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에 각 영화의 장면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스파르 울리엘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넘었다. 애도와 감탄의 문장은 좀처럼 손끝에서 마르지 않는다. <안녕, 소중한 사람>의 포스터를 목격한 후 요 몇 달은 특히 그러했다. 그를 눈여겨보게 된 계기는 <생 로랑>. 내겐 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배우였기에 이전 필모그래피를 샅샅이 훑지는 않았었다. 작년 겨울, 그를 보내는 글을 쓰며 여러 작품을 처음 혹은 다시 관람했다. 그중엔 현재의 감수성과는 맞지 않는 십 몇 년 전 시대극들도 있었고, 사랑 받는 캐릭터의 프리퀄을 다루었으나 미움을 더 많이 받은 영화도 있었다. 작품이 어떠하였건, 가스파르 울리엘은 그 안에서 저만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가 발하는 빛은 환한 태양이나 백열등의 색을 띠고 있지는 않았다. 그늘져 있었는데, 때로 미스터리함에도 의뭉스럽거나 탁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한밤중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수면의 다크 실버 블루. 묘사하자면 그런 색이었다. 차분한 내향성을 포함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군중 한가운데에 있다가도 별안간 자기 안으로 숨어버릴 것 같은, 때로 자발적 고립이 필요한 사람. 민감한 피부와 곧은 중심, 고유의 세계를 지닌 자. 그 아우라는 고독한 연쇄살인범이 흘리는 분노의 눈물에 어리기도, 여리고 섬세한 천재 디자이너의 가운에 스며들기도,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가족들을 찾은 예술가의 눈 밑 그늘에 드리워지기도, 혁명의 열기를 관찰하는 홈리스의 뺨에 묻은 먼지에 걸려 있기도 했다. 이 글은 가스파르 울리엘이 택한 특정 작품들에 집중하며, 그가 캐릭터의 옷을 입고 스크린에 빛이나 그림자를 더한 방식을 살핀다.

 

1. <생 로랑>(2014) ‘이브 생 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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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 울리엘의 팬으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독특하게 아름다운 마스크로 어린 나이에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그는 데뷔 초 주로 카메라와 주변 인물들에게 관찰되는 위치에 있었는데, 화면의 정 중앙을 차지할 때조차 아웃사이더적인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이 배우의 스크린 속 위치가 조금 달라지는 포인트를 나는 <생 로랑>으로 보았다.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관객과 타인의 주목을 원했던 ‘한니발 렉터’(<한니발 라이징>)와 ‘어떤 면에서’ 반대인 (허구적) 인물. 뛰어난 미적 감각과 연약한 심장을 지닌 자, 생 로랑은 관찰되는 대상과 관찰하는 이방인의 경계에 있었다. 해맑은 미소와 그늘진 뺨, 나직하고 가느다란 목소리, 예민하게 어긋난 어깨와 손목. 안경은 눈빛을 가리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돋보이게 한다. 일을 할 때는 눈앞에 있는 작품에게, 끌리는 상대와 마주하면 그에게 집중하지만, 얼굴 한켠에는 설명되지 않는 빈 공간이 있다. 때때로 깊은 생각에 잠겨 초점을 놓거나, 공허하고 멍해지기도 한다. 그는 즐거워하고, 불타오르고, 지긋지긋해 하고, 괴로워하고, 피로해한다. 그 에너지는 드라마틱하게 분출되기보단 내면으로 수렴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관심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 생 로랑. 그를 표현하는 가스파르 울리엘은 감정과 심리를 전면에 드러내는 대신 때로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보기를 택했다. 타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홀로 다른 공기를 두르며, 작품/모델/연인/때로 자기 자신을- ‘낯설게’ 보곤 했다.

이쯤에서 같은 해 공개된 피에르 니니 주연의 <이브 생 로랑>을 언급한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작품이 다르다’는 것을 나보다 훨씬 잘 설명해 줄 이는, 다름아닌 가스파르 울리엘이다.

“(……)각각의 비전을 가진, 절대 겹치지 않을 두 영화였다. 어느 정도는 두 작품이 각자의 존재 이유를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이게 생 로랑처럼 아이코닉한 인물의 다양한 면을 기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피에르 니니는 매우 훌륭했고, 그가 드러낸 부분과 내가 결정한 방향이 꽤 달라서 마음이 놓였다. (……) 내 경우는 매우 초기 준비 단계에서 현실과 거리를 두기로 결정했다. 결국엔 캐릭터가 내 성격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 같다.” - 가스파르 울리엘 © <IndieWire>, 출처 – 링크

두 작품 모두 관람한 관객으로서, 각 영화에 대한 통찰과 동료 배우에 대한 존중이 담긴 가스파르 울리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재했던 전설적 인물을 이처럼 개인적으로 연기하기란 쉬운 선택이 아니고, 성공하기는 더 어려우리라 짐작한다. ‘다들 가는 길’을 걷는 것이 불가능했던 사람을 ‘다들 쓰는 펜’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다고, 실험적인 연출가 베르트랑 보넬로는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실험’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 톤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표정에 녹일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을 것이다.

 

2. <단지 세상의 끝>(2016)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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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하면서도 용기 있는 가스파르 울리엘의 연기가 세상의 찬사를 받게 되는 것은 2년쯤 후 다른 작품을 통해서다. <단지 세상의 끝>의 ‘루이’ 역으로 그는 피에르 니니가 <이브 생 로랑>으로 받았던 세자르 영화제 주연상을 받는다. 

루이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귀향한 극작가다. 그의 근본은 가족이나 고향에 있는 것 같지 않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종처럼 모두의 시선을 감내하며 겉도는 ‘집 안의 이방인’. 내내 관찰되고 짐작되지만, 더 정확히는 ‘관찰한다’. 가족들을, 그들의 말을, 집안 곳곳에 쌓인 해묵은 감정과 추억들을. 가스파르 울리엘은 카메라와 주변에 의해 바라보아지면서도, 루이와 함께 한 걸음 물러나 공기 중에 떠도는 충돌의 잔해를 바라본다. 말하는 것은 대사보다는 눈이나 뺨, 어깨나 발걸음이다. 눈동자는 주변의 눈치를 보는 동시에 혼자만의 세계를 응시하는 듯하다. 그의 심리는 터지기보단 눌리고 감추어짐으로써 드러난다. 울거나 웃거나 찡그리지 않은 채, 입을 열지 않은 채- 말하는 루이의 얼굴을 카메라는 자주 살핀다.

이 영화의 감독 자비에 돌란은 다른 배우들에겐 끊임없는 대사를, 가스파르 울리엘에게는 침묵을 배치했다. 과잉된 감정의 클로즈업들을 화면에 쏟아 부은 까닭은, 그 사이에서 고요하게 동요하는 루이에게 핵심을 두기 위함이었으리라. 주인공이자 화자이면서도 관객에게 좀처럼 곁을 내어 주지 않는 이. <생 로랑>에서와 유사한 데가 있으나 그 다채롭고 예민한 블루와는 다른 류의 분위기다. 그를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앙투안이나 쉬잔에게 더 공감하게 되더라도, 모자를 눌러쓰고 배낭을 멘 루이의 뒷모습은 끝내 당신의 마음을 건드리고 말 것이다.

 

3. <원 네이션>(2018) ‘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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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기의 프랑스, 바스티유 감옥 함락부터 루이 16세의 처형까지를 다룬 작품 <원 네이션>은 ‘왜 왕을 단두대에 세워야만 했는가’를, 프랑스 혁명의 ‘진짜 주인공’인 파리 상퀼로트 시민들의 관점에서 풀어낸다. 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중심에 두고 허구의 드라마를 곁가지로 뻗는다. 지식인들의 기나긴 대사로 구성된 의회 씬을 비롯해 동시대 관객의 집중력을 놓칠 법한 장면들이 있었으나, 역사를 마주보는 맑은 거울과도 같은 바질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영화가 끝나 있었다.

가스파르 울리엘의 바질은 내향적인 데가 있으면서도 위에서 묘사한 이들과는 달리 투명하게 다 들여다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홀로 동떨어진 채 등장한다. 한적한 시골의 들판을 맨발로 뛰어다니거나 손에 앉은 나비를 바라보는 바질의 온도는, 열기를 내뿜는 파리 시민들과 달리 나른하고 시원하다. 거리에서 생활하다 닭을 훔치고 어깨에 낙인이 찍힌 그는, 왕이 탄 마차를 생각 없이 따라가다 파리에 다다른다. ‘가장 낮은 곳에서’ 혁명의 불길을 관찰하다 끝내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인물, 열정적 혁명가인 연인에게 동화되는 로맨티스트다.

연인의 이름은 ‘프랑수아즈’. 전작 <120bpm>(2017)에서 멋진 활동가를 연기했던 아델 에넬이 연기했다. 프랑수아즈는 테이블에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체포되어 분노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이다. 시대극 속 젊은 이성애 연인의 전형(가스파르 울리엘이 십 년 전 출연했던 <자쿠오 르 크로캉>(2007)에 그 대표적인 예가 있다.)을 뒤집은 듯한 프랑수아즈와 바질. 이들의 관계성을 완성하는 것은 배우들이다. 영화는 루이 16세의 처형이나 로베스피에르의 독백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는다. 처음 사랑을 나누었던 허름한 방, 바질은 제 아이를 바라보고, 프랑수아즈는 머리를 감으며 그런 그를 흐뭇하게 지켜본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들을 감싸는 가운데, 연인이 아이의 이름을 짓는다. 희망의 진부한 암시라 느껴질 수도 있을 엔딩까지 몰입할 수 있었던 데엔, 두 배우 각자의 존재감과 그들 사이 다이내믹 덕이 컸다.

바질은 이성적 사고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스스로의 진심을 너무도 잘 아는 그의 투박한 언어와 그렁그렁한 눈빛에 빠져들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까. 시민 회의에서 북받쳐 외칠 때의 떨리는 숨, 장총을 들고 앞서가는 프랑수아즈의 등을 바라보는 애절한 눈, 나비를 좇아 달리는 와중 벌어진 입, 꾸벅꾸벅 조는 모양까지. 온도와 밀도가 제각각인 모든 장면들이 하나같이 아름답다. 꼬인 데 없이 순수한 영혼을 지닌 가스파르 울리엘의 바질은 영화에서 마주하는 뜻밖의 선물과 같다.

 

4. <시빌>(2019) ‘이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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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언급할 작품 역시 (거칠게 묶으면) 시대 변화에 맞는 감수성으로 여성을 그린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스타일은 한데 묶기 힘들다. 이번 가스파르 울리엘의 역할은 ‘서사 안에서는 매력적인 남자로 설정돼 있지만, 캐릭터로서의 매력은 딱히 없는 자’다.

주인공은 소설을 쓰고 싶은 심리상담가 시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야기에 중독된 자다. 그의 의뢰인인 신인 배우 마고는 연인 이고르와의 복잡한 관계를 털어놓고, 시빌은 그의 삶에 점차 끌려들어가다 선을 넘게 된다. 역시 배우이나 마고와는 달리 스타의 위치에 있는 이고르. 그는 파트너 미카와의 합의 없이 마고와 몰래 만나고, 심지어는 그에게 집착하며 통제하려 드는 남자다. 제멋대로 굴고 책임은 피한다. ‘그래도 괜찮은’ 지위에 있는, ‘큰 목소리’를 가진 자여서다. 그러나 ‘<시빌>은’ 그에게 목소리나 관심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 여성들을 통해 이야기되고, 바라보아지고, 원해지게 만든다. 사건의 중심에 있으나 작품의 핵심에서는 배제되어 있다. 딱히 입체성도 없다. 한창 서사를 따라가는 중엔 위협과 끌림을 동시에 느끼게 되기도 하나, 돌이켜 보면 시빌과 마고의 욕망과 관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나 ‘갈등’의 기능을 할 뿐이다. 이고르는 빌런조차 아니다.

가스파르 울리엘이 이제껏 쌓아온 역할과는 사뭇 다른, ‘배우’지만 ‘배우 가스파르 울리엘’과는 가장 멀리 있을 법한 인물이었다. 팬으로서 그 유일한 분위기의 사용처로는 좀 아깝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 배우들은 늘상 겪었던 일일 테니... 그리하여 결국 쥐스틴 트리에가 그를 다룬 방식에 수긍했다. 사랑할 수 없는 인물인 이고르를 연기하는 가스파르 울리엘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가 기꺼이 흥미롭지 않은 역할을 맡음으로서, 어떻게 화면의 중심을 두 여성에게 건네었는가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자주 등장한다고 느꼈다면 기분 탓은 아니다. 이 배우에게는, 자꾸 써도 아깝지 않은 말이다.

 

5. <안녕, 소중한 사람>(2022) ‘마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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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트랑 보넬로의 실험영화 <코마>와 <문나이트> 속 가스파르 울리엘의 짧은 특별출연을 보며 괜히 더 속상해한 팬이라면, <안녕, 소중한 사람>의 존재에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지도 모른다. 희귀 질환에 걸린 엘렌이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택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에밀리 아테프와 비키 크립스의 두 번째 합작이다. 가스파르 울리엘은 엘렌의 연인 마티유 역으로 함께했다. 느긋하고 편안하게 중심을 잡는 와중 섬세한 결과 자유로운 표정을 보여 주는 비키 크립스, 끊임없이 다른 진폭으로 고요하게 흔들리며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는 편인 가스파르 울리엘. 그들의 호흡과 케미는 특별했다.

공감의 정도와는 별개로, 엘렌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와 함께 마티유에게 상처 받기 쉽다. 마티유는 엘렌이 폐 이식에 관해 주저하거나,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거나, 여생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기 전에 성급하게 반대하고 설득을 시도한다. 연인이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클럽에서 친구에게 털어놓았던 말들이 아마도 그의 본심에 가장 가까울 테다. ‘엘렌이 아직 여기 있는데 계속 보고 싶고, 그리운’ 상태. 엘렌도 마티유도, ‘엘렌이 죽어가는’ 상황은 처음 겪는다. 이들은 변화를 각자 다른 리듬으로 받아들이고, 마티유는 엘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너무 큰 에너지를 써버린 나머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에 자꾸 실패한다. 그러나 끝에는, 엘렌의 선택을 존중하게 된다.

노르웨이에서 나는 비로소 ‘죽어가는 엘렌’이 아닌 ‘엘렌’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마티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내내 긴장해 있다 자주 울컥하며 날을 세우고 심지어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남자, 그건 ‘아픈 연인을 잃을까 불안한 마티유’였다. 그렇다면, ‘마티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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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언어적 요소가 전달하는 것이 더 깊은 작품이었고, 연기도 그랬다. 공포에서 비롯된 서투르고 날카로운 대사는 내가 마티유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의 진심은 주로 몸짓 언어에서 감지되었다. 떨리는 눈빛, 조심스러운 손길에 입이 다 하지 못한 말이 충분히 담겨 있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장면이 오두막 베드신이다. 마티유는 엘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가 최대한 편히 숨 쉴 수 있도록 매 순간 몸을 섬세하게 컨트롤한다. 그들은 엘렌의 숨이 가빠져도 낙담하거나 그만두지 않고, 둘만의 리듬으로 천천히 사랑을 나눈다. 단순히 디렉팅에 따르는 것만으로 나왔을 리 없는 가스파르 울리엘의 신중한 호흡, 부드러운 움직임, 사랑이 눈물처럼 고여 맺힌 눈동자.

(바질과는 다른 의미로)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인물처럼 다가오다가도, 그 그윽한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으면-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영화 밖으로 튕겨져 나와 관객이 아닌 가스파르 울리엘의 팬이 된 채, 그와, 존재하지 않을 그의 차기작을 애도했다.

 

참고 기사
Miriam Bale, <Indiewire>(2014.12.16) - 기사 링크

 

Writer

제 주제도 모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해 쓴다. ‘안 쓰지 못해 쓴다’고 버릇처럼 말한다. 픽션에 과몰입하고 듣던 음악을 또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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