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인디’는 ‘일본 인디’ 정도의 반열에 접근한 것 같다. ‘차오동 노파티’(No Party for Caodong, 草東沒有派對), 선셋 롤러코스터(Sunset Rollercoaster, 落日飛車), 엘리펀트 짐(Elephant Gym, 大象體操) 등이 국제 페스티벌에 여기저기서 공연을 하고 다닌다. 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도 한국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이들의 음악을 수 있다. 

대만 인디에 대해 어느 정도 또렷한 이미지가 형성된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부드럽고, 달달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일 것이다. 아마도 이미 인디포스트에서 이미 인터뷰를 한 선셋 롤러코스터의 영향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 이런 게 고정된 스테레오타입이 되면 문제지만 아무런 이미지가 없는 경우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다. 

웬디 완더는 비교적 최근의 예다. ‘너와 함께 있고 싶어’(我想和你一起)라는 곡은 한국어 번역과 독음이 자막으로 삽입된 버전의 뮤직 비디오까지 있다. 날짜를 보니 2년이 넘었으니 최근도 아니다. 지난 8월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무대에 섰고 11월 15일 수요일에는 <Asian Pop Stage>라는 무대를 위해 한국을 또 찾는다. 

정규 앨범 한 장과 EP 한 장만 낸 밴드가 이렇게 국제적이 된 이유가 궁금해서 펜타포트 페스티벌 때 서면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흔쾌히 응했다. 매니저인 지나 린(Gina Lin, 林子靖)이 일을 잘 도왔다. 한국어를 잘 하는 젊은 대만인 임상정(Lin Shang-ting, 林湘婷)이 번역을 검토했다.

 

왼쪽부터 웨이샹(瑋翔, 기타), 정니(曾妮, 보컬·기타), 아뤼(阿叡, 드럼), 장양(江楊, 보컬·기타), 야오루(曜如, 키보드), 이미지 출처 - 네이버우드 컬처

 

1. 밴드/레이블

Q 웬디 완더를 아직 잘 모르는 한국인 청중에게 소개하는 걸로 시작할까요? 밴드 결성은 2018년, 데뷔 앨범은 2020년, 그리고 EP는 2021년에 나왔어요. 밴드의 스토리를 드라마처럼 풀면 어떻게 될까요? ‘돌파’(breakthrough)를 했다고 할 만한 두세 번의 순간을 말해주면 어떨까요? 창작, 녹음, 비즈니스, 공연 어떤 면이라도 좋아요.

웬디 완더 2016년에 장양(江楊), 정니(曾妮), 웨이샹(瑋翔)이 밴드를 결성했어요. 동급생이었거든요. 그때는 웬디 완더라는 이름은 아니었는데 2017년에 야오루(曜如)가 가입하면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어요. 2018년 중순에 앨범을 녹음하자고 결심하고 2019년에 녹음을 시작했어요. 첫 곡을 녹음한 뒤 드러머가 밴드를 나가고 동시에 그의 후배인 아뤼(阿叡)가 전학을 와서 밴드에 가입해서 지금의 라인업이 공식적으로 형성되었네요. 아뤼가 가입한 지 1년 뒤인 2020년 11월 초 1집 앨범 <Spring Spring>이 발표되었어요, 그게 공식 데뷔고 ‘너와 함께 있고 싶어’가 알려지면서 2021년 이후 지금의 레이블 네이버우드 컬처(Neighborwood Culture, 睦木文化)와 계약했어요.

장양

 

2. 투어/페스티벌

Q 2022년에는 대만 전역에서 투어를 했고 2023년에는 중국 대륙, 홍콩, 일본, 한국에 투어를 했어요. 이를 위해 밴드랑 회사(레이블)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말해 주세요. 밴드 멤버와 매니저 지나 린(Gina Lin: 林子靖)의 답이 다를 것 같기도 하네요. 앨범 한 종과 EP 한 종을 내고 해외 투어를 하는 게 대만 밴드가 보통 그러는 건지 웬디 완더가 특별했던 건지 궁금해요.

지나 대만 밴드가 1집 앨범을 발표하고 곡 하나가 디지털 스트리밍에서 성적이 “괜찮네.”(還可以, OK)라고 생각되면 투어를 갖는 게 보통에요. 성적이 “아주 좋다.”(很不錯, very good)’인 경우에는 대만에서 공연을 한 뒤 중국 대륙에 가는 걸 고려해요. 결국 중국 대륙이 대만 밴드에게는 중요한 시장이라서 올해 우리는 중국에서 한 달에 공연을 11번이나 했어요. 해외에서 공연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힘든 일과 행운이 필요해요. 요즘에는 SNS와 스트리밍 플랫폼 백그라운드 데이터도 레퍼런스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죠. 웬디 완더의 1집 앨범이 나왔을 때 판데믹이 심각했고 해외 투어를 나갈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너와 함께 있고 싶어’의 히트 때문에 대만의 북부, 중부, 남부에서 각각 천장의 티켓을 판매하는 공연 투어를 완수할 수 있었어요.

2022년 타이페이의 라이브하우스 레거시(Legacy)에서 기획한 <천인전(千人展)> 포스터

지나 2022년 말 판데믹이 서서히 해체되면서 해외 투어를 위해 홍콩과 중국 대륙의 몇몇 프로모터들과 접촉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때는 판데믹과 연관된 규제들 때문에 발생하는 비용을 고려해서 바로 해외 투어를 나서지는 않았고 판데믹이 완전히 해제된 2월에 바로 홍콩에 가서 첫 번째 해외공연을 했죠. 홍콩이 여행(투어)의 첫 정류장이 된 거죠. SNS와 스트리밍에서 백업된 데이터를 관찰해 보니까 홍콩 팬들이 모든 해외 나라들 가운데 넘버원이었거든요. 홍콩 팬들이 거기 와서 공연해 주기 바란다는 사적 메시지를 종종 받기도 했어요. 그래서 홍콩 공연은 전면적으로 호평을 들었고 600명 규모의 2회 공연이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라이브 연주 분위기가 이례적으로 좋았어요. 그날 공연 이후 올해 7월에 밴드 역사상 최대 규모인 1,500명이 들어오는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어요.(*그 전인 6월과 7월에는 중국 대륙 투어를 했다.) 홍콩에서의 경험에 큰 용기를 얻고 SNS로 백업된 데이터와 팬의 피드백도 겹쳐서 웬디 완더가 해외에서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판단하고 우리와 친했던 해외 부킹 에이전트에게 해외시장으로 확장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들도 웬디 완더를 해외 프로모터들에게 추천했어요. 운 좋게도 해외 프로모터들이 우리를 좋아해 줘서 일본과 한국에 속속 갈 수 있게 된 거고, 연말에는 태국의 <빅 마운틴 음악 페스티벌>(Big Mountain Music Festival)에 참여할 예정이에요.

올해 2월 홍콩 공연(왼쪽), 6~7월 중국 대륙공연(가운데), 7월 홍콩 공연(오른쪽) 포스터. 공연 타이틀은 <Have A Good Dream>.

 

3. 곡/작곡

Q 몇 가지 질문을 나눠서 할게요.

1) ‘너와 함께 있고 싶어’(我想和你一起)가 인기를 얻고 더 많은 청중이 공연에 오는 걸 느낀 건 언제부터인가요? 1집 수록곡 가운데 그 곡이 히트곡이 될 거라고 기대했었나요? 아니면 기대하지 못한 건가요?

2) 작곡을 할 때 한 사람이 곡 전체를 만드는 편인가요, 두 사람이 공작을 하는 편인가요? 후자의 경우라면 장양과 정니가 보컬을 나눠서 할 때 자기가 지은 부분을 부르나요? 혹시 작곡 과정에서 싸우면 누가 고집을 부리고 누가 양보하나요?

3) 재미삼아 물어보는 거지만 ‘오늘밤 떠나고 싶지 않아’(Don't wanna leave tonight)와 ‘니 마음 속에 머물게 해줘’(讓我住進你心裡)는 10대 시절 록(앞의 곡)과 디스코(뒤의 곡)에 푹 빠진 사람이 만든 것 같네요. 누구 취향일까요? 웬디 완더의 대표곡들의 낭만적 색깔과는 달리 ‘원초적’이네요.

웬디 완더 데뷔 후 처음으로 <浮現祭>(Emerge Festival)에서 공연했을 때 <너와 함께 있고 싶어>를 연주하는 도중 전기가 끊겨 버렸어요. 하지만 청중들이 나서서 우리가 곡을 계속 연주하게 도와줬어요. 그걸 떼창으로 부르고 난 뒤 '이 곡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아는구나'라고 깨달았죠. 기타 치는 웨이샹은 너무 감동해서 울어 버렸어요. 그래서 이 곡이 인기 있는 곡이 될 기회가 있을 거라고 느껴서 앨범을 만들 때 이 곡을 타이틀곡으로 잡고 많은 예산을 들여 제작하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었어요.

어떤 곡들은 혼자 만든 곡도 있고 다른 곡들은 같이 만들어요. 장양과 정니는 각자 지은 부분만 부르는 게 아니라 어떤 구절은 누가 부르는 게 적합한지에 따라서 나누어요. 작곡 과정에서 가끔 싸우기도 하고 누가 타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최종 결과는 민주적 투표로 결정합니다.

<니 마음 속에 머물게 해줘>는 장양이 만들었고 <오늘밤 가기 싫어>는 장양과 정니가 같이 만들었지만 누구 한 사람이 특별히 록이나 디스코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록과 디스코는 원래 멤버들이 좋아하는 음악 타입이고, 그래서 곡에 이런 요소들을 점진적으로 추가하다 보니 이런 모양으로 나온 거죠.

아뤼

 

4. 가사/언어

Q 웬디 완더에게 가사는 얼마나 중요한가요? 어떤 아티스트는 가사의 내용을 매우 중시하지만, 다른 아티스트는 가사는 또 하나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웬디 완더 경우는 어떨까요?

그리고 곡마다 가사가 중국어와 영어로 구분되는데 가사의 언어를 고르는 기준이 있을까요? 혹시 가사를 영어로 먼저 쓰고 중국어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역시 농담 같은 건데 ‘너와 함께 있고 싶어’에서 “和你” 부분을 부를 때 (중국어를 잘 못하는) 저는 “honey”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곡이 확 들어오더라고요 (웃음)

웬디 완더 우리에게 가사와 음악의 중요성은 각각 50%에요. 가사는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고 선율과 편곡은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죠. 중국어와 영어로 가사를 쓰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고 곡마다 달라요. 영어로 직접 가사를 쓸 수 있다고 느끼면 영어 가사를 쓰지 그 때문에 ‘중국어를 영어로’ 번역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가끔은 중국어 가사를 쓴 다음에 편곡 후에 집어넣는 일은 있는데 영어로 노래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영어로 바꾼 거죠. 그런 일은 있지만 영어 가사를 중국어 가사로 바꾸는 일은 없었어요.

“和你”가 “honey”로 들리는 건 곡을 쓸 때는 전혀 예상 못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네요, 하하.

정니

 

5. 장르/스타일

Q 1집 데뷔 앨범의 일본판을 발표한 빅로맨틱레코드가 “나른한 신쓰 사운드의 도회적이고 낭만적인 팝”(urban romantic pop with languid synth sounds)이라고 표현했는데 만족하시나요? 그 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웬디 완더의 음악 스타일을 2010년대의 시티팝 리바이벌과 연관지을 것 같기도 하고 선셋 롤러코스터의 영향도 언급할 것 같은데 본인들은 이런 평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한국에서 어떤 사람들은 ‘대만 인디는 너무 소프트, 멜로우, 로맨틱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거든요.

웬디 완더 1집 <Spring Spring>에 대한 위의 설명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해요. (시티팝에 대해서는) 옳고 그르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시티팝이라고 느끼는 분위기의 어떤 요소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창작 과정에서 시티팝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어요. 시티팝이 하나의 웨이브로 부상했기 때문에 레퍼런스로 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어서, 우리 음악이 시티 팝과 비슷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선셋 롤러코스터는 우리가 많이 좋아하는 밴드고,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고 영감을 얻은 건 분명해요. 우리가 선셋 롤러코스터랑 상황이 비슷한 게 또 하나 있다면 밴드에 신시사이저가 있고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점이죠. 그래서 우리 음악의 감각이 선셋 롤러코스터랑 비슷하다고 느낄 수는 있겠죠.

대만 인디 음악이 전부 소프트, 멜로우, 로맨틱하지는 않아요. 실제로는 음악 장르가 매우 다양하답니다. 메탈, 포크, 일렉트로닉, 록 모두 각각을 대표하는 밴드를 가지고 있고 우리 같은 음악은 여러 음악 장르의 하나일 뿐이에요. 우리는 여러 요소들을 웬디 완더의 음악에 집어넣어서 올해 나올 2집 앨범이 모든 이들의 상상 속으로 돌파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빅 로맨틱 레코드가 발매한 바이닐(왼쪽)과 카세트(오른쪽), 이미지 출처 - 링크

 

6. 레코딩/스튜디오

Q 요즘은 많은 밴드들이 자기 집에 장비를 갖추고 대부분의 레코딩(녹음)을 하고 정규 스튜디오는 부분적으로만 이용합니다. 웬디 완더의 경우는 어땠나요? 그런데 저 같이 스튜디오에 들어가 본지 수십년이 지난 사람 귀에도 EP <Lily>의 사운드 퀄리티는 1집 <Spring Spring>보다 훨씬 개선된 것 같네요. 과장을 하면 정니의 노래소리를 비교하면 다른 가수 같아요(웃음). 자유롭게 편안하게 두 작품의 레코딩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 주면 감사해요.

웬디 완더 1집 앨범 <Spring Spring>을 녹음했을 때는 매우 단순한 장비를 사용했고 집에서 음악을 만들었어요.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죠. EP <Lily>를 녹음할 때가 되서는 레이블에서 투자를 해주었기 때문에 음악을 제작하기 위해서 정말로 프로페셔널한 레코딩 스튜디오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때가 우리가 정규적인 음악 프로덕션 과정에 노출되는 첫 경험이기도 했죠. 그래서 사운드가 다르게 들렸을 거예요. 비교적 큰 격차가 있어요. 그렇지만 내부적으로 음악을 만들기 위해 우리끼리 토의하는 과정에는 변화가 없었어요. 서로서로 많이 논의하고 실험하는 게 필요하죠. 음악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를 이용하기 보다는 연습실에서 직접 잼을 하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감각을 찾는 것을 선호합니다.

 

7. 장소/분위기

Q 제가 장소가 주는 감각에 민감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동아시아 청년들은 타이페이 같은 대도시에 매력을 느끼지만 거기 살기는 너무 비싸서 힘들어 하기도 합니다. ‘타이페이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웬디 완더의 ‘게으르고 칠(chill)한 음악과 ’바쁘고 핫‘한 도시 사이의 관계는 뭘까요? 아이러니가 있을까요?

그리고 한국의 음악스트리밍 회사에 나온 인터뷰를 보니 지룽(基隆)에서 촬영했네요. 촬영 장소인 어떤 쓰러져가는 건물에 ’華興街285巷‘라는 주소가 붙어 있는 걸 보고 검색해서 알아냈어요. 그렇게 황량한 곳의 방치된 건물에서 사진 촬영을 한 게 흥미로웠어요. 거기 거주한다든가 작업실이 있는 건 아니죠?

지룽 교외의 ‘폐가’에 가까운 건물에서 찍은 화보

웬디 완더 멤버들 모두가 타이페이에 사는 건 아니에요. 절반은 타이페이 교외의 린커우(林口)에 살죠. 린커우의 생활환경은 번잡한 타이페이보다 쾌적해요. 멤버 한 명은 번잡한 산종(三重)에 사는데 거기는 번잡해요. 오토바이를 타면 가끔 기분이 나빠지는 게 사실이지만 점차 적응하고 있어요. 번잡한 도시에 살거나 쾌적한 교외에 살거나 음악에 영향을 미치는 건 없어요. 우리 모두는 직관으로 음악을 만들고 다섯 명 모두가 매우 상이하고 다양한 것들을 좋아해요. 웬디 완더의 음악은 각자가 좋아하는 음악적 요소들의 교집합(交集)이고 다섯명의 창의성의 결정(結晶)이니까요.

지룽에서 사진을 촬영한 건 아마 사진작가의 제안 때문이었을 거에요. 그때 옥외에서 촬영하고, 일반적인 현대적인 도시 분위기와는 다른 사진을 촬영하자는 아이디어를 우리가 냈고 사진작가가 지룽으로 가자고 제안해서 그곳을 걸어가다가 화씽제 인근에서 사진을 찍은 거죠. 폐허 같은 느낌이 나는 정경을 원해서 ‘쿨’한 야외 주차장으로 갔어요. 모든 작업이 별다른 압력을 느끼지 않고 교외에 소풍을 가는 것 같았고 오후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촬영을 했어요. 지룽은 회색의 어두운 느낌의 오래된 도시라는 특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고 이런 분위기가 EP <Lily>의 분위기와 부합하는 점이 있어요.

산종은 타이페이시에서 담수허(淡水河)의 서쪽 바로 건너편에 있고 린커우는 거기서 서북쪽으로 바닷가에 가까이 있다. 둘 다 신베이(新北) 시의 구(區)다. 마치 경기도가 서울을 둘러싸듯 신베이는 타이페이를 둘러싸고 있고 영어로는 'New Taipei City'라고 표기한다. 지룽은 타이페이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타이페이가 서울이라면 지룽은 인천'이라는 말로 설명으로 대신한다. 타이페이, 신베이, 지룽을 합한 타이페이-지룽 도회구(臺北基隆都會區)는 인구 700만 명의 메트로폴리스를 이룬다.

 

8. 국제/아시아

Q ’영향받은 영미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할게요. 저는 이제 그런 얘기 재미없네요(웃음). 단, 더 젊었을 때 들었던 아시아 음악이 뭔지 물어보고 싶어요. 특정한 밴드나 아티스트를 말해주면 감사합니다! 그때는 인터넷 스트리밍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일본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네요. 빅로맨스레코드와 라이센스 딜도 맺었고 <부현제> 페스티벌에도 참여해서 그렇다고 느꼈어요. ’일본 시장‘은 의식적으로 타깃으로 삼은 건지, 하다 보니 우연과 행운이 온 건가요? 카에데에게 작곡을 해준 건 조금 놀랐네요. 중개자가 있었던 거죠?

정니는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한국의 팝 문화를 좋아하고 한국어도 배웠다고 말했는데 한국유행(韓國流行) 오타쿠로서 삶을 얘기해 주실래요? 정니의 아이돌이라는 아이유(IU) 외에 다른 한국 음악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도. 인디 음악도 포함해서요.

웬디 완더 우리가 음악을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을 때는 인터넷(정확하게는 스트리밍)이 충분히 발달한 다음이죠. 다운로딩과 CD로 음악을 듣는 시기가 있었지만 어릴 때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일 뿐이죠. 아시아 음악의 영향이라면, 선셋 롤러코스터(落日飛車), 혁오, 페이 모니 투 마이 페인(ペイ·マネ·トゥ·マイ·ペイン), 아오바 이치코(青葉市子), 주걸륜(周杰倫), 도철(陶喆) 등이 우리 음악에 많은 영향을 미친 아시안 음악인들입니다.

일본시장은 확실히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싶은 타깃이에요. 처음에는 빅 로맨스 레코드(大浪漫唱片)와 그곳의 매니저인 부다 테라오(Terao Budha) 씨와 연결되었고 그가 우리를 초청하는 이니셔티브를 가지고 일해 줬어요. 그의 좋은 평가 때문에 일본에서 CD와 바이닐 레코드를 발표할 수 있었고 그게 일본시장과 연결하는 기회를 열어주었죠. 요나워(Yonawo)와 온라인에서 공연을 같이 할 기회, 카에데(Kaede)에게 곡을 만들어준 것도 모두 테라오 씨가 힘써준 것입니다. 이런 이전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올해 초 대만의 <이머지 페스트>(Emerge Festival, 浮現祭)에 참여하게 된 거죠.

<이머지 페스트>는 대만과 일본을 오가면서 열리는 페스티벌인데 2023년에는 2월에 대만의 타이중에서 9월에는 도쿄 시부야의 듀오 뮤직 익스체인지(duo Music Exchange)에서 열렸고 웬디 완더는 두 군데 모두 참여했다. 한자로는 ‘浮現祭’는 중국어로는 ‘푸쏀제’, 일본어로는 ‘후겐사이’로 발음할 것 같다. ‘떠오른다’는 의미다.

정니가 K-pop을 사랑하게 된 건 2000년대 초부터입니다.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로 시작해서 별로 시차 없이 아이유를 좋아하기 시작했죠. 악동 뮤지션 같은 그룹도 좋아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한국 인디음악은 혁오를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많이 찾아듣기(涉略)를 하진 않았네요.

야오루

9. 씬/산업

Q 제 눈에는 대만 인디 음악이 한국 인디 음악보다 탄탄해 보이네요. 한국에서는 K-pop이 지나치게 강성하다 보니 인디 음악이 많은 청중과 충분한 시장을 확보하기 힘들어요. 적어도 인디 음악과 연관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죠. (웃음) 대만 인디 음악 씬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려주실래요?

웬디 완더 사실 대만 인디 음악 씬은 성숙해 왔어요. 대만에서는 팝 음악과 인디 음악의 구분이 없다는 말조차 있구요. 우리는 지금 음악을 통해 풀타임으로 살아가고 있구요. 우리가 부자는 아니지만 기초생활에서 아무 문제가 없고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어요. 물론 모든 밴드가 이럴 수 있는 건 아니라도 이 점이 대만의 인디음악 상황을 표현해 줍니다. 음악 씬은 일정한 시장을 가지고 있고 음악인들은 그 시장에서 음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죠.

지나 웬디 완더가 국제적 시장에 진입할 기회를 가진 것은 시대의 분위가 바뀐 것(최근 아시아에서 인디 음악이 부상하는 것 같습니다)에 더하여 그들의 음악이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청중(「非」華語族群聽眾)에게도 기회를 준다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만의 음악은 화어 대중음악(華語流行)이든 독립음악(獨立音樂)이든 청취자를 끌기 위해서 가사에 많이 의존해요. 그래서 중국어 사용자가 아니면 가사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 작품의 팬이 되기 어렵습니다. 문턱(門檻)이 높은 거죠. 그렇지만 웬디 완더의 음악은 가사의 비율 외에 음악과 편곡을 통한 감정과 분위기 전달의 비율이 높습니다.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의 증명이기도 하죠. 저는 웬디 완더가 음악을 통해 청중들을 직접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웨이샹

 

10. 세대

Q 세계 어디서나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Z세대라는 일반적 범주가 있지만 대만에서는 팔년급(八年級), 염세대(厭世代), 천연독(天然獨), 탕핑(躺平) 등의 말이 들려 옵니다. 실제 대만 청년인 웬디 완더 멤버들이 이런 걸 어떻게 실감하는지 궁금합니다. 그 전에는 소확행(小確幸)이나 소청신(小淸新)이라는 말도 대만산(産) 담론으로 이해되곤 했어요.

웬디 완더 우리 모두는 1995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九五後)입니다. 염세대(厭世代)는 우리의 특징을 정확히 묘사하지는 못할 것 같네요. 염세대라는 그룹도 우리 세대나 비슷한 세대에 존재하지만 우리와는 다른 그룹이죠. 지금은 분중(分衆)의 시대니까 염세대는 이 세대의 한 종류겠죠. 아마도 탕핑세대(躺平世代)가 우리를 더 잘 기술하지 않을까요? 전반적 환경이나 타이완의 높은 주택가격 때문에 우리는 돈을 모아서 집을 살 꿈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벌 수 있는 만큼 돈을 벌고, 돈을 전 다음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 씁니다. 현재에 사는 것이 미래를 계획하는 것보다 실제적 행복입니다.

지나 소확행이나 소청신은 이제 대만에서 더 이상 트렌디한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제 겨우 코비드 판데믹에서 벗어났는데… 하하.

 

11. 생활

Q 제가 보기에도 청년 세대가 살기 힘들어 보입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곡을 창작하고, 레코드를 제작하고, 공연을 하는 것만으로 생계를 꾸리기 충분해졌나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나요? 이건 한국의 인디 음악인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미래의 전망을 포함해서 견해를 듣고 싶네요.

웬디 완더 우리는 이제 공연과 로열티 관련 수입에 의존해서 생활을 꾸릴 수 있고, 음악을 제작할 때 레이블의 지원도 있어서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레이블과 계약하기 전 짧은 기간 동안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이자카야에서 맥주를 따르거나, 버블티 가게에서 음료를 흔들어 만들거나,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을 음악과 병행해야 했습니다.

 

마무리

Q 나이든 록 이상주의자자 자칭 평화 액티비스트로서 던지는 뜬금없는 질문입니다. 동아시아의 각국이 이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졌지만 아직도 불필요한 긴장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혹은 더 나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음악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과연 무엇일까요? 폭넓게 추상적으로 답해 준 다음 9월 23일의 <아시안 팝 스테이지>에서 연주하면서 성취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주고 마무리하면 좋겠네요!

웬디 완더 음악이 국가들 사이의 긴장된 이슈들을 개선시키기는 힘들다고 해야겠죠. 서로의 음악을 좋아하는 일을 통해 국민 교류(국제 교류)가 증가한다고 해도 음악이 이런 상황 자체를 개선시키는 역할을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아시안 팝 스테이지>에서는 한국의 더 많은 청중들이 우리 음악을 들어주기 희망합니다!

 

 

혹시 인디 음악이 반기업적(anti-corporate) 혹은 반상업적이라는 ‘고전적’이고 ‘영국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만산(産) 인디 음악은 너무 낭만적이고 순응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대만 인디 음악은 매우 다양하다지만 이런 ‘스위트’하고 ‘로맨틱’한 스타일이 많다는 느낌을 완전히 지우기는 힘들다. 그래도 자기들 힘으로 곡을 창작하고, 밴드를 만들고, 음악을 녹음하고, 라이브 공연을 통해 자립적으로 생활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인디’가 아니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렇게 음악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음악 활동을 시작한 많은 사람들의 꿈이다.

게다가 대만의 밴드들은 수준이 고른 편이다. 한국까지 공연을 온 밴드들은 ‘잘’ 하는 경우라서 당연하겠지만 랜덤으로 스트리밍을 들어도 작곡이나 음향의 퀄리티가 들쑥날쑥하지 않다. ‘혹시 씬이나 시스템이 안정적이라서 그런 것일까?’라고 추측하게 된다. 게다가 대만 밴드에게는 말이 바로 통하는 ‘중국 시장’이 있어서 장기 투어도 할 수 있다.(대만인들이 싫어할지는 몰라도 중국인들은 대만 음악을 ‘외국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그저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일까.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만 인디 음악이 ‘중국어 노래는 못 듣겠다’라고 생각하는 까탈스러운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편견을 서서히 허물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 음악을 소소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가까운 나라의 음악을 낯설어 하지 않게 되는 과정에 이미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다. 대만에서도 한국 인디 음악이 그렇게 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반드시 ‘대만’ 음악, ‘한국’ 음악이라서가 아니라 문화적 취향과 코드,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를 를 공유하는 음악이 서로 서로 많이 알아나가기 바란다. 관성적으로 ‘바란다’는 말이 나왔는데, 특별한 소망을 말한다기보다는 ‘몰라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는 진단을 전한다.

 

웬디 완더 링크트리

 

인터뷰 신현준

중문 감수 임상정(린샹팅, 林湘婷)

 

Writer

대중음악 연구자, 성공회대학교 교수
hyunjoon.sh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