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남아> 스틸컷

미스 홍콩대회 출신이라는 타이틀로 손쉬운 데뷔를 했던 장만옥은 처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배우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도 당시를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없던 시절로 회고한다. 비평가들에게선 "눈을 동그랗게 뜬 리액션이 전부인 배우"라는 평가를 들었고, 주로 맡은 배역은 '꽃병'처럼 눈에 띄는 외모로 남자 주인공 곁을 보좌하는 배역들이었다. 그런 장만옥에게 왕가위는 말하자면 문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그를 <열혈남아> 속 '아화'로 만들기 위해 왕가위는 걸음걸이부터 손댔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배역 자체가 되어 걷는 연습은 장만옥을 점차 배우의 자장으로 이끌었다. <열혈남아>는 당대 홍콩영화계에 낯선, 거칠지만 매혹적인 이미지의 감각을 제공했고, 왕가위와 장만옥이 발견된 영화였다. 이 작품 이후 장만옥은 "연기란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내부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퍼올리는 작업"임을 알게 된다.

<화양연화> 스틸컷

영원한 홍콩 스타 장만옥. 우리에게 그는 목 끝까지 단정히 잠근 치파오의 관능, 다문 입술과 떨군 시선만으로 충분한 매혹의 상징과도 같았다. 스크린 속의 장만옥은 어디서나 통용되던 미의 전형을 허물고, 도드라진 광대뼈와 활기 없는 얼굴로 관객의 시선을 붙들었다. 왕가위와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이 합작한 감각적인 영상 위에서 장만옥의 얼굴은 드라마틱한 서정을 선사해왔다. <아비정전>의 발 없는 새 '아비'로부터 영원한 기다림을 선물 받은 여자 '수리진'. 다시 수리진은 그 정신적인 속편에 해당하는 <화양연화>에서 은유로서의 환생을 겪는다. 남편의 외도를 알지만 공허하고 무력한 응답밖에 할 수 없는 수리진으로의 환생. 왕가위 영화 속에서의 장만옥이 익숙한 관객들에게 장만옥과 수리진이 주는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그다지 없을지도 모른다. 왕가위의 뮤즈로 스크린의 화폭을 메우던 장만옥의 화양연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때를 추억하는 우리는 이렇게 필연적으로 왕가위의 저작들과 멀어질 수 없다.

<인재뉴약> 스틸컷

그러나 왕가위라는 유일한 작가로 배우 장만옥의 궤적을 그리기엔 어딘가 불충분하다. 관능과 매혹으로서의 장만옥은 그의 성취인 동시에 한계일 수 있다. 실제로 장만옥은 9년 간 영국에 거주한 채로 청소년기를 통과했고, 프랑스 감독과 4년 간의 결혼 생활을 했을 만큼 불어에도 능통했다. 사실 그에게 홍콩을 대표하는 여인상보다는 유럽인의 감수성, 코스모폴리탄적 자유분방함을 덧대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배우의 잠재성이 싹트던 시점, 혹은 단단해진 자의식으로 도전을 거듭하던 장만옥에게는 우리가 간과한 그의 탈여성적 주체로서의 모습이 존재했다. 두 명의 작가와 함께한 다른 영화에 대해 말하려 한다. 홍콩의 주목할만한 여성 영화 감독 관금붕, 전 남편이기도 한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그들과 함께한 네 편의 영화로 우리가 몰랐던 장만옥의 얼굴들을 살펴보자.

<인재뉴약> 스틸컷

뉴약(紐約)은 뉴욕(New York)의 한자표기이고, 인재뉴약은 뉴욕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뉴욕에 거주하는 세 명의 중화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중국 출신의 '조홍', 대만 출신의 '웅병', 홍콩 출신 '아교'의 이야기를 병치시킨다. 성공한 비즈니스맨 '토마스'와 결혼해 뉴욕에 온 조홍은 서양 남성의 가치관이 익숙한 남편의 은근한 무시 속에 수동적으로 존재한다. 연극배우인 웅병은 <맥베스>의 맥베스 부인 역에 도전하지만, 동양인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에 부딪혀 배역을 놓친다. 장만옥이 맡은 아교는 비교적 이 도시에 정착한 인물로 볼 수 있지만, 레즈비언 여자친구와 새로운 남성 사이에서 내적 혼란을 겪는다.

<완령옥> 스틸컷

'꽃병' 같은 역할을 하던 10대를 지나, 신여성을 대표하는 여성 배우로 반경을 넓혀간 중국 무성영화 시대의 전설적인 배우 완령옥. 그는 성공적인 커리어와 달리 불운한 인생을 보냈다. 과거에 연인이었던 장달민의 간섭으로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았고, 결국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25세의 나이에 스스로 자살을 택했다. 관금붕 감독은 <완령옥>을 그의 생애를 묘사하는 단순한 전기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완령옥의 삶의 단락들을 차근차근 곱씹는 배우와 감독의 대화가 사이마다 삽입돼, 조금 물러나 바라볼 것을 권한다. 완령옥을 연기한 장만옥 역시도 완령옥의 그림자를 좇는 카피캣이 되기를 과감히 포기하고, 도리어 존중을 담은 장만옥 자신으로 남는다. 이 영화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마 베프> 스틸컷

평론가 출신의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마 베프>를 통해, 프랑스에 발 디딘 홍콩 배우 장만옥을 비춘다. 그리고 쇠락해가는 시네마에 관한 모던한 고찰을 선보인다. 극중 누벨바그 시대 감독 르네 비달은 루이 푀이야드의 무성영화 <흡혈귀들>(1915)의 리메이크 작업을 위해 장만옥을 초청한다. 당대의 가치관과 윤리를 뛰어넘은 펄프 히어로 '이마 베프' 역할에 홍콩 배우를 소환한 것에 대해, 프랑스 영화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을 보인다. 르네 비달은 더하고 뺄 것 없이 완벽한 <흡혈귀들>을 새롭게 구현해야 한다는 압박과 함께, 변해버린 영화계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난항에 빠진다. 영화의 말미에 제시된 미완의 필름 시퀀스는 <이마 베프>의 하이라이트다. 무성영화 시대를 향한 존중과 마지막 누벨바그 작가에 남은 진취적인 에너지가 뒤섞인, 복합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클린> 스틸컷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장만옥은 <이마 베프>를 계기로 짧은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헤어진 뒤에도 함께 <클린>을 찍었다. <클린>의 장만옥은 아마도 그가 맡았던 역할 중 가장 거친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에밀리'(장만옥)와 록가수 '리'는 부부다. 마약 중독에 빠져 매일 위태로운 삶 위에 요동치던 두 사람. 어느 날 헤로인 과다로 리가 숨지고, 에밀리는 마약소지죄로 형을 살고 나온다. 자기 자신조차 돌보기 벅찬 에밀리에게도 어린 아들이 있지만 시부모는 아이를 그의 손에 넘기기를 거부한다. 미성숙한 어머니의 성장이라는 테마가 다소 뻔하게 다가올 법하지만, 장만옥의 자유로운 연기 변신을 볼 수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클린>은 그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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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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