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 사랑 다음으로 많이 다뤄진 주제는 고독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다수 고전은 타인의 영향 없이 진정한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좇고 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농부들을 보며 사색에 잠긴 ‘안나 카레니나’를 떠올려보라. 고독은 인물의 정신과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로써 오롯하다. 고독을 끌어안고 고독에 저항하며 몸을 뒤척일 때 비로소 가뭇해진 감정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울 때 스탠드를 켜고 소설을 편다. 기이한 아늑함과 예측 불가한 폭력성, 쉼 없는 감정 기복이 고스란한 이야기에 빠져든다. 오늘은 외로움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도시의 민얼굴을 그려낸 작품들을 소개한다.

* 줄거리 스포일러가 다소 있습니다.

 

<태연한 인생>(2012)

은희경 장편 소설 <태연한 인생>의 화자 ‘요셉’은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가다. 매일 출근하듯 동네 핸드드립 전문점을 찾아 노트북을 편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허기지면 샌드위치 따위로 끼니를 때운다. 요셉은 오늘도 오전 내내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가 카페에 앉고서야 기운을 차렸다. 그는 요즘 뭔가를 써내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카페에서 무참한 표정으로 모니터만 바라본다. 얼굴을 비비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공간이다. 요셉은 이런 열광적인 무관심에 마음이 놓인다. 은희경은 이처럼 작정하고 카페를 본거지로 삼아 요셉에게 그녀의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심어놓는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요셉의 삶은 흘러갔다. 요셉은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p.265)

요셉은 글이 풀리지 않아 카페 통유리를 응시한다. 창밖은 무구한데 정신은 산란하다. 도통 집중을 못 해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가 돌아간다. 카페는 고독한 사람들의 집결지다. 곳곳에서 저마다 각자의 사정에 열중한 이들이 보인다. 그는 몸을 의자에 파묻고 날 선 생각에 젖어든다. 자신의 실패를 비웃는 문단의 얼치기들이 떠오른다. 죽이는 걸 하나 써내고 만다.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리라. 요셉은 막 우산을 털며 카페 문을 연 미녀를 오랫동안 쳐다본다. 그녀를 기틀 삼아 뭔가를 적어나간다. 잘 쓰는가 싶더니 어느새 백스페이스를 연속으로 때린다. 글자가 지워지면 다시 무책임한 공백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새를 못 참고 깜빡이는 커서가 요셉을 옥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문장을 두고 볼 순 없으니까. 요셉은 슬슬 주인 눈치가 보여 근처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기려고 한다. 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몇 번을 못 옮길까?

요셉은 새로 옮긴 카페에서 오래전 연인 ‘류’를 떠올린다. 권태와 흥분, 체념과 극적인 연출 효과를 두루 갖춘 류의 인생은 통속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통속적인 삶을 회고하며 뭔가 써보려고 하는 이가 요셉이다. 그는 참신하고 독창적인 글을 쓰고 싶지만 늘 미끄러진다. 요셉은 류의 삶이 자신에게 남긴 매혹에 저항할 수 없다. 늘 새로운 이야기에 목을 매면서도 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충동적이며 순수한 의지를 휘감은 그녀를 통해 요셉은 통속의 전희를 맛본다. 류라는 존재는 패턴 안에 기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요셉의 작가적인 운명을 예견하고 있던 셈이다. 우리 모두 각자 의지해야 할 통속이 있고, 그 굴레 안에서야 비로써 예술도 빛을 발한다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작위와 형식이 없이 바로 설 수 있는 이야기란 없듯이, 은희경은 통속을 멸시하기보단 오히려 패턴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편의점 인간>(2016)

선천적으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채로 자라온 ‘게이코’는 모든 게 매뉴얼 하에 이루어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며 산다. 학교나 사회에서 겉돌며 커 온 게이코에게 편의점은 유일하게 마음을 안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게이코가 ‘자기다움’으로 내세우는 편의점 인생을 타인들은 덜 떨어진 것으로 쉽게 판단한다는 점이다.

편의점이라는 장소는 시대의 자화상이 된 지 오래다. 한국 문학에 담긴 편의점의 맥락은 고달픔과 빈곤, 막막함을 표상한다. ‘삼각김밥’, ‘컵라면’ 같은 편의점 음식들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아끼기 위해 끼니를 때운다는 인식이 크다. <편의점 사회학>이라는 사회학 책을 쓴 전상인은 말한다. “지금 당장 주위를 돌아봐라. 편의점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면서 비닐봉지 한 개 분 정도의 내일을 준비하는 동료나 친구, 이웃이나 친척이 얼마나 많은지를." 그런 의미에서 <편의점 인간>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에 주목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타자들이 정상이라고 정의하는 삶의 척도는 단순하고 폭력적이다.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서 결혼하고 애 낳고 승진하고 내 집을 사서 연금에 가입하여 노후를 대비하는 일률적인 틀이다. 이에 못 미치거나 벗어나면 낙오자로 취급하고 정상성을 강요하는 발언이 이어진다. 개별성을 부정하는 시선은 섣부른 말의 폭력으로 변질하여 게이코를 침범하기 시작한다. 게이코는 주위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사람 구실을 흉내 내지만, 아무도 그녀를 정상 범주에 넣어주지 않아 배척된다.

소설은 부적응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시작하지만, 질문의 화살을 돌려세움으로써 독자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 제대로 선택하며 사는 걸까? 요즘 서점에는 인문서로 속인 자기계발서들이 잘 팔린다. 생존의 기술을 취득하는 동시에 교양인으로서 취향껏 살아가는 삶을 이뤄내려는 독자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현실은 책 한 권으로 정리할 만큼 녹록지가 않다. 말처럼 다림질하듯 곧게 펴지지 않는다. <편의점 인생>은 게이코라는 경계인을 통해 간섭으로 이루어진 집단보다는 고요한 고독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작품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존중해주는 사람만이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일상의 모든 일에 의구심을 갖는 게이코의 생각은 어리숙해 보이지만, 현실의 독자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체제 밖을 비집고 들어가는 작품이다. 번지르르한 대도시가 만든 체제라는 것이 얼마나 허울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지 폭로한다.

 

<나의 눈부신 친구>(2012)

<나폴리 4부작>은 나폴리 빈민 지역 출신 레누와 릴라가 1950년부터 대략 60년간 겪은 이야기다. 이탈리아의 굴곡진 현대사와 나폴리라는 지역성이 포개진 장대한 드라마다. 두 여성의 평생을 뒤쫓으며 ‘레누’가 작가로 성장하여 ‘릴라’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써낸다는 액자 형식의 소설이다.

<나폴리 4부작>을 지탱하는 정서적인 핵심은 '열등감'이다. 소설의 화자인 레누가 어려서부터 특출 났던 릴라를 지켜보며 느끼는 사랑과 질투의 감정이 소설의 근간을 이룬다. 릴라는 어려서부터 레누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소설을 쓸 만큼 예술적인 재능이 컸다. 사춘기 이후로는 누구보다 아름다워서 온 동네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에 반해 레누는 지독한 노력파에다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밖에도 잘 못 나가는 처지였다. 레누는 늘 릴라의 몇 걸음 뒤에서 릴라를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레누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싸움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릴라가 레누의 첫사랑과 사랑에 빠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도 솔직할 수 없는 감정들은 그녀가 방에 혼자 있을 때 혹독한 고독감으로 돌아온다.

좁혀질 것 같지 않았던 두 사람의 격차는 레누가 대학을 가면서 사라진다. 레누는 릴라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작가가 되는 것이라 믿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학계의 인정을 받기 위한 길고 긴 혼자만의 싸움이 시작된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레누가 정식으로 등단하면서 관계는 전복된다. 레누는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만용으로 늘 패배하기만 했던 제 삶을 승리자의 회고로 둔갑시킨다.

레누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책을 읽는다. 여행을 가서도, 해변에서도 심지어 혼자 방에 있을 때도 인정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지적인 허영을 메우려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용을 쓴다. 대문호들의 자서전을 읽고 그들과 비슷한 음식을 먹고 그들의 사고를 흉내 낸다. 남들보다 더 많이 읽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레누를 추동한다. 처음에는 릴라에 버금가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열망이 계급적 욕망으로 번져나간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 자본이야말로 계급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질이다. 미적 취향은 단순히 돈만으로는 거머쥘 수 없는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조건과 같다. 레누는 늘 열등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탈출구로 대중의 인정을 받는 작가의 길을 택했다. 고독한 시간을 버텨낸 끝에 누구나 인정할만한 소양을 일궈냈다. 시끄러운 세상에 말을 아끼다가 몇 번을 고쳐낸 문장으로 목소리는 내는 고독한 작가의 전형이다.

 

메인 이미지 영화 <한강에게> (To My River, 2018) 스틸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