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 자우림(紫雨林)은 그 이름처럼 존재해왔다. 특정한 무언가로 규정하기 어려운 결과물로써 음악의 여러 층위를 오갔으며, 장르에 포섭되기보다는 언제나 ‘자우림다운’ 태도를 유지하며 세상과 마주했다. 빛과 어둠, 환희와 절망, 행과 불행, 유머와 진지함 같은 양극단을 오가는 주제로 노래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뮤지션이 되길 자처했다. 1997년 데뷔 후 현재까지, 20년이란 세월 동안 언제 어디서나 팬들과 함께했다. 얼마 전 발표한 이들의 정규 10집을 기념하며, 지난 시간의 자우림을 스무 가지 장면으로 다시 되짚어보자.

 

1. 자우림의 전신, 풀카운트, CCR 그리고 미운오리 

1995년 CCR(초코크림롤스)로 활동하던 이선규(기타)와 김진만(베이스)이 1년 후 김윤아(보컬)를 영입해 '미운오리'라는 밴드를 결성한 후, 김윤아와 함께 ‘풀카운트’로 활동했던 구태훈(드럼)까지 불러들이며 밴드를 완성했다. 데뷔 전 이들은 다른 무수한 인디밴드들과 마찬가지로 클럽의 평일 무대에 오르는 ‘목요일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과거 자우림을 소개했던 기사에 ‘언더그라운드’라는 표현이 등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2. 팀 이름에 얽힌 일화들

자우림 1집 <Purple Heart> 앨범 재킷
자우림 2집 <戀人> 앨범 재킷

앨범 한 장 없이 홍대 클럽에서 공연하던 미운오리는 우연한 기회에 <꽃을 든 남자> OST 제작 의뢰를 받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자우림의 데뷔곡 ‘Hey Hey Hey’다. 당시만 해도 미운오리였던 이들은 ‘이름이 다소 촌스러우니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제작사 측의 요구에 ‘자우림’으로 밴드명을 바꾸게 된다. 영문명은 ‘Jawoorim’으로 썼는데, 이후 ‘Jaurim’으로 다시 바꾸었다.

 

3. 영화 같은 데뷔의 순간

자우림 ‘Hey Hey Hey’

1997년 ‘Hey Hey Hey’로 음악 방송 1위 후보에 올랐을 때의 모습. 대한민국에서 록 밴드가, 메인스트림 영역의 팀들로 넘쳐나는 공중파 방송에서 1위 후보로 올랐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꽃을 든 남자> 영화 OST로 실렸던 이 노래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고, 자우림은 데뷔하자마자 대중의 인기를 얻은 그룹이 되었다. 자우림의 데뷔 성적은 국내 록 음악 시장에서는 굉장히 보기 드문 사례 중 하나로 기억된다.

 

4. ‘얀데레’에 관한 은유

자우림 '밀랍천사' 실황

말도 안 하고 숨도 안 쉬는 연인을 미치도록 갈구하는 내용의 ‘밀랍천사’는 김윤아가 영화감독 제니퍼 린치의 <박싱 헬레나>(Boxing Helena, 1993)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이다. 팔다리를 몽땅 잘라서라도 사랑하는 여자를 곁에 두고 싶은 남자 주인공의 간절함이 연인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노래로 재탄생된 것이다. 내막을 알면 소름 끼치는 내용과는 대비되는, 세상 발랄한 멜로디 때문에 또 한 번 흠칫하게 되는 곡.

 

5. 2년 차 징크스는 없었다

자우림 ‘미안해 널 미워해’

1997년 첫 번째 앨범 발매 이후 1년 만에 낸 2집 <戀人(연인)>의 ‘미안해 널 미워해’는 전작 이상의 인기를 누리며 ‘2년차 가수의 징크스’를 보기 좋게 깼다. 몇 줄 안 되는 간결한 가사로 쓰여졌지만, 사연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공감하겠다 싶을 만큼 심오한 곡이다. 특히 1절의 ‘사무쳐 그리지는 않았지’와 2절의 ‘사무쳐 그립지는 않았지’는 ‘그리지’와 ‘그립지’의 한 단어 차이로 전혀 다른 의미를 전한다.

 

6. 그 시절 우리가 궁금했던 ‘맛’들

자우림 ‘파애’

한때 자우림의 팬들은 ‘레몬과자 맛’은 어떤 맛이며, ‘체리샴푸 맛’은 또 대체 어떤 맛일지 고민스러웠을 것이다. ‘내 마음’을 레몬과자에, ‘아름다운 너’를 체리샴푸에 비유한 ‘파애’때문이다. 사랑이 깨져버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미루어 각각의 맛을 추측해보자면, 레몬과자는 시다 못해 쓴맛, 체리샴푸는 유혹적인 향기를 뽐내지만 막상 먹으면 구역질이 나는 맛일지도 모르겠다.

 

7. 김윤아는 잘 꺾는다, 진짜 잘 꺾는다

자우림 ‘망향’ MV

김윤아는 곡마다 수시로 창법을 바꿔 부른다. 진성, 중성, 가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노래의 결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특히 김윤아 특유의 ‘꺾기’는 트레이드마크라 여겨질 정도로 유명한 창법이다. (독특한 창법과 음색 때문에 더 크랜베리스의 보컬 돌로레스 오리어던과 같이 거론된 적도 있다.) 자우림 곡 통틀어 꺾기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망향(望鄕)’으로 김윤아의 독보적인 보컬 실력을 다시 감상해보자.

 

8. “자우림 씨? 그냥 자우림입니다”

<SNL코리아 시즌4> 자우림 편 中

밴드 구성에서 제일 돋보이는 포지션은 단연 보컬이겠지만, 자우림의 경우 김윤아가 압도적인 비율로 작곡까지 맡는 터라 다른 팀에 비해 보컬이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 팀 내부에서 김윤아의 공헌도가 워낙 큰 편이기에, 한때 자우림을 솔로 가수라 착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김윤아를 ‘우림 언니’라 부르는,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해프닝은 <SNL코리아 시즌4> 자우림 편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9. 이선규와 김진만의 초코크림롤스

쵸코크림롤스 ‘클라크’ MV

자우림 이전에 CCR(초코크림롤스)이었던 이선규와 김진만은 2003년, 퍼니파우더의 드러머 이승복과 의기투합해 초코크림롤스의 1집 < ChocoCream Rolls>를 냈다. 그러고서는 전국 투어까지 돌았다. (2003년 여름, 초코크림롤스의 대구 공연 당시 에디터가 그 자리에 있었다. 관객은 열 명 남짓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자우림의 인기와 비교하면 그리 성공적인 성적은 아니었을지라도, 앨범 자체는 제대로 ‘인디 록’스러운 명반이었다.

 

10. 완벽히 달랐던, 완벽했던 ‘재즈카페’ 무대

자우림은 <나는 가수다> 경연에 참여한 후 줄곧 하위권에 머물렀지만, 이 곡을 계기로 반등했다. ‘90년대 명곡 부르기’ 미션에서 선보인 신해철의 ‘재즈카페’는 가히 ‘창조’ 수준이라 할 만큼 변화무쌍한 리메이크곡이었다. 1절과는 다른 2절의 극적인 반전, 김윤아의 친동생 김윤일과 조합을 맞춘 색다른 보컬, 김윤아의 끈적하고도 폭발적인 무대매너가 조합된 ‘재즈카페’는 줄곧 열등생이었던 자우림에게 1위를 안겨주었다.

 

11. 짜장면 ‘덕후’ 이선규

지난 4월 공개된 이선규의 ‘짜장면 사랑 고백 영상’. 촬영 중간에 직접 짜장면을 시켜 먹기도 했다. 영상 속 이선규는 특유의 어눌하지만 진정성 있는 말투로 ‘가장 신선하고 맛있는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한다. 자우림의 오랜 팬이라 해도 이선규가 짜장면 마니아였다는 사실은 대부분 모르지 않았을까. 다만 확실한 건, 영상을 보고 나면 짜장면이 먹고 싶어진다는 거다.

 

12. ‘자우림이 아닌 김윤아’여야 했던 이유

김윤아 ‘야상곡’ MV

‘야상곡’은 김윤아의 솔로 활동을 대표하는 곡이다. 한 편의 영화와 견주어도 모자람 없는 뮤직비디오는 오지 않는 임을 ‘이제는 오시려나’ 속절없이 기다리는 김윤아를 담았다. 솔로로서의 김윤아는 자우림의 보컬 때와는 결이 다른 섬세함을 보여준다. 

 

13. 의외였던 피처링 작업, 지드래곤

지드래곤 ‘Missing You(Feat.김윤아of자우림)’

김윤아는 피처링에 적극적인 뮤지션은 아니었다. 백현진과 이적, 김수철 등을 제외하곤 피처링 참여는 굉장히 드문 편이었는데, 지드래곤과 함께 부른 ‘Missing You’를 기점으로 피처링 작업에 두루 참여하게 되었다. ‘Missing You’는 같은 앨범의 ‘One Of A Kind’나 ‘크레용’ 같은 프로모션 곡이 아니었는데도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2위에 랭크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이후 지드래곤은 ‘Missing You’ 무대를 아이유, 리디아 백, 악동뮤지션의 이수현과 함께 선보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지드래곤과 김윤아의 조합을 무대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4.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10주년’

자우림 ‘Carnival Amour’ MV

2017년은 2007년과 비교하면 참 다행스러운 해다. 10주년이었던 2007년의 자우림은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원하니까 우리는 그냥 쉬기로 했다”는 말을 끝으로 약 20개월 동안 공백을 가진 자우림은 이듬해 7집 <Ruby Sapphire Diamond>으로 컴백했다.

 

15. 멤버들의 성격

<스페이스 공감> 출연 당시 서로에 대해 말하는 자우림
과거 이선규가 SNS에 직접 올린 사진

이선규는 낯을 가리는 편이고 다소 엉뚱하며, 김진만은 이선규보다 약간 더 낯을 가리며, 구태훈은 네 명 중 가장 낯을 덜 가리는 바람에 ‘구부장’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김윤아는 (데뷔 전 영입 제의를 많이 받았는데도 자우림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심지가 굳은 편’이라 알려져 있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네 사람의 팀워크는 20년 동안 함께한 세월이 보증한다.

 

16. 보컬 김진만, 보컬 이선규

자우림 공연엘 가면 이런 것도 볼 수 있다. 덧니 만개한 김진만이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부르는 ‘벚꽃엔딩’이다. 자우림은 공연할 때 김윤아가 아닌 다른 맴버들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8월 ‘자우림 20주년 콘서트’에서 김진만이 ‘반딧불’, 이선규가 ‘위로’를 불렀다.

 

17. 드라마 팬들의 귀마저 사로잡은 ‘길’

흥미진진한 내용에 한껏 몰입하다 보면 순식간에 한 회가 지나 가버리는 <시그널>의 엔딩 장면에선 어김없이 김윤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윤아가 부르는 <시그널> OST ‘길’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판타지적 소재, 얽히고설킨 사건을 파헤치는 드라마의 장르적 특성과 맞물리며 <시그널> OST 중 가장 사랑받는 트랙이 되었다.

 

18. 자우림의 정규&비정규 음반들

1집 <Purple Heart>(1997), 2집 <戀人>(1998), 2.5집 <B 정규작업定規作業>(1999), 3집 <Jaurim, the Wonderland>(2000), 라이브 앨범 <Jaurim 'TRUE' Live-R>(2001), 4집 <Jaurim 04>(2002), 5집 <All You Need Is Love>(2004), 5.5집 <청춘예찬 靑春禮讚>(2005), 6집 <Ashes to Ashes>(2006), 7집 <Ruby Sapphire Diamond>(2008), EP <Untitled Records)>(2009), 8집 <陰謀論>(2011), 9집 <Goodbye, grief.>(2013)

 

19. 다시 ‘자우림 완전체’를 기다리며

Via 구태훈 페이스북 

지난해 6월, 자우림은 공식 계정을 통해 구태훈의 탈퇴 소식을 전했다. 20주년 공연을 앞둔 때라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저희 드러머 구태훈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당분간 함께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글에서 구태훈의 탈퇴가 영원한 것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구태훈이 가능한 시기가 온다면 팀에 다시 합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 20주년, 혹은 그 이후

<유희열의 스케치북 출연>에서 들려준 히트곡 메들리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끝낸 자우림은 곧바로 새 앨범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고 올해 2018년 동명의 정규 10집 <자우림>을 발매했다. 공교롭게도 홀수 앨범엔 밝은 곡, 짝수 앨범엔 어두운 곡을 선보였던 자우림의 ‘홀수 짝수 공식’이 밝은 분위기의 8집 <陰謀論>으로 깨어져 버린 만큼, 10집은 희망에 대한 노래와 회한의 정서가 배어있는 곡들을 조화롭게 섞어 냈다. 20주년을 넘긴 자우림이 11집, 12집 혹은 그 이상의 앨범으로 팬들과 마주하며 오래도록 활동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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