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질적인 영화가 있다. 낯선 카메라의 작동방식, 전에 보지 못한 이상한 구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아름다워서 급기야 질투심이 생기고 마는 이미지들. 서사는 좀처럼 잡히지 않고 그보다는 다른 것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때 우리는 황홀하게 무력해진다. 그게 아니면 나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이 영화를 탐하고 싶어진다. 이 황홀한 무력감은 어떤 질문을 남긴다. 그 질문이란, 도대체 이런 영화들 앞에 ‘내용’이 무슨 소용인가 싶은 것이다.

<로렌스 애니웨이> 스틸컷


더 나아가 과연 ‘해석’이란 것은 늘 유용하기만 한가. 비평이 주는 유용성과 확장성을 대단히 인정하면서도, 이런 영화들을 만나면 끝내 해석이 도달하기 어려운 영화의 힘에 대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적잖은 시네필들이 이처럼 행운과도 같은 충격에 중독되어 있다. 행운이라는 말은 ‘발견’이며, 그건 다시 말해 ‘뜻하지 않은 발견’이다. 어떤 수사도 충분치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안겨진 뜻밖의 충만은 어쩌면 시효를 알 수 없는 무한정의 쾌락과 다르지 않다.

<이다> 스틸컷


누군가는 스타일이 뛰어난 영화를 두고 형식주의자가 품은 장식화의 욕망이라 말하기도 했다. 많은 영화들이 이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용이 아닌 형식을 가지고 더 전방위적으로 말하는 영화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들을 위한 변호를 하고 싶다. 예술평론가 손택은 말했다. “스타일은 예술 작품 안의 결정 원칙이요, 예술가가 자필로 서명한 의지다.”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그는 장 콕토의 “장식적인 스타일이라는 것은 없다. 스타일이 곧 영혼일진대,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영혼을 ‘형식’이라는 몸뚱이쯤으로 추정하는 것이다”라는 지적을 가져와, 우리의 겉모양새가 사실상 우리의 존재 방식이며 가면이 곧 얼굴이라고까지 단언한다. 언제나 ‘내용’이 내부의 문제이고 ‘스타일’이 외부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 은유를 뒤집어 놓았을 때, 우리는 예술적 텍스트로부터 훨씬 강력한 체험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각각의 개성으로 ‘특별하게’ 말하는, 여러 나라의 탐미적인 영화 다섯 작품에 대한 소개를 끝으로 글을 마친다.

 

짐 셔먼 <록키 호러 픽쳐 쇼>(1975) / 영국, 미국


<록키 호러 픽쳐 쇼> 스틸컷


‘브래드’(베리 보스트윅)와 약혼녀 ‘자넷’(수잔 서랜든)이 둘을 맺어준 스콧 박사를 찾아가던 중 폭우가 이들을 덮친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외딴 성의 문을 두드리고 괴상한 비주얼의 양성과학자 ‘프랭크 N 피터 박사’(팀 커리)를 맞닥뜨린다. 둘은 성으로 진입하면서 충격적 파티에 동승하게 된다. 이미 어마어마한 팬을 거느리고 있을 만큼 컬트 영화의 대명사가 된 <록키 호러 픽쳐 쇼>. 독특함을 넘어 기괴함이 느껴지는 환상적인 난장의 이미지가 관객을 흥분시킨다. 무분별한 플롯과 신(scene)들의 뒤섞임이 탁월한 조화로 기능하고야 마는, 금기와 섹슈얼리티를 향한 경계 없는 묘사가 압도적인 문제작이다.

<록키 호러 픽쳐 쇼> 트레일러

 

 

스즈키 세이준 <살인의 낙인>(1967) / 일본

<살인의 낙인> 스틸컷


기본적으로 누아르 구조를 취한 장르 영화이면서 전반에 B급 정서가 만연한 작품이다. 야쿠자 세계의 삼인자 킬러 ‘하나다’(시시도 조)는 새 암살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넘버 원을 꿈꾼다. 그러던 중 미모의 여인 ‘미사코’(마리 안느)를 만나게 되고 임무 수행에 차질이 생긴다. 주인공이 쌀밥 냄새에 성욕을 느낀다는 설정,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기막힌 전개와 어이없이 터지는 유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공간의 창의적 활용 등,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괴이한 영화나 그 점이 결코 흠이 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미학 구도를 가감 없이 쏟아부은 <살인의 낙인>은 그만큼 많은 장면을 머릿속에 신선한 충격으로 새겨 넣는다.

<살인의 낙인> 트레일러

 

 

파벨 포리코브스키 <이다>(2013) / 폴란드

<이다> 스틸컷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소녀 ‘안나’(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는 수녀가 되기 직전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아가타 쿠레샤)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녀가 알려준 안나의 본명은 ‘이다’. 이다는 개인과 가족에 관해 몰랐던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 흑백 화면에 고결하게 수 놓인 <이다>의 이미지에서 가장 매혹스러운 지점은 프레임 속 피사체의 배치에 있다. 흔히 영화에는 쉽사리 깰 수 없는 불문율의 작법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대화를 이루는 두 인물의 쇼트와 리버스 쇼트의 시선이 향하는 지점에 공백을 두어야 하는 것. <이다>는 카메라의 주류적 관습을 과감히 벗어나 파격을 선택한다. 카메라의 용법을 두고 감독과 촬영감독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하나, <이다>는 외국어 영화로는 흔치 않게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다> 트레일러

 

 

자비에 돌란 <로렌스 애니웨이>(2012) / 프랑스

<로렌스 애니웨이> 스틸컷


소설 작가이자 문학 강사인 청년 ‘로렌스’(멜빌 푸포)와 ‘프레드’(쉬잔느 클레몽)는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 사이다. 어느 날 로렌스는 프레드에게 남은 일생을 여자로 살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고 온전히 자신이 되려는 시도를 한다. 이는 로렌스의 인생에 크나큰 결정인 만큼 마찬가지로 연인 프레드에게도 중대한 숙제다. 두 사람이 사랑을 지켜내려는 분투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위태로움의 연속이다.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로 천재라는 찬사를 받았던 돌란의 세 번째 영화다. 혹자는 그의 영화를 자의식의 과잉이라 평하지만 <로렌스 애니웨이>는 그 과잉의 에너지가 빛을 발하는 수작이다. 실제로 동성애자이기도 한 돌란 감독은 언제나 자전적인 이야기를 수려한 감각으로 재창조하는 시네아스트다.

<로렌스 애니웨이> 트레일러

 

 

박찬욱 <스토커>(2013) / 대한민국

<스토커> 스틸컷


신비로운 분위기의 소녀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는 18번째 생일에 사고로 아빠를 잃는다. 그녀 앞에 존재도 몰랐던 삼촌 ‘찰리’(매튜 굿)가 찾아오고,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그를 경계하면서도 점차 이끌린다. 박찬욱 감독의 명실상부한 대표작들이 줄지어 있지만 <스토커>만큼 리드미컬한 운율을 확인할 수 있는 편집은 보지 못했다. 분명 음악영화가 아닌데도 이 영화를 음악영화라 칭하고 싶어질 정도이니 말이다. 박찬욱의 뛰어난 음악적, 회화적 재능은 예민한 시∙청각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촉각 내지는 육감마저 곤두서게 하는 매혹의 성감이다.

<스토커> 트레일러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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