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한국에서 여성 할당제가 법제화된 지 20년이 되는 해다. 그 시간 동안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은 소폭 올라 대략 17%로 집계됐다. 세계 평균에 크게 밑도는 수치다. 반면 남성 비율은 아직도 80% 이상을 차지한다. 국회의 성비가 대변하듯 법과 사회정치 분야는 오랫동안 올드보이들만의 무대였다. 남성 중심으로 돌아간 이 단단한 판에 균열이 필요하다.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국내외에서 법과 정치, 사회 분야에 진출해 활발히 활동하는 여성들이 아주 조금씩 늘고 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안보 전문가로, 저널리스트로, 정치 로비스트로 활약한 주인공을 그린 영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로 다크 서티>

'제로 다크 서티'는 오전 12시 30분을 일컫는 군사용어로, 하루 중 가장 어둡기 때문에 군사작전이 용이한 시간을 뜻한다. <허트 로커>로 여성 감독 최초로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캐서린 비글로우가 연출했다. 국방부와 CIA 관계자들의 증언을 참고해 미국 9.11테러 주범자 오사마 빈 라덴을 10년간 추적한 실화를 재구성했다. 영화 구상 당시 토라보라 지역에서 실패한 빈 라덴 암살 작전을 담고자 했으나, 촬영 직전이었던 2011년 미국이 빈 라덴 암살에 성공하면서 시나리오가 전면 수정됐다. 캐서린 비글로우와 제작자는 영화를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실제 빈 라덴 습격 작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또한 사건이 발생한 중동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스토리를 구성했다. 개봉 후 뉴욕 비평가협회의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을 받았다.

 

빈 라덴을 추적한 CIA요원 ‘마야’

<제로 다크 서티>의 주인공 ‘마야’(제시카 차스테인)는 ‘워싱턴의 킬러’라고 불리는 젊은 CIA 요원이다. “이런 문제를 맡기에 너무 어리지 않나?” 중동 블랙 사이트(CIA의 해외 비밀 감옥)으로 파견된 마야에 대한 남자 요원들의 걱정은 무용했다. 그는 유능하고 포기할 줄 모르는 현장 요원이자 테러 분석가다. 마야는 블랙 사이트에 수감된 알 카에다 조직원에게 ‘아부 아흐메드’라는 인물이 빈 라덴의 연락책이라는 말을 들은 후 아부 아흐메드가 중요 인물이란 걸 직감한다. 아부 아흐메드를 통해 빈 라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마야에게 평범한 일상이란 사치에 불과하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정보들을 분석하고 알 카에다 조직원들을 심문하고 빈 라덴 거처를 추적하느라 항상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눈은 충혈돼 있다.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은 “모든 캐릭터는 실존 인물에 기반했다”며, “빈 라덴의 은신처를 습격하던 날, 현장에 파견됐던 CIA 여성 요원”이 마야의 모델이 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미스 슬로운>

<제로 다크 서티> 주인공 제시카 차스테인이 주인공으로 출연했으며 <셰익스피어 인 러브>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존 매든이 연출했다. 미국 정치 로비스트의 세계와 그 안에서 펼쳐지는 긴박한 로비전쟁을 그렸다. 영화 이야기는 총기 규제에 관한 '히튼-해리스'라는 법안 통과를 놓고 거대 정치 권력과 치열하게 싸우는 로비스트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의 활약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변호사 출신인 신인 작가 조나단 페레가 감옥에 다녀온 로비스트 인터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각본을 집필했다. <위플래쉬>, <스포트라이트>에 이어 할리우드 블랙 리스트(아직 영화화되지 않은 시나리오들 중 호평을 받은 작품 리스트)에 선정된 각본으로 화제를 모았다.

 

냉혈하고 명석한 로비스트 ‘슬로운’

정치계 숨은 권력이라 불리는 로비스트 중에서도 승률 100%를 자랑하며 유능한 로비스트라 정평이 난 슬로운. 그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으며 지독한 워커홀릭인 로비스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스카우트하려는 ‘슈미트’(마크 스트롱)의 제안을 받아들여 총기 규제 법안 통과를 목표로 힘겨운 로비전쟁을 시작한다. 그에게 어설픈 인간미란 없다. 그의 인간관계,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 등은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모두 수단이 될 수 있다. 원칙과 윤리에 얽매이지 않기에 슬로운의 전략은 언제나 적보다 한 발짝 앞서 있다. 냉혈한이면서도 열정적인 로비스트, 슬로운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 제시카 차스테인은 직접 열한 명의 로비스트를 만나 깊이 있는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더 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더 포스트>는 세계적인 언론 <워싱턴포스트>의 '펜타곤 서류' 보도와 정부 압박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을 독려하고 보도 결정을 내린 <워싱턴포스트> 최초 여성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에 관한 이야기다. 1971년 <뉴욕타임스>는 트루먼부터 존슨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의 실패를 감추려고 했다는 국방부 비밀문서를 입수해 이를 폭로한다. 닉슨 정부가 안보 위협을 핑계로 <뉴욕타임스>보도를 금지하자 <워싱턴포스트>는 <뉴욕타임스>에 이어 특종을 터뜨리고자 사활을 건다. <더 포스트>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 국민을 위해 치열하게 취재하고 기사를 쓰며 언론의 사명을 지킨 저널리스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은 <워싱턴포스트> 발행인, ‘캐서린’

<더 포스트>의 주인공은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이다. 여성이 정치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게 당연시 여겨지지 않았던 1970년대 미국, 캐서린은 자살한 남편의 뒤를 이어 <워싱턴포스트> 발행인이 된다. 평소 사교계 거물답게 정치인들과 역대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던 캐서린이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사회에서 그의 발언은 쉽게 소거되곤 했다. 하지만 캐서린은 “기사의 수준과 수익은 상호적이다”라는 명제를 잊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국방부 기밀 ‘펜타곤 서류(Pentagon Papers)’의 보도를 책임지고 발행했다(영화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이후에는 미국 대통령 닉슨을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 보도까지 발행한다). 캐서린의 용기를 토대로 지역지에 불과했던 <워싱턴포스트>는 세계적 언론사였던 <뉴욕타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명성을 얻게 된다.

 

 

Writer

망원동에서 사온 김치만두, 아래서 올려다본 나무, 깔깔대는 웃음, 속으로 삼키는 울음, 야한 농담, 신기방기 일화, 사람 냄새 나는 영화, 땀내 나는 연극, 종이 아깝지 않은 책,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