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쉐르픽 감독이 영화감독으로서 이룬 성과는 놀랍다.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어느 업계보다도 보수적인 영화계이기에 여성으로서, 또 감독으로서 쌓아 올린 그의 업적은 더더욱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감독이 어떻게 영화계에서 살아남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대신 영화로 유추에 볼 수 있다. 그의 영화 속 여성들은 처한 상황과 살아간 시대와 상관없이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동시에 사려 깊고 지혜롭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보게 한다.

* 본문에는 영화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욕망이자 용기, <언 애듀케이션>의 ‘제니’

17살 생일을 앞둔 ‘제니’는 옥스퍼드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모범생이다. 그는 대학 이후의 삶을 고대하며 하루를 버틴다. “대학에만 입학하면”, “옥스퍼드에만 들어가면”을 반복하던 제니 앞에 지금 당장 그가 원하는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데이비드’가 나타난다.

사실 똑똑한 제니는 알고 있었다. 옥스퍼드를 졸업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다른 사람과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주위에 있는 여성들이 학창시절 이룬 성취와 상관없이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아빠의 비위를 맞추며 사는 엄마,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지만 고등학생의 작문을 해석하는 게 고작인 선생님. 공무원의 길도 있다는 교장 선생님. 그렇기에 자신 앞에 놓인 뻔히 보이는, 그의 표현에 따라 ‘죽은 것과 다름없는’ 길을 대신해 데이비드의 손을 잡는다.

영화는 1960년대를 다루고 있기에 지금의 상황과는 매우 다르다. 지금의 우리 앞에는 자신의 삶을 개척해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은 것은, 우리 앞에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모두 한 명의 제니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어 하는.

결국 제니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가 예전과 같이 옥스퍼드를 위해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 그 스스로 이 길을 선택했다는 것. 이는 하나이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것과 같다.

 

현실 속 이상 찾기, <원 데이>의 ‘엠마’

1988년 7월 15일, 영화는 주인공인 ‘엠마’와 ‘덱스터’의 대학 졸업 날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영화는 매년 7월 15일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며 그들의 삶과 사랑에 대해 관찰하듯이 보여준다. 긴 세월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가, 서로를 외면했다가 또다시 만나 사랑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여정을 본 관객들은 대부분 이 영화를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만 귀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한 여성이 수많은 선택으로 일군 사랑과 우정, 그리고 커리어에 관한 이야기다.

엠마는 작가 지망생으로 졸업과 함께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다. 낡은 아파트에는 양파 냄새가 깔려 있어도 타자기와 책이 있고, 자신이 런던에 있으니 좋다고 말하는 그는 작가로서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들은 일상의 전부가 되어 버리고, 그를 항상 응원해주던 친구는 유흥에 취해 자신조차 돌보지 않는다. 새로 생긴 남자친구는 능력도 유머도 사랑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꿈을 저버리지 않는다. 실망할지언정 절망하지 않고, 좌절해도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상과 감정을 좀먹는 친구는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강단 있게 끊어낸다. 그러나 그 친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초라한 모습으로 그를 찾아오면 진심으로 마주 안아줄 줄 안다. 그는 누구보다도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기준을 잃지 않고 현실 속에서 이상을 만들어낸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실을 살아내면서도 자신의 행복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극 중 어느 인물은 그에 대해 이런 대사를 남긴다. “엠마는 당신을 사람 만들었고, 그 대신 당신은 엠마를 행복하게 만들었죠.”

 

여성의 목소리를 녹여내는 것, <아름다운 날들>의 ‘카트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 런던은 전쟁의 공포와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슬픔과 우울함이 가득했다. 그런 시민을 위로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영화가 만들어지곤 했지만, 현실과는 극명하게 다른 이야기에 영화관은 조소와 야유만이 가득했다. 이에 각본가 ‘톰’은 여성의 목소리를 스토리에 담기로 하고, ‘카트린’을 섭외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고, 언제나 배우들과의 논쟁에 휩싸이면서도 카트린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듯 한 명의 여성이 포기하지 않자 영화는 큰 변화를 맞는다. 보조적인 역할만 담당하던 여성 캐릭터가 부각되자 전쟁의 메시지만 강조하던 영화가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카트린은 여성의 역할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 함께할 때의 조화를 추구한다. 덕분에 남성주의적 시각에 젖어 있던 그의 동료들도 성별을 넘는 협업의 가치를 깨닫는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영화계에서는 여성을 보기 힘들다. 여성인 배우들은 자신이 연기할 주체적인 캐릭터가 없고, 선택의 폭이 좁다고 주장한다. 또한, 론 쉐르픽 감독을 소개하는 수식어에도 항상 ‘여성 감독’이 달린다. 결국, ‘아름다운 날들’은 여성으로서 영화계에서 고군분투했을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된 영화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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