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런 가게를 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 가장 곤란한 질문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크건 작건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세계를 완성하고 싶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인 성공으로 어떤 사람은 부의 축적으로 또 어떤 사람은 명예로.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바로 이룰 수는 없다. 나 역시 그랬다. ‘배가 고프니 삼각김밥을 사 먹어야지’ 하고 편의점으로 달려가듯 즉각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초원서점은 시간의 축적과 인생의 경로가 맞닿은 지점에서 만든 작은 공간이다. 그 길고 긴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수도 없기에 나는 이 질문이 무척 곤란하다.  

“잘 쉬다 갑니다.” - 가장 행복한 인사 

서점에 앉아 종일 사람들을 만난다. 이것은 친구를 만나거나 업무상의 미팅과는 완전히 다른 만남이다. 서점은 내 세계이며 사람들은 내 세계 안에 손님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나는 잠깐의 시간만이라도 손님들이 이 세계에서 쉼을 얻고, 놓치고 있던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거나 사유의 틈을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잘 쉬다 간다는 말을 던지고 가는 손님들의 뒷모습에 기쁨과 감사의 눈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가게가 꼭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갖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둘러보면 우리 주위에는 공간을 자신의 세계로 여기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의 삶이 너무 바쁘고 반복적이어서 ‘내가 지금 뭐 하고 사는 거지?’라는 허무와 의문에 싸여 있다면 타인의 가게로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그곳에서 오롯이 가게와 자신을 마주해 보기를 권한다. 오늘은 그런 가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 번역 정영목 | 뿌리와이파리 | 2008.05.15

 파리라는 도시가 주는 낭만적인 이미지는 더이상 새로운 흥미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 도시의 이름 없는 골목길에서 ‘피아노 공방’이라는 생소한 가게를 발견한다면? 게다가 쇼윈도를 기웃거려도 “어서오세요.” 인사하는 사람 없이 붉은 펠트가 깔린 진열장 선반에 피아노 수리에 쓰이는 도구들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습이 무언가 도도한 냄새를 한껏 품고 있다면?

파리에 사는 미국인 사드 카하트(Thad Carhart)는 오가며 늘 마주치는 이 피아노 공방에 관심이 생기고, 호기심으로 들어간 그곳에서 하나의 세계를 만난다. 이 책을 통해 피아노의 역사와 원리, 종류 같은 피아노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지만, 더 큰 가치는 ‘우리가 잊고 있던 어떤 것을 대하는 자세'다. 그곳은 단순한 공방이 아니다. 피아노가 피아노로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들며, 피아노에 어울리는 진짜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 애쓰는 곳이다. 피아노, 그리고 피아노를 완성하는 사람들의 존엄을 지키는 성스러운 세계이다. 존엄! 우리가 얼마나 잊고 있던 단어인가. 이 책은 수필이지만, 소설이자 여행기, 일종의 처세술 혹은 철학서로까지 여겨져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가게가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가게에는 주인의 영혼이 담겨있기도 하고 어떤 가게는 얄팍한 상술로만 가득 차 있기도 하다. 어느 가게에 들어갔을 때 음식이 맛있거나 내가 원하는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하는 일보다 더 감동을 받는 경우라면, 주인이 매우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티비에 나오는 스타도 아니며 그들이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 사람들은 관심이 없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공간을, 그곳을 찾은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대한다.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며 즉각적으로 보이는 결과를 내진 않을지 몰라도 세상의 격조를 높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 수 있다.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같은 곳이 우리 주변에 많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저자는 어느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이 곡을 듣고 숨을 죽인다. 책에서는 연주회장에서도 듣기 어려운 이 곡의 탄생 일화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 모차르트 환상곡

저자는 이 곡을 연습하면서 까다로우면서도 심오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

닉 혼비 | 번역 오득주 | 문학사상 | 2014.12.05

한때 도시마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던 음반가게가 있었다는 전설은 이제 굳이 언급할 것도 없다. 헌데 사람들은 더 이상 음반가게에서 음반을 사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음반가게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비록 현실에서의 음반 시장은 초라해졌지만,) 나는 그 환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가슴에 그런 환상이나마 자리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자,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어느 나른한 퇴근길, 어떤 음악이 듣고 싶은 지도 모른 채 음반가게에 들렀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으나 벽과 바닥과 통로 사이사이 빼곡히 꽂힌 음반들의 위엄에 주눅이 들어 무엇도 못 고르고 있을 때, "찾으시는 음악이 있나요?"라는 주인의 상냥한 한마디를 듣는다. "그냥 오늘 밤 듣고 싶은 음악을 찾고 있어요"라는 막연한 대답을 던졌을 뿐인데 주인은 "아 그렇다면 이 음반이 어떠실지..." 하며 마치 수능 해설지를 펼치듯 음반 하나를 내놓는다. 당신은 음반에 어떠한 흠을 발견할 수도 없이 아주 만족하며 매일 밤 그 음반으로 충만해진다. 이것은 충분히 환상적이며 음반가게가 융성하던 시절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일이다. 단, 당신이 찾은 그 음반가게가 <하이 피델리티>의 주인공 롭이 운영하는 ‘챔피언쉽 바이닐’만 아니라면.

롭은 30대 중반의 남자고, 앞에 소개한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속 인물들과는 판이하다. 멋들어지게 고객 맞춤형 추천 음반을 내놓기는커녕 자신과 취향이 다른 손님을 무시하고 손님이 주문한 테이프를 몰래 들어보다가 들켜서 개망신을 당하기도 하는 그는 직업정신이나 장인정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음반가게 안 롭의 모습이 그의 인생에서 그나마 가장 나은 모습이다. 가게 밖의 그는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를 만난 여자친구를 찾아가 그 남자와 잤느냐고 집요하게 물어보고, 어린 시절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자기와는 잠자리를 갖지 않았는데 다른 남자와는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찌질한 남자다. 공간은 주인을 닮은 것으로 찬다고 했던가. 이런 찌질함의 대명사가 운영하는 음반가게에는 사장 못지않은 찌질한 두 명의 직원 딕과 베리가 있고, 이 세 명의 찌질이들이 만드는 챔피언쉽 바이닐의 정서는 당연히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로 차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간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음반가게는 거칠고 심드렁하고 심지어 거만하지만 그들에게 음악은 좋아하는 것을 넘은 일상 그 자체다. 혼잣말을 하거나 자기 상황을 돌아볼 때도 늘 음악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책의 주된 내용은 겉은 30대 속은 10대인 남자의 연애담처럼 보이지만 그의 일상에는 음악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그가 한 여자에게 뿌리내리는 데에도 음악이 큰 역할을 한다. 자연스럽게 수많은 음악이 소설 속에 등장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음악 소설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다. (책에서 언급한 뮤지션들의 목록만 여섯 페이지에 달하며 책 맨 뒤에 이 목록들이 정리되어 있으니 한 곡 한 곡 찾아 들으며 읽기를 권한다.)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됐으며 국내에서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2000)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마지막 장면 [바로보기] 

 

▲ Stevie Wonder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챔피온쉽 바이닐을 찾은 중년 남자가 이 노래를 찾자 가게 직원 베리는 "우리 가게가 그런 감상적이고 끈적거리는 쓰레기나 파는 가게인 줄 아느냐"며 돌아가라고 한다. 주인공 롭과 로라의 주요한 사랑의 역사를 함께 한 곡인 Solomon Burke의 ‘Got To Get You Off My Mind’도 들어보자.

사람들의 세계가 오고 가는 잘 만들어진 가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이처럼 많은 이야기들과 음악들로 가득하다. 당신이 우연히 들어간 어떤 가게에서 때로는 작은 기쁨을, 때로는 커다란 변화의 움직임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설레지 않는지. 자, 눈을 돌려보자. 우리 주위에는 많은 가게가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일상에서 언제든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Writer

오래된 정경들이 넘치는 동네에서 작은 음악 서점인 ‘초원서점’을 운영한다. 방송작가, 스크립터, 콘텐츠 기획 등을 거쳐 공연 카페에 오래 머물렀다. 올해 5월 연 초원서점에서 음악과 닿아 있는 서적들을 판매하며 책, 음악과 관련한 행사들을 기획, 진행한다. 가사가 아름다운 한국 음악들을 특히 좋아한다.

초원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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