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올해 초 파리는 혼돈에 휩싸여 있었다. 파리 중심부 애비뉴 클레베르는 깨진 창문이 즐비했고, 에투알 개선문은 스프레이 낙서로 얼룩졌다. 시내 곳곳에선 시위대가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상점과 레스토랑을 약탈했다. 그 결과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전 세계 언론은 이른바 ‘노란 조끼’ 시위대라 불리는 세력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거센 분노는 마치 1968년 5월 혁명을 재현이라도 하듯 프랑스 전역으로 번져갔다. 대다수 언론은 점점 더 심해지는 빈부격차와 범죄 증가에 따른 삶의 질 하락을 원인으로 꼽는다. 프랑스는 과거부터 혁명에 굶주린 나라였다. 일류 작가들은 그중에서도 대도시 파리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어두운 현실을 적었고, 시민은 문학을 통해 새로운 변혁을 꿈꿔왔다. 다음 소개할 두 권의 소설은 평범한 한 개인을 좇아 우리가 보지 못했던 파리의 이면을 그린 작품이다.

 

<달콤한 노래>(2016)

프랑스 신예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의 소설 <달콤한 노래>의 시작은 이렇다.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알 수 없는 화자가 딸의 죽음을 선언한다. 보모가 유력한 용의자로 추정되지만, 그는 살해 직후 자살했다. 맞벌이하는 부부는 현장에 뒤늦게 도착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피해자 부부는 안정된 삶을 살았다.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 두 아이는 부부의 화목을 증명이라도 하듯 행복해 보였다. 피의자인 보모는 부부의 배려에 가족처럼 지냈던 것처럼 보인다. 보모의 근면함과 꼼꼼함에 반해 가족여행까지 같이 다녀왔다. 보모는 일을 잘하는 걸 넘어 우아하고 정갈한 사람이기에 부부는 큰 신뢰를 보냈다. 그는 도대체 왜 아이를 죽였을까.

난 이 소설 도입부를 좋아한다. 모든 범죄소설 작가가 핵심으로 생각하는 ‘후더닛’(Whodunit)을 쉽사리 포기한다. 한 여자가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선언 후에 나올 얘기란 과연 무엇일까. 작가는 이제부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긴 시간을 들여 설명할 거라고 귀띔하는 셈이다. 이 끔찍한 사연을 들을 자신이 없으면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타이른다. 그 누구도 아이가 죽은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없이는 읽기 어렵다.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에서는 말한다. 한 보모가 신변을 비관해 홧김에 아이를 죽였다고. 매스미디어는 살인의 처참함을 주말 드라마처럼 보도한다. 피해자를 동정하는 척하며 자신도 믿지 않는 추정을 덧붙인다.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언론 보도나 세간의 추측과는 정반대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도시에 담긴 복잡한 결을 하나씩 풀어내며 이 사건이 우리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음을 밝혀낸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마그레브 지역 모로코 출신 프랑스인이다. 불어로 글을 쓰지만, 표지 사진엔 북아프리카 출신 특유의 외모가 드러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엄마’가 모로코계 성공한 법률가 ‘미리암’이다. 잘생긴 백인 남편과 결혼한 그는 경력 단절로 괴로워한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출산으로 인한 휴직은 여성에게 치명적이다. 사회 지위나 경제 능력으로나 미리암이 남편보다 더 유능해 보이지만, 출산을 이유로 그는 경력 단절을 감내한다. 미리암은 자신이 택한 양육이 진정 좋은 선택이었다고 자신할 수 없다. 그러던 중 미리암에게 직장에 복귀할 좋은 기회가 오고, 어렵사리 유능한 보모를 고용하게 된다. 부부는 파리 최고급 아파트가 즐비한 중심가에 살지만, 보모는 파리 외곽 10구 낡은 원룸에 거주한다. 보모는 생활고에 집을 빼앗기고 딸의 가출로 혼자가 된 사람이다. 외모는 전형적인 프랑스 백인에 가깝지만 구제할 길이 없는 처지다.

소설은 인종 차별, 프랑스 사회의 빈부격차, 도시에 뿌리내린 계급적 박탈감, 무차별한 성차별, 우발적인 폭력, 빈곤층의 소외된 삶을 다룬다. 프랑스라는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문명국 안에 자리한 비참한 현실을 비춘다. 누군가 이 소설을 싫어한다면 범죄 소설 특유의 긴장감이 없다는 배신감에 있으리라. 소설은 사회 의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플롯을 지탱하며, 끝내 다 읽어도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한 개인이 누군가를 살해할 때까지 곁에 선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들도 우리처럼 대도시의 음습한 문제를 외면한 채 달콤한 노래를 부른다.

 

<나쁜 소녀의 짓궂음>(2006)

중남미 문학의 거장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그린 한 청년의 삶은 다단하다. 페루에서 태어나 혈혈단신 파리에 정착한 ‘리카르도’는 전문 통역사가 되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그뿐만 아니라 돈이 안 되는 러시아 문학 번역도 공부하며 눅진 꿈도 이어나간다. 파리 시내를 오가며 온갖 사람을 만나며 기회를 붙잡으려는 리카르도의 분투는 서울에서 자취하는 우리네 청년과 다를 바 없다. 노력을 증명해 온전한 1인분을 쟁취해내는 과정은 연애보다 흥미롭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20세기 중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탓이다. 소설 초반부가 쿠바 혁명이 아직 전이되지 못한 남아메리카 페루공화국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면, 중반부부터는 요사가 그리는 세속에 찌든 파리에 관한 묘사가 일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요사스러운 파리 정취는 리카르도에겐 낭만 그 자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태계 하류에 머문 제 처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과정이 적나라하다. 이념 전쟁이 미처 끝나지 않던 시절, 뭐든 시도만 하면 한가닥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기회의 땅에서 리카르도는 보이지 않는 계급투쟁에 힘쓴다.

리카르도는 운이 좋은 녀석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녀석은 통역사가 되어 좋아하는 언어가 빼곡한 삶을 산다. 세간은 누추하고 급여는 볼품없지만 나름대로 전문직에 집도 있으니 다 괜찮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짝사랑했던 한 여인이 나타나면서 삽시간에 무너진다. 유혹의 소나타엔 우선 올라타고 봐야 한다는 신의 계시가 귓가에 맴돈 탓인지 녀석은 쉽사리 무너져버린다. 나쁜 소녀는 뭐든 시간이 좀 지나면 싫증을 내는 탓에 리카르도를 몇 번이나 잔인하게 차 버린다. 그때마다 그를 잡지 못한 애달픔에 리카르도는 자살 충동, 우울과 몽상, 자책과 낙담을 오간다. 하지만 먹고살기가 모든 걸 잊게 해 주는지 녀석은 퇴근 후에 러시아 문학을 읽고, 주말 아침이면 파리 시내 노천 테라스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점차 나아진다.

난 혼자 사는 리카르도의 일상을 상상한다. 아마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한 시리얼을 먹고 출근 준비를 시작할 것이다. 키가 멀쑥하게 커서 구부정한 자세로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매일 입는 흰 셔츠를 입는다. 짧은 머리는 대충 빗어 넘기고, 늘 들고 다니는 가방에 두꺼운 러시아 소설 한 권을 챙긴다. 불룩해진 가방엔 연필 몇 자루가 있고, 가끔 끄적이는 수첩도 하나 자리한다. 누가 봐도 남루한 행색을 한 리카르도는 직장을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탄다. 파리 역시 서울과 마찬가지로 출근길은 지옥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파리를 낭만적으로 그리려는 마음이 없다. 현실은 불법 이민, 강도, 빈부격차, 악명 높은 지하철 파업이 횡횡하는 회색 도시에 가깝다. 이는 리카르도가 평생 꿈꿔온 프렌치 드림의 괴멸과 맥을 같이한다. 욕망이 들끓던 소녀를 향한 집착도 사그라들어 생계만이 남은 도시 파리의 앙상한 뼈대가 드러난다. 파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갈등으로 신음하는 혁명 전야의 도시다. 파리 북부 생마르탱 운하 근처엔 트렌디한 레스토랑 주변으로 오갈 데 없는 불법 이민자가 몰려 난민촌을 이룬다. 젊은이들은 성공을 꿈꾸며 도시 외곽에 둥지를 틀지만, 그들에게 번쩍거리는 파리 시내는 멀기만 하다. 바르가스 요사는 한 사내의 절절한 사랑 이면에 대도시가 인간을 억누르는 광경을 포갠다.

리카로드의 지갑 속엔 나쁜 소녀의 사진이 한 장 있다.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몰래 찍어놓았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그를 한없이 기다리기보다는, 사진을 보며 그를 떠올리고 그가 누릴 일과를 그리는 데 익숙해졌다. 오늘은 뭘 먹었는지, 괜찮은 남자와 만나고 있는지 상상한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다홍색 원피스를 휘날리며 산책하는 나쁜소녀의 행복을 염원한다. 아니 도리질 치며 내가 없어 불행하길 바란다. 파리의 밤은 그렇게 외롭게 흩어진다.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