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일제강점기를 헤치고 광복을 맞이한 우리나라 역사가 남긴 이 국경일이야말로 우리나라 국민이 기려야 할 중요한 역사적 소산이다. 그러나 삼일절은 종종 다른 의미를 갖기도 한다. 태극기를 달고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한 날이 아니라, 그저 하루 놀러 갈 수 있는 ‘빨간 날’ 같은 것으로.

그런 삼일절이면 빼놓지 않고 태극기를 내걸던 곳이 바로 ‘적산가옥(敵産家屋)’이다. 말 그대로 ‘적이 만든 집’을 뜻하는 적산가옥은 해방 후 우리나라에 남겨진 일본식 가옥을 일컫는다. 세월이 지나며 자연스레 우리나라 국민이 소유하게 된 적국의 건물들은 뼈아픈 역사를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미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땐 애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큼직하게 내걸어 오해를 풀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적산가옥의 처지는 조금 다르다. 역사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또 다른 유산인 ‘네거티브헤리티지(Negative Heritage)’로, 그리고 이국적인 모습을 자랑하는 옛 건축양식의 하나로서 의미를 지니게 됐다. 그리하여 경성에서 서울까지 제자리를 지켜낸 적의 건물들은 이제 당당히 사람들의 발길을 모은다. 서울에서 다양한 얼굴로 존재하는 적산가옥을 들여다보자.

 

일본식 가옥에서 만난 정겨운 맛집

카페&펍 아나키브로스

우리나라에서 적산가옥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전라북도 군산이고, 서울에서는 후암동이 그렇다. 일제강점기 한국은행 기숙사가 있던 용산구 후암동 일대는 일본인들의 주된 거주지였고 자연스레 일본식 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특히 개발의 풍파를 늦게 맞이한 후암동의 골목 사이에는 원래 형태를 유지한 적산가옥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적산가옥이 ‘아나키브로스’다. 작년 말 문을 연 아나키브로스는 다양한 커피류와 맥주를 판매하는 카페 겸 펍으로, 오래된 적산가옥을 개조해 만든 곳이다. 경사가 가파른 지붕 위에 얹힌 붉은색 기와가 옛 적산가옥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새로 칠한 듯 하얗고 깔끔한 외관을 보면 얼핏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로도 보이지만, 목조로 된 옛 틀과 낡고 거친 벽면을 드러낸 내부가 단번에 적산가옥임을 증명한다. 곳곳에 꾸며진 아담한 다다미방도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적산가옥만의 풍경이다. 한옥과는 또 다른 운치를 주는 일본식 가옥에서 다양한 국적의 커피와 맥주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갈월동 52-4
전화 070-4069-6356
영업시간 매일 11:00~24:00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anarchybros_coffee

 

서울에 위치한 일본식 가옥에서의 하룻밤

게스트하우스 눅서울

일제강점기 시절의 옛 주거공간은 이제 서울의 문화를 누리려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다. 80년 된 적산가옥이자 후암동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 ‘눅서울’에도 젊은 발걸음이 모여든다. 2015년 서울시에서 주최한 '아름다운 건물 찾기 공모전'에서 시민들이 뽑은 아름다운 건물로 선정된 적도 있다. 그러나 이곳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지 ‘아름다운’ 건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간의 역사적 가치를 존중하는 건축가들의 손길이 더해진 이 적산가옥이 갖춘 미덕은 ‘온고지신(溫故知新)’에 있다. 오랜 세월을 버텨낸 목조 주택의 기둥과 구조, 그 안에 담긴 옛 생활양식을 이해하고 겸손하게 재해석한 덕이다. 눅서울에서는 오래된 것이 주는 아늑함과 새로운 것이 주는 편리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면, 눅서울의 디자인 디렉터이기도 한 이호영 대표를 만나 공간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요청해보자. 열 평 남짓한 아담한 3층짜리 적산가옥이 지닌 깊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439-3
전화 010-9366-2408
영업시간 매일 14:00~23:00 
홈페이지 www.nookseoul.com

 

역사와 나란히 자리잡은 현대예술

복합예술공간 보안여관

한옥의 전경을 간직하고 있는 종로에서도 서촌은 한옥만큼이나 과거에 남겨진 일본식 건물을 발견하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서촌 통의동의 명소, ‘보안여관’이야말로 아주 오래된 적산가옥이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보안여관은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개량을 겪어 지금의 서양식 외양을 띤 건물이 됐지만, 과거의 틀을 유지한 내부는 변하지 않는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거친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일본식 창과 천장의 목조 구조는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어지는 험난한 역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된 공간을 지탱한 것은 그대로 보전한 서까래와 골격만이 아니다. 과거 서정주, 김동리 같은 한국 문학가들의 거처로써 가히 예술가들의 공간을 자처한 보안여관은 현재 새로운 복합예술공간으로 변모해 과거의 실체와 정체성을 오롯이 보존하고 있다. 이제 우리 것이 된 ‘적의 집’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빼앗겼던 개인의 평안과 안녕이라는 보안(保安)의 회복”을 위한 우리 시대 예술을 만끽할 수 있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2-1
전화 02-720-8409
영업시간 월 휴무
홈페이지 www.boan1942.com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boan1942

 

과거와 현대 건축의 공존

갤러리 온그라운드

통의동 바로 윗동네 창성동에는 아주 특이한 적산가옥, ‘온그라운드’가 숨어있다. 창성동 길가에서 깔끔한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이곳은 얼핏 보기에 세련된 현대식 갤러리지만, 자그마치 백 년 된 적산가옥을 개조해 만든 곳이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매장 안쪽으로 들어가 보자. 적산가옥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목재 골조 사이로 빛이 들어와 독특한 무늬가 가득 차는 공간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때 남겨져 방치된 적산가옥 중 하나였던 이곳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숨겨진 공간이었지만, 건축가 조병수 소장에 의해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했다. 옛 일본식 가옥의 틀 위에 신식 건축 기법들을 조합해 보존해 놓은 공간은 그 자체로 조형미를 뽐낸다. 특히 건축 전문 갤러리인 이곳에 온갖 실험적인 전시물들이 놓이면 가히 과거에서부터 현대까지의 건축이 한 번에 펼쳐진다. 새로운 이미지를 빠르게 공유하려는 젊은 세대들에게 이만큼 신선한 풍경이 있을까. 마땅히 백 년 된 적산가옥으로 가야 할 이유다.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122-12
전화 02-720-8260
영업시간 10:00~19:00, 일월 휴무
홈페이지 on-ground.com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ongroundgallery

 

(메인이미지= 보안여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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