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는 과거를 더듬는 방식이고, 옛것에 대한 동경은 발빠르게 변화하는 유행을 좇다 지친 사람들이 숨통을 틔울 도피처다. 때문에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추억’이 가지는 힘은 세다. 당연히, 20대들에게도 복고 정서는 있다. 수업시간에 두드려 대던 한컴 타자연습, 저화질의 컴퓨터 화면, 단순한 색감의 픽셀로 이뤄진 고전 게임 등이 그것. 디지털 문화에 대한 짙은 향수를 가진 20대에게 베이퍼웨이브(Vaporwave)라는 문화는 옛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훌륭한 방식이 되기에 충분했다. 뮤직비디오, 홍보영상, SNS 컨텐츠 같은 영상작업을 진행하는 FILO 필름(FILO Film)에서 만든 <I’m Just a Kid>를 보면서 생소하고도 낯선 단어, 베이퍼웨이브의 이미지를 더듬어보자.

FILO film <I’m Just a Kid> 

저화질의 3D 영상, 조잡한 폰트, 파스텔과 네온, 메탈 컬러를 제멋대로 조합한 이미지는 베이퍼웨이브의 전신이다. 소위 촌스럽고 서툴게 느껴지는 옛날 그래픽 디자인을 키치스럽게 변형해 ‘쿨’해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오늘날 단순히 비주얼적인 트렌드를 넘어 디자인, 영상, 사진 같은 다양한 문화형태로 부피를 확장한 베이퍼웨이브를 ‘음악’으로 파헤쳐보자.

 

Saint Pepsi ‘Cherry Pepsi’ MV

베이퍼웨이브 음악을 거론할 때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세인트 펩시(Saint Pepsi)다. 영상을 보다시피 1980년대 ‘잘나가던’ 펩시 콜라의 광고들을 짜깁기해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이름과 노래 제목도 펩시로 짓는 등 음악 전체를 온통 펩시로 도배했다. 베이퍼웨이브 음악은 흔히 기존의 하우스, 펑크, 스무스 재즈 같은 음악들을 ‘샘플링’하는 기법을 사용하는데, 세인트 펩시 음악 역시 다르지 않다. 원곡인 시스터 슬레지(Sister sledge)의 ‘B.Y.O.B. (bring your own baby)’에 비해 템포를 느리게 하는 대신, 비트를 강조함으로써 더욱 흥겹게 들리도록 샘플링했다. 그밖에, ‘Private Caller’, ‘Mac Tonight’ 같은 곡들도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와 함께 모두 감상할 수 있다. 현재는 세인트 펩시라는 이름을 버리고 스카이라 스펜스(Skylar Spence)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샘플링 음악이 아닌, 자신의 색깔이 담긴 자작곡들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앨범 <Prom King>(2015)의 수록곡 ‘Can't You See’ MV 

Yung Lean 'Hurt' MV 

스웨덴 출신의 래퍼 영 린(Yung Lean)의 'Hurt' 뮤직비디오다. 조악하고 투박한 이미지들을 짜깁기해 만든 영상은 베이퍼웨이브가 SNS에서 한창 유행할 당시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같이 베이퍼웨이브적인 그래픽 디자인을 뮤직비디오에 접목한 국내 래퍼의 곡들로는, 키스에이프의 ‘It G Ma’, 팔로알토의 ‘Fancy’ 등이 있다.

3D정보GNG ‘LET'S TALK BUSINESS’ 

국내 힙합 프로듀서 겸 비트메이커 무드슐라가 ‘3D정보GNG’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베이퍼웨이브 장르의 곡 ‘LET'S TALK BUSINESS’. 원곡인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의 익숙한 멜로디 라인과 중간중간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윈도우 부팅 사운드가 기가 막히게 버무려진 감각적인 샘플링 곡이다.

Desired 'Eyes On Me' MV

베이퍼웨이브 음악으로 꽤 알려진 레이블인 ‘Artzie Music’의 소속 아티스트 Desired의 'Eyes On Me' 뮤직비디오. 사실 뮤직비디오라 해봤자 유명 애니메이션의 클립영상을 반복해 트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쾌하고 톡 쏘는 음악과 함께하니 이마저도 ‘쿨’하고 멋있다. Chaka Khan의 'Fate'를 샘플링했다.

‘Artzie Music’ 공식 유튜브 [바로가기

 

누군가는 베이퍼웨브의 유행이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본래 1980~90년대의 향수를 뒤틀고 편집하는 장르의 파생물로 태어났으니, 소재의 신선함과 더불어 잠깐 뜨고 마는 밈(meme)이라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 여전히 많은 아티스트들이 베이퍼웨이브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들고 전시를 열며, 영상을 제작한다. 그런 점에서 베이퍼웨이브 고유의 형태는 점차 말소되고 있을지 몰라도, 문화와 예술 전반에 뿌려 놓은 영향력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메인 이미지 출처- FILO film <I’m Just a Kid>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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