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할머니들은 양말을 “다비”라고 불렀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의 어느 날, 손주는 ‘다비’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고어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어떤 손주는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양배추를 “카배추”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자랐다. 손주는 ‘카배추’가 배추의 다른 종류인가 했다. 나중에 손주가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 양배추가 일본어로 ‘캬베츠(キャベツ)’라는 걸 알았다. 그의 할머니가 어려서 일본에 잠시 살았고, 공부도 아주 잘했더라는 건 나중에 누군가 알려준 이야기다. 또 다른 손주는 할머니가 쓰던 월풀 세탁기를 물려받았다. 세탁기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 가족의 옷을 깨끗하게 빨았다. 하지만 그의 할머니는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월풀 세탁기만큼이나 요란하게 가족들을 들볶았다. 영화 <집으로>(이정향 감독, 2002)에 나오는, 치킨이 먹고 싶다는 손주에게 백숙을 조용히 내미는 수더분하고 착한 할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치킨도, 파스타도 좋아했다. 이 모든 할머니는 이제 사라졌다. 그들은 손주들의 기억에 그들만의 할머니로 남았다.

“할머니”라는 말이 자연적으로 의미하는 것 같았던 감상들, 말하자면 시골에 거주하며 희생적이고 온화한 늙은 여성, ‘모성애’ 이외의 단어로 수식해서는 죄책감이 들 것 같은 그런 표상들은 사실 이제는 조금 낡은 것처럼 보인다. 그 반대편 어딘가, 보글보글한 파마머리에 드세고 억척스러운 여성으로 그들을 지칭하는 것도 낡아 보이긴 마찬가지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그들의 어머니를 회상하는 방식은 지금의 손주들이 할머니를 기억하는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 또 성별에 따라 그 회상이나 기억의 지점들도 달라진다. 한 집에서 난 손자들과 손녀들도 할머니를 다르게 기억한다.

이렇게 다양한 할머니들을 그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손주들이 기억하고, 함께 만들어 간다. 조금이라도 이 순간을 함께 하고 싶어서.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가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효심 때문이 아니라, 꼭 애정 때문도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가 이렇게나 다양하고 많고 넓으므로. 그리고 자신과 오랜 시간을 보냈던 누군가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모르고 살았을까 하는 놀라움이 우리에게도 깊이 전해져 온다.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Grandma’s Diary)

이상한 딸기모찌떡 만들기 [박막례 할머니]

박막례 할머니는 여전히 백반집을 운영하는 현역 사장님이다. 35만 명(2018년 1월 기준)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브 스타이기도 하다. 그의 손녀인 제작자 김유라가 2016년 말, 직장을 그만두고 할머니와 호주로 여행을 다녀오며 첫 영상을 촬영해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헬멧을 쓰고 다이빙을 하고, 산타 모자를 쓰고 외국인들과 어울리는 할머니의 모습을 몇만 명이 지켜봤다. 보통 20~30대의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만든 방송을 보는 이들이 전라도 사투리로 거침없는 입담과 재치를 쏟아 내는 71세 박막례 할머니에게 열광한다. 손녀는 처음에 치매에 걸릴 수도 있다는 말을 의사에게 들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영상 제작을 시작했다. 애정이 묻어 나는 사랑스러운 자막도, 촬영과 편집 모두 손녀의 몫이다. 메이크업 튜토리얼, 쇼핑 하우, 가방 공개, 요리까지 유튜브 문화에 익숙한 손녀가 콘텐츠를 기획한다. 젊은이들의 문화에 익숙지 않은 박막례 할머니의 꾸밈 없는 모습이 웃음 포인트이지만, 손녀와 할머니가 동시에 정신없이 웃으며 카메라가 흔들리는 순간이야말로 ‘한번 보면 끊을 수 없는 마성의 매력’의 핵심이다.

 

“할머니, 왜 죽을라 그랬어?” <할머니의 먼 집>(이소현 감독, 2016)

<할머니의 먼 집> 예고편

<할머니의 먼 집>은 손녀인 감독 이소현이 박삼순 할머니와의 일상을 2년 6개월에 걸쳐 촬영해 만든 다큐멘터리다. 이미 고령인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충격에 손녀는 할머니가 계신 화순으로 내려갔다. 손녀와 할머니 간의 애착으로 시작해 가족들과의 관계나 노인의 외로움, 부양, 삶과 죽음, 나이 듦에 대한 고찰 등 영화가 다루는 소재들이 절대 가볍지 않다. 할머니와 손녀 간의 애틋하고 다정한 사랑의 순간이 반짝이는 가운데, 할머니를 둘러싼 가족들은 아주 ‘평범한’ 고민과 문제들을 마주한다. 그 평범한 고민들은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것들이다.

노년의 삶에 대한 각자의 입장과 태도들은 가족 속에서도 서로 다르지만, 영화 속 가족들의 모습은 악역과 선한 역으로 나뉘는 대신 관객이 자신을 향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외로움과 우울처럼 연약하고 인간적인 감정들을 할머니가 가질 수 있다는 데에 새삼 놀란다. 할머니는 그저 나이 든 한 인간일 뿐이며, 나 역시 언젠가 늙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는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영화가 담아낸 두 사람 사이의 따뜻하고 깊은 사랑이 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은 만큼, 2017년 3월에 박삼순 할머니가 ‘먼 집’으로 떠나신 후 온라인에서는 작은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 영화보기 | 옥수수 | N스토어시네폭스유튜브

 

<할머니의 요리책>(최윤건, 박린 Magnetic 5, 2015)


책 본문 중 박린이 그린 ‘갈치조림’ 요리법. 이미지 출처 유어마인드

손녀 박린이 기획하고, 할머니 최윤건에게 요리법을 물었다. 할머니가 서툰 글씨로 수첩에 글씨를 쓰는 동안 손녀는 그런 할머니를 촬영하고, 음성을 녹음했다. “멸치 넣고 파도 넣고 수제비를 만들었다”고 할머니가 쓰면, 손녀는 할머니의 요리법을 계량화해 글과 그림으로 구체화했다. 할머니가 쓴 요리 노트도 고치지 않고 손길이 닿은 그대로 실었다.

30년 동안 할머니의 음식을 먹고 자란 손녀는 할머니의 맛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다. 음식은 할머니의 삶과 경험이 자신과 만나는 일상적이지만 기쁜 통로였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입맛’이라 불리는 맛의 취향을 가진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이데아 같은 것이 아니다. 어머니,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매일 끓이고 볶고 삶은 덕분에 ‘입맛’은 전수된다. 매일의 끼니가 우리를 만들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요리책>은 손녀의 성장 기록이자, 할머니 삶의 기록이다.

최윤건 할머니의 서두 글. 이미지 출처 <할머니의 요리책> 텀블벅 페이지

저자는 서두에서 직접 자신을 소개한다. “제 이름은 최윤건입니다. 저는 나이가 92살입니다. 그래서 글씨도 몰라서 잘 못 썼어요. 잘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2015년 2월 16일” 손녀가 어떤 마음으로 책을 만들었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실적인 한 사람의 위엄과 삶의 무게가 성큼 다가온다.

 

메인 이미지 출처- <할머니의 먼 집>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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