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출신의 영화감독 베넷 밀러는 ‘뉴욕 시티 버스 가이드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뉴욕 크루즈>(1998)를 연출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가이드 ‘레비치’라는 인물을 따라가며 화려한 도시의 왜곡된 환상을 되짚는 <뉴욕 크루즈>는, 1999년 볼프강 스타우트 상을 받고 뉴욕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이후 고교 동창이었던 시나리오 작가 댄 퓨터먼, 배우 故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과 협업하여 <카포티>(2005)를 연출했으며 <머니볼>(2011), <폭스캐처>(2014)에 이르기까지 총 세 편의 장편을 연출했다. (셋은 뉴욕 예술학교를 함께 다녔다)

베넷 밀러 감독의 영화 포스터

세 편의 영화를 통해 보여지는 그의 영화 세계에 두드러진 특징들이 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주로 ‘고뇌하는 인간’이며, 그 불안의 경계에서 드러나는 민낯을 카메라는 묵묵한 태도로 관조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은 카메라의 존재를 인식하기보다 치열한 감상의 폭으로 깊이 이끌린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

그의 첫 연출작이 다큐멘터리였다는 사실과 이후 세 편의 장편에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일련의 행보는 독특하다. 게다가 <카포티>의 주인공인 유명 소설 작가 카포티는 신문에 난 캔자스 살인사건에 영감을 받아 그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인물이다. 베넷 밀러가 영화의 모티브로 삼았던 인물 ‘카포티’. 그는 ‘캔자스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모티브로 한 소설 <냉혈한>을 집필한다. 베넷 밀러가 실존 인물 카포티의 생애에 매혹된 이유도 어쩌면 모종의 동질감으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닐까.

베넷 밀러(Bennett Miller) 감독

실존 인물이나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사례는 많을 테지만, 논픽션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영화만 찍는 감독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미 벌어진 사건들, 그것은 다시 역사다. 역사가가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해야만 하는 사명에 끝내 도달하지 못하듯, 이미 벌어진 사건들을 다시 그대로 펼쳐놓지 않는 이상 재구성과 해석이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모조품에 불과하다. 그런 불변의 진리 앞에 영화 속 베넷 밀러의 모호한 시선은 빛을 발한다. 어떤 개입도 없이, 판단은 오로지 당신들의 몫으로.

 

적막을 파고드는 소리들

설명을 포기한 채 지속되는 그의 영화에 긴장을 더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레슬링을 다룬 <폭스캐처>에서 두 형제 레슬러의 연습 장면엔 적막이 감돈다. 그 적막을 채우는 바쁜 소리의 정체는 몸과 몸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둔탁한 마찰음. 거친 숨소리 외엔 어떤 대사도 없이 진행되는 이 장면 속에서, 이따금 스치는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의 사소한 표정과 몸짓은 극의 긴장을 더욱 끌어 올린다. 이 영화의 중심축에 놓인 열등의식과 자기 혐오, 분노가 얼핏 비치는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카포티>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면, ‘트루먼 카포티’(필립 세이모어 호프먼)가 캔자스 살인사건 신문 기사를 천천히 오릴 때, 가위 소리는 침묵을 잘라내며 무언가를 예고하듯 묵직한 음가로 들려온다. 다시 보면 의미심장한 가위질이다.

<폭스캐처> 연습 장면

베넷 밀러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에 서 있는 세 작품을 그만의 인장으로 밀도 있게 재구성했다. 데뷔작 이후 발표한 세 영화는 평단과 수많은 시네필을 자극하며 아카데미 시상식에 수차례 노미네이트 되었고 2014년에는 <폭스캐처>로 67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그의 수상 소식에 기쁜 점도 사실이지만 수상 여부를 떠나 그가 앞으로 내놓을 작품에 거는 기대가 더욱 커졌다. <카포티>, <머니볼>, <폭스캐처> 이 세 작품만 관람하더라도 베넷 밀러의 필모그래피를 거진 섭렵할 수 있다는 실없는 장점을 어필하며, 영화의 짧은 소개와 함께 글을 마친다.

 

<카포티>(2005)

<카포티> 스틸컷

2014년 유명을 달리한 명배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연기가 예외 없이 빛나는 작품이다. 그는 관습적 의미로서의 여성적 톤과 제스처를 구사하는 천재 작가 ‘트루먼 카포티’를 연기했다. 카포티는 사교계의 재담꾼이자 다소 허영에 찬 유명 작가다. 차기 소설의 소재로 삼은 캔자스 살인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카포티는 자신의 명망과 권위를 이용하기도 하고, 치부를 꺼내 보이며 협상의 열쇠로 쓰기도 한다. 사건을 둘러싼 한 인간의 이중적 심리를 좇는 담담한 시선이 흥미로운 영화다.

<카포티> 트레일러

 

 

<머니볼>(2011)

<머니볼> 스틸컷

메이저리그 만년 최하위에 머무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구단주 ‘빌리 빈’(브래드 피트)의 파격적이고도 실험적인 도전으로 게임의 판도를 뒤바꿨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빌리는 경제학을 전공한 ‘피터’(조나 힐)를 영입해, 각 선수의 수치화 된 데이터를 토대로 선수를 트레이드하며 팀을 구성해 간다. 승패에 크게 좌우되는 구단 내부의 복잡한 사정과 갈등을 가감 없이 담아낸 <머니볼>은 베넷 밀러의 작품 중에서도 비교적 장르적인 진행으로 대중과 평단의 관심을 동시에 받았다. <소셜 네트워크>와 미드 <뉴스룸> 시리즈로 화제를 모은 각본가 애런 소킨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머니볼> 예고편

 

 

<폭스캐처>(2014)

<폭스캐처> 스틸컷

냉전 시대의 종료 시점, 미국의 레슬링 선수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는 금메달리스트이자 국민적 영웅인 형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의 후광에 가려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마크에게 대부호 가문의 상속인 ‘존 E. 듀폰’(스티브 카렐)이 전속 후원을 제안하며 레슬링팀 ‘폭스캐처’에 합류시킨다. 마크와 존 듀폰의 열등감과 자기 혐오는 개별적으로 뻗어 나가며 같은 듯 다른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인 ‘존 듀폰’은 스티브 카렐의 절제된 동시에 천천히 팽창하는 광적인 연기로 완성됐다. 인정 욕구가 번번이 좌절된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작은 단서들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정적이면서 한없이 동적이기도 한 영화, 베넷 밀러의 근작 <폭스캐처>다.

<폭스캐처> 예고편

 

메인 이미지Brigitte Lacombe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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