바이닐.앨범.커버.아트>

오브리 파월 ❙ 김경진 옮김 ❙그책 ❙ 2017.12.15

 

살다 보면 내 선택이 예상치 못한 결과들을 가져올 때가 있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도 그럴 것이다. 음반 이야기가 궁금해 펼쳤다가 초현실적 이미지들의 향연에 정신 못 차리고 현실 저 너머 세계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이라는 이야기다. <바이닐.앨범.커버.아트>라는 조금은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제목에 ‘음, 그래서 뭐?’ 하고 이 책을 무시해버린다면 그 환상적인 여행의 기회를 놓치겠지만. 일단 책의 표지를 보자.

“앞면 커버에는 두 비즈니스맨이 악수를 하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은 문자 그대로 거래 중 불타고 있다. 이 사진을 위해 나는 로스앤젤레스의 여러 스턴트맨과 면담을 한 후 경험 많은 구원투수 로니 론델로 결정했다. 안전상의 이유로 그는 버뱅크에 있는 워너스튜디오의 촬영지를 골랐다. 꽤나 위험한 스턴트였다. 그에게 십여 차례 불이 붙었는데 어느 순간 돌풍이 그의 얼굴 주위로 갑자기 불어 몸이 심하게 그슬렸다. 결국 그는 작업을 완수했고 난 사진을 건졌다.”

- <바이닐.앨범.커버.아트> 본문 중 발췌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세월이 야속하다. 2018년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진들은 간단한 포토샵 기술로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딱히 파격적이지 않은 사진 정도로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진은 1975년 발매된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커버이고 포토샵이 없던 그 시절 그들의 작업들은 대개 이렇듯 무모하고 과감하게 맨몸으로 부딪히며 일궈낸 성과였다. 그리고 이들의 결과물은 앨범 커버가 갖고 있던 정보 전달의 기능을 완전히 뒤집으며 전혀 다른 차원의 앨범 커버 시대를 여는 것으로 이어진다.

핑크 플로이드 <Wish You Were Here>(1975) 앨범 커버


<Wish You Were Here>의 수록곡 ‘Have A Cigar’


비일상적인 순간들을 이미지화하고 때로는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때로는 음악과는 전혀 별개의 에너지로 수많은 명반에 기가 막힌 옷을 입힌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아있는 디자인 그룹 ‘힙노시스’다. 1970년대의 음반 시장은 (알다시피) 지금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시장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고 유행하던 장르나 소비 방식, 그에 따른 음반의 생산 양식도 지금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는데 그중 한 줄기를 이루고 있던 것이 바로 ‘커버 아트’이며 그 중심에 힙노시스가 있었다. 음악가들과 직접 아이디어 회의를 하며 단순히 사업 파트너가 아닌 친구이자 창작 동지로 협업했다. 그들과 작업한 음악가들은 그들을 스페어 타이어라고 여길 정도로 중요하고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렇기에 서로의 세계를 존중했고 이는 서로의 영역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주는 상호작용을 했다. 음악가들이 농담처럼 툭툭 던진 대책 없는 아이디어를 힙노시스는 실현 가능한 방법들을 찾아내 현실화하며 한 장의 위대한 예술 작품에 방점을 찍었다. 그런가 하면 힙노시스라는 이름을 선사한 것은 음악가였다.

“시드 바레트가 아파트의 깨끗한 하얀 문에 볼펜으로 힙노시스라는 단어를 써서 모두를 화나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린 좀 다르게 생각했다. 우리가 스스로 꾸려나갈 회사의 이름으로 택한 단어는 바로 미치광이 천재의 발명품이었던 것이다.”

- <바이닐.앨범.커버.아트> 서문 중 발췌


그거다. 예술성에 몰두하고 창작력이 샘솟던 그때의 그들은 의미 없는 것들의 멋스러움을 아무 데나 전시할 줄 알았으며 그것을 알아보는 눈이 서로에게 존재했다. 이런 특별한 예술적 유대는 음반을 종합적인 예술로 승화시켰던 화려하고 폭발적인 15년을 만들어냈다. 이 책 속에 바로 그 15년의 과정이 매혹적인 이미지들과 함께 담겨있다.

스스로 음악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이 책의 문턱이 꽤나 높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악에 특별한 흥미가 없더라도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음악 그 자체의 멋, 앨범 커버로서의 매력,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뒤집는 용기에 대한 감탄, 욕망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집념에 대한 경의 등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은 곧 당신의 방 안에 차곡히 쌓아놓은 수십장의 음반이며 명화이며 상상력과 창조력의 보고이다.

핑크 플로이드 <Atom Heart Mother>(1970) 앨범 커버. 밴드 이름이나 제목도 없이 초원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젖소 사진뿐인 이 커버는 분명히 상업성에 반하는 커버였지만 향후 수십 년간 급진적인 커버 제작의 기준이 됐다

“왜 젖소였냐고요? 대답은 물론 이랬죠. : 젖소면 왜 안 되지? 그리고 특히 저런 앨범 제목을 가진 젖소가 왜 안 돼? 그 다음에는: 왜 저런 앨범 제목이지?

그리고 또: 왜 안 되는데? 그건 음악 산업 내부에서 벌어진 멋진 현상이었어요.

그 안에서는 어떤 것도 꼭 의미를 지녀야 할 필요가 없었는데 올바른 상황에서라면 ‘왜?’에 대한 모범 답안은 항상 ‘왜 안 돼?’입니다.”

- <바이닐.앨범.커버.아트> 본문 중 발췌

 

2.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대중가요의 매력

<대중가요 LP가이드북>

최규성❙안나푸르나 ❙ 2014.02.18

 

덕질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있다. 이 책은 일종의 그 증거가 될 수 있겠다. 음악 서점을 운영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가 국내 음악에 대한 기록이 정말 미미하다는 것이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조금만 이름이 알려져도 관련 도서들이 (약간 과장하자면) 쏟아져나오는 것에 반해 국내 음악가에 대한 책은 음악가가 죽거나 대선배 취급을 받을 때 즈음에야 나올까 말까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궁금증을 불확실한 정보가 섞인 인터넷 서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튼 이런 척박한 현실 속에서 발간된 이 책은 그래서 소중하다. 또한 저자가 가진 ‘덕력’은 어떤 면에서 세상에 큰 빛이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LP를 모으기 시작한 이로운 수집력의 소유자인 저자 최규성은 음반 가게에서, 쓰레기 더미에서, 해외여행 중 장터에서 그 가치를 모르고 버려지던 온갖 음반들을 수집해왔고 절판된 LP를 찾아 어디든 가는 그 집념 덕에 절판 소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이니 집요한 그의 덕력 지수는 말해 뭐해.

2014년 책 발간 당시 그가 보유한 음반은 2만 여장에 달했고 그 안에는 상당수의 희귀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은 그 중 일제시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적으로 중요한 키워드가 된 음반 191장을 선별해 소개한다. 음반 커버의 앞 뒷면과 알판에 새겨진 음악가들의 젊은 시절 사진과 함께 한국 음반 디자인, 폰트 디자인이나 표기법들의 변화를 둘러볼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첫 번째 재미다. 또한 음반의 초반, 재발매반 등의 차이점까지 세세히 비교해준다는 점, 슈퍼스타들의 전혀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초창기 시절 희귀반을 소개해 준다는 점,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가요 상식의 진실을 제대로 알려준다는 점 등 페이지를 넘길수록 다양한 즐거움을 계속 발견함과 동시에 이 책이 단순히 좋은 음악을 소개하는 가이드북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섯 개의 버전으로 발매된 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
금지곡 지정으로 인해 곡을 교체하거나 제목을 수정하거나 심지어는 작사 작곡자를 거짓으로 표기해야 했던 이 음반의 역사와 함께 음반 번호와 재킷 형태에 따라 몇 번째 버전인지를 구분할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해두었다

김현식 <사나이 노래>(1984)
‘사나이 노래’ 한 곡을 여러 버전으로 편곡해 수록했다. 그의 유일한 싱글 앨범이며 대중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희귀반이다

신중현 기타 솔로 앨범 <히키신 기타 멜로디>(1964, 65로 추정)
신중현의 첫 기타 연주를 담은 희귀반. 미8군에서 활동하던 신중현의 애칭 ‘히키신'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의 나이 19세에 녹음했으며 5~6년 뒤 발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음반의 오리지널 초반은 700-800만 원을 호가하기 때문에 실제 음반을 찾아 듣기는 쉽지 않지만 다행히 유튜브를 통해 만날 수 있다. 당시 미8군에서 실력을 뽐냈던 트위스트 레퍼토리와 동요, 가곡을 재즈와 접목시켜 대부 탄생의 신호탄을 쏘았다

‘LP’라는 소위 수집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단어가 제목에 붙어있으니 마니아들을 위한 책이라고 여겨질 위험도 있지만 책 속의 음반들을 실물로 구입할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비해 부담스럽지 않은 무게와 레코드판의 결을 재현해놓은 표지까지 세심한 디자인 감각 역시 많은 이들에게 만족을 주는 책이다.

 

3. 친절한 해설지로 만나는 재즈 명반

<당신의 첫 번째 재즈 음반 12장 (악기와 편성)> / <당신의 두 번째 재즈 음반 12장 (보컬)>

황덕호❙포노 ❙ 2012.11.26 / 황덕호❙포노 ❙ 2014.10.06

 

어느 화창한 날, 당신은 화창한 기분을 배가시켜줄 재즈 음반 하나를 사기 위해 음반 가게에 들어갔다. 그런데 세상에. 도대체 재즈 음반은 왜 이리도 많은 것인가. 한참 가판대에서 이 음반 저 음반을 만지작거리다가 발길을 돌리려는 차, 가게 주인이 다가와 ‘이 음반은 말이죠, 1939년 뉴올리언스에서...’로 시작해 열두 장의 음반을 차례로 들어 보이며 ‘이건 어떻고 저떻고…. 이러 저러해서…. 그러니까 이 음반은 아마 좋아하실 겁니다.’로 끝나는 장황한 설명을 듣고 나니 세상에. 가게 밖으로 나갈 때는 음악 박사라도 된 기분이 드는 게 아니겠는가? 들어올 땐 ‘재.알.못’(재즈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나갈 땐 세상의 재즈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물론, 아마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음반 가게가 많지 않은 시대라면 더더욱. 그러나 이 책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소개한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올컬러가 아니다. 사진도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음반을 수집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카테고리에 굳이 포함시킨 이유는 음반을 샀을 때 펼쳐보던 라이너 노트(음반 속 해설지)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포장지를 벗기고 케이스를 열어 펼쳐보는 과정까지 그대로 느낄 수는 없지만 너무나 충실하게 만들어진 라이너 노트를 통째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음반 수집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책에 수록되어 있는 레이 찰스와 빌리 홀리데이 음반 해설지. 물론, 책 본문에는 한글 번역본으로 문자화되어 있다

음반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커버의 매력만큼이나 음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해설지도 청자를 매료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나 지대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알기 어려운 먼 나라, 먼 시절의 음악들은 해설이 많이 달리면 달릴수록 즐겁다. 새로운 음악을 들으며 음악이 더욱 풍성하게 들리도록 도와주며 상세히 소개되는 음악가의 인생과 사연들을 만날 수도 있다. 외부 매체가 아닌 음반 자체에 실려있는 글이니 다른 글들에 비해 공신력이 보장된 정보들일 거라는 믿음도 선다. 음반을 사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해설지도 갖가지다. 음반 수록곡을 한 곡 한 곡 분석하기도 하고, 이 음반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음악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어떤 형태로든 거기에는 음악에서 파생된 이야기가 있으며 이야기에서 파생된 음악이 있다.

<당신의 두 번째 재즈 음반 12장>에 소개된 음반 <Louis Armstrong plays W.C. Handy> 수록곡 ‘Aunt Hagar's Blues’

1920년에 작곡된 이 곡은 세속적인 종교음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작품이다.

핸디는 이 곡의 첫 1절을 절반은 노래이고 절반은 말로 되어 있는 세탁하는 여인네의 읊조림에서 따왔다. 2절로 들어가기 전 그 여인네의 가사는 이랬다.

“당신은 저기 걸려있는 외로운 윗도리, 늘 입던 나의 옛것은 지금 어디 갔는고.”

닐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핸디는 시카고에 있던 브라운리의 이발소에서 곧바로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곡 전체를 현재의 편곡 형태 그대로 구상하고 작곡했다.”

- <당신의 두 번째 재즈 음반 12장> 본문 중 발췌


재즈를 좀 더 풍성하게 듣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열두 장의 음반을 뽑아 그들의 음반 정보를 충실히 옮겨놓은 저자는 나긋나긋한 말투와 섬세한 묘사로 음악적인 설명들을 보탠다. 차근차근 책을 읽어가며 음악을 듣다 보면 좋긴 좋지만 잘은 모르겠던 재즈 음반들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이 책은 악기와 편성 위주의 첫 번째 책과 보컬 위주의 두 번째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본인의 취향에 따라 어떤 책을 먼저 읽어도 큰 상관은 없다.

 

한 장의 음반이란 결국 하나의 총체적인 세계이다. 특히나 음반 산업이 발달하고 한 두 곡이 아니라 음반 전체로 음악을 이야기하던 시절에는 더더욱 그랬다. 생각해보면 그리 먼 옛날도 아닌데 세상은 참 빨리도 변했다.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과거의 아름다운 것들을 간직하면서 산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이 책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음반 단위로 음악을 만나고 마음에 닿는 음악들을 체화하면서 그 멋진 일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ㅣ필자소개ㅣ
장마담(madame jang)
오래된 정경들이 넘치는 동네에서 작은 음악 서점인 ‘초원서점’을 운영한다. 방송작가, 스크립터, 콘텐츠 기획 등을 거쳐 공연 카페에 오래 머물렀다. 2016년 5월 연 초원서점에서 음악과 닿아 있는 다양한 장르의 서적들을 판매하고 음악과 음악 서적 관련 행사들을 기획, 진행하며 ‘음악으로 말을 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가사가 아름다운 한국 음악들을 특히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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