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색채 연구소 팬톤(Pantone)이 지난해 리빙 코랄에 이어 2020년 ‘올해의 색’을 발표했다. ‘시대를 초월한, 단아하고 영원한 푸른 빛깔’ 클래식 블루(Calssic Blue)다. 2020년은 2010년대 문턱을 지나 2020년대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뜻깊다. 팬톤은 클래식 블루가 지닌 진한 푸른 빛깔이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필요한 안정감을 가져다주리라 보았다.

해질 무렵 어둑한 하늘과 깊숙한 바다 해저에 깔린 농롱한 퍼런빛은 사람에게 어떤 공명을 일으킬까? 누군가는 생각을 확장하는 무한성을, 다른 혹자는 이 색채를 통해 ‘이 다음에는 훨씬 더 잘해낼 거야’ 다짐하는 내면의 힘을 느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어떨까? 클래식 블루 색감을 활용한 세 영화가 있다.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유전(Hereditary)>, <세 가지 색: 블루(Three Colors: Blue)>다. 이 작품들 속에 클래식 블루가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랫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카우보이의 노래> 중 여섯 번째 에피소드 ‘시체’

코언 형제(에단 코언·조엘 코언)가 넷플릭스와 함께한 첫 작품. 19세기 말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 6편이 선집처럼 묶였다. 낡은 소설책이 펼쳐지면서 영화가 시작하는데, 실제로 코언 형제는 20년 남짓 넘은 시간 동안 간직해둔 이 이야기들을 집필한 순서대로 배치했다. 6편의 에피소드는 서부극이라는 공통된 형식 안에서 로맨스, 코미디, 액션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그중 마지막 에피소드 ‘시체’는 포트모건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탄 승객 세 명과 현상금 사냥꾼들의 대화를 들려준다.

시공의 경계

평생 마주칠 일 없을 것 같은 승객들이 긴 수다를 떨고 있다.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기준’을 놓고 프랑스인과 교육자가 옥신각신하다 사고가 일어날 뻔하지만 마부는 멈춘 적 없는 시간처럼 마차를 세우지 않는다. 마차 창밖 너머 하늘빛이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자 승객들과 마주하던 정체불명의 아일랜드인이 포크송을 부른다. 죽음에 관한 노래에 승객들은 잠잠해진다. 아일랜드인과 자신을 현상금 사냥꾼이라고 소개한 다른 남자는 오싹한 이야기로 수배범들을 홀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승객들에게 똑같이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 이야기를 전해주는 남자. 다섯 사람을 둘러싼 클래식 블루는 이 순간을 죽음과 생이 교차하는 신비로운 시공간으로 만든다. 어쩌면 두 사냥꾼은 관객을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 코언 형제였을지도 모른다.

 

<유전>

<미드소마>로 한국 팬들에게 신선한 공포감을 선사한 아리 애스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유전>. 감독은 “장르가 자유자재로 뒤섞여 있다”는 이유로 한국영화를 사랑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의 취향처럼 <유전>은 오컬트 영화이자 가족 서사와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다룬, 단일한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영화다. 주인공 ‘애니’는 자손을 파이몬 왕에게 바치고자 했던 부모의 숙명을 거스르려고 하지만 결국 딸 ‘찰리’를 잃고 아들 ‘피터’는 파이몬 왕에게 빙의된다. 영화 속 색채감, 미술, 장식 등 <유전>의 시각적 요소를 총괄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그레이스 윤은 한인이자 신진 디자이너다.

상처를 들추다

애니는 모친의 숭배로 인해 파이돈 왕과 얽혀버린 두 자식을 지키고자 몸부림친다. 하지만 모친이 작고한 이후 집안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일들을 목도하며 통제력에 대한 믿음을 잃어간다. 가족을 둘러싼 공포가 점점 커지자 애써 피해왔던 가족간의 불화가 드러난다. 이때 깊은 바다 해저를 닮은 피터의 방은 애증으로 범벅된 모자 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몽유병이었던 애니는 잠든 피터를 두고 시너를 뒤집어쓴 채 불을 붙일 뻔했는데, 이후 피터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지독하게 가라앉은 퍼런빛 속에서 애니는 내밀한 고백으로 또 한번 피터에게 상처를 준다. “난 널 낳을 생각이 없었어.”

 

<세 가지 색: 블루>

폴란드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3연작 중 첫번째 작품으로 5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블루>를 포함해 <화이트> <레드> 세 가지 색 시리즈로 주인공들의 무너진 일상을 경유해 자유와 평등, 박애를 이야기한다. <블루>의 테마는 ‘자유’다. 하루아침에 남편과 딸을 사고로 잃은 주인공 줄리가 상실을 딛고 온전한 개인으로서 미래를 꾸려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3대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랑스 최고의 배우이자 최근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 등장한 줄리엣 비노슈가 줄리를 연기했다.

과거이자 새로운 미래

영화 제목처럼 ‘블루’는 영화 메시지를 강화하는 요소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파란색 요소를 배치한 미장센을 선보인다. 줄리가 가족과 관련된 물건 중 유일하게 남겨둔 딸의 파란 샹들리에는 과거를 상기시키는 유일한 매개체다. 홀로 살게 된 거주지에서 반복적으로 줄리가 찾아가는 창창한 수영장은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피난처다. 줄리에게 ‘블루’는 극복해야 할 지난 시간이자 새로 맞이해야 할 미래를 동시에 함축한다.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는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줄리는 생전 남편이 외도했다는 날카로운 진실도 마주하지만 이내 생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되찾는다.

 

Writer

망원동에서 사온 김치만두, 아래서 올려다본 나무, 깔깔대는 웃음, 속으로 삼키는 울음, 야한 농담, 신기방기 일화, 사람 냄새 나는 영화, 땀내 나는 연극, 종이 아깝지 않은 책,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