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적은 없지만, 후대 페미니스트뿐 아니라 미지의 길을 가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유명 화가들의 모델에서 화가로 변신한 수잔 발라동이 그러한 주인공 중 하나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새로운 시대를 이끈 그들의 삶이 오늘날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글과 그림을 넘나드는 파격적인 행보, 나혜석

나혜석(1896~1948), <신여성 도착하다>전 도록 촬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한 <이건희 컬렉션> 전시에 나혜석의 작품 ‘화령전 작약’이 포함되어 관람객과 만났다. 생전 300여 점을 제작했다고 전해지지만, 작업실 화재와 말년의 불안정한 생활로 현존하는 작품이 10여 점 내외인 만큼 흔치 않은 기회였다. 나혜석의 작품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 집중한 콘텐츠도 등장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 시대를 앞서간 모던 걸로 그 일생을 조명한 것이다. 이를 통해 역사책 속 설명과 작품의 나열로 기록된 인물이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어 입체적인 영감을 주기도 했다.

‘화영전 작약’(1930년대 추정)
‘무희’(1927~1928)

1896년, 수원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데뷔했다. 아들딸 구분 없이 공부할 기회를 제공한 아버지 덕에 일본에서 서양화를 전공할 수 있었고, 재능과 노력을 겸비해 미술 전람회에서 여러 번 입상했다. 그림 외에도 단편소설 ‘경희’를 시작으로 ‘어머니가 된 감상기’, ‘이혼고백장’ 등 반발이 예고된 글을 꾸준히 발표하기도 한다. 결혼 당시 건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줄 것”라는 조건은 파격적이었고, 전통적인 모성애에 반하는 “아이는 엄마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는 구절은 작가의 명성을 해치고 개인의 삶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법했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여성으로서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는 이런 과격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나혜석의 작품에는 최선을 다해 꿈을 좇는 것뿐 아니라 혼란한 시대 속에서 신념과 의미를 고민한 흔적이 묻어 있다.

‘스페인 항구’(1928)
자화상(1928년 추정)

김우영과 한 결혼과 이혼 모두 범상치 않은 과정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최린과의 부적절한 관계와 정조 유린 소송을 계기로 나혜석은 사회의 외면을 받게 된다. 그림은 팔리지 않고, 생활은 궁핍해만 갔다. 자식과의 만남도 좌절되면서 삶은 한없이 하향곡선에 놓인다. 그런데도 놓지 않은 한 가지가 바로 붓이었다. 초기 빼곡한 묘사로 채운 풍경화는 파리 체류 시절 야수파와 후기 인상주의 사조를 흡수하면서 독특한 색을 담은 과감한 터치로 변화했다. 작가의 삶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다양한 쟁점을 남겼지만, 근대 여성 예술가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험한 용기만은 오래 회자되고 박수받을 만하다.

 

아무도 보지 못한 재능을 스스로 발굴하다, 수잔 발라동

수잔 발라동(1865~1938)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은 원래 화가들의 뮤즈였다. 1865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10대 시절부터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툴루즈 로트렉같은 유명 작가들의 모델로 활동하면서 미술계와 접점을 만들 수 있었다. 모델 시절 여러 화가의 제작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독학한 결실로 30대에 예술가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바로 평단의 환영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때는 19세기 말 무렵, 여전히 여성 화가의 활약은 드물었다. 게다가 미화를 제거한 일상 속 여성을 담은 누드화, 여성 작가가 최초로 발표한 남성 누드화 등 전무후무한 행보로 수잔 발라동은 모난 돌 같은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Nude Sitting on a Sofa’(1916)
Family Portrait(1912)

수잔 발라동의 복잡한 애정사 역시 색안경을 쓰고 그의 작업을 보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모델로 활동하던 18살에 아들인 모리스를 낳고, 31살에 폴 무시스라는 은행가 출신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아들의 친구인 앙드레 우터와 사랑에 빠지면서 이혼과 재혼을 결심하게 된다. 이런 치정 드라마는 오직 남성에게만 용인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들인 모리스 위트릴로, 두 번째 남편 앙드레 우터와 함께 셋은 주변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수잔 발라동 주위에 항상 비판과 멸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툴루즈 로트렉은 그림의 대상으로 소비되기보단 그림을 생산하는 주체가 되고 싶었던 그의 예술을 향한 열정과 재능을 알아보았고, 드가는 죽기 전까지 그와 가까운 친구 사이를 유지하며 에칭 프린팅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Study of a Cat’(1918)
Self-Portrait(1927)

정식으로 받지 못한 미술 교육은 작가의 약점으로 시작해 강점으로 빛났다. 고정 관념과 전통 기법을 답습하기보다는 관찰에 기반해 과감한 터치로 그린 작품들은 그만의 시그니처가 되었고 생생한 색채와 화려한 패턴은 서서히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남성 화가와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여체, 이전에는 그림 소재가 되지 못했던 정물과 동물의 등장으로 유일무이한 작품 세계가 펼쳐졌다. 1920년대 초에는 그림으로 충분한 수입뿐 아니라 예술가로서 명성도 거머쥐었다. ‘씩씩하고 남성적인 선으로 여성 안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에너지를 방출했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여성이었기 때문에 더 혹독한 시작이었지만, 끊임없는 작업으로 자기 증명을 해냈고 오늘날 페미니즘의 태동기와 더불어 주목받는 작가로 등극했다. 그의 개인전 <Suzanne Valadon: Model, Painter, Rebel>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반스 파운데이션 미술관을 거쳐 현재는 코펜하겐의 글립토테크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Writer

넓고 깊게 이야기를 담고 싶은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