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때는 그렇다.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전달되는 것들이 너무 화려해서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들리는 것이 너무 많아서, 너무 소란스러워서 아예 귀를 닫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글’을 떠올린다. 형태나 들리는 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나의 눈과 뇌에 닿아 ‘언어’가 되었을 때, 시각 청각적으로 무궁한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들을.

글이 시작되는 첫 문장과 단어를, 글이 끝나는 맺음말들을 어떤 매체가 그를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있을까. 책장이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느끼는 유연한 긴장감을, 그 어떤 이미지 컷의 변화가 따라갈 수 있을까. 언어와 문학과 예술이 담긴 ‘책’들은 오랫동안 굳건하게 인류의 곁을 참모처럼 보필해왔다. 그렇기에 아무리 영상과 사운드 미디어가 한계 없는 발달을 이루어도, 책에 대해서만큼은 ‘아직은’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싶다. 아직은, ‘책’들이 주는 그 느리고 보편적이지만, 그만큼 확장적인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뉴콘텐츠의 발원지라고 하는 한국에서 아직도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작업을 놓치고 싶지 않다. 여전히 종이 위에 세계를 수놓고 있는, 의미 있는 독립 출판사들을 소개한다.

 

1. 6699 press

따옴표의 모양을 본떠 만든 특별한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독립출판사인 곳이 있다. 이곳의 슬로건은 “긴 호흡을 가진 좋은 글”이다. 6699 프레스가 가진 이 슬로건은, 계속해서 짧게, 짧게, 더 짧게! 가 슬로건인 한국 콘텐츠 시장과는 (어쩌면)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긴 호흡을 길게, 느리게, 가지고 간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이 출판사는 여전히 잊지 않고 있는 듯하다.

6699 프레스는 지금까지 이러한 슬로건을 가지고 특색 있는 책들을 발간해왔다. 특히 이 고유한 시선은 마이너리티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섯>(2015) 이라는 책은 성 소수자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들을 완화하고 해결해가길 위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사람들의 손에 손에 전해져 읽히는 책이 되기 위한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기도 하다. 후에 나온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11>은 역시 살아남기 힘든 구조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여성 디자이너들의 인터뷰를 담은 인터뷰집이다. 이 외에도 새터민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는 서울에 산다>와 가장 최근에 발간되어 주목을 받은, 청소년 성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은 <너의 뒤에서>가 있다.

6699 프레스의 책을 읽다보면 단 한가지, 이런 문장이 떠오른다. 역시 사람을 위한 책의 호흡은, 느릴 수밖에 없나보다, 라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2.  Warm Grey and Blue (웜 그레이 앤 블루)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이라는 책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우울증에 관한 수필들로 묶어진 이 책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지만, 이제는 기성 출판사에서 출판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현재는 위즈덤 하우스에서 판매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은 웜 그레이 앤 블루라는 출판사에서 처음 펴낸 책이다. 권태와 무력, 방어, 그리고 낮아진 자존감으로 점철된 우울들. 그 깊은 우울함에 관한 책은, 당시 ‘우울증’ 소재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때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훤히 그 증세를 말하지 못하는 폐쇄적인 한국 사회에서, 우울증은 겪은 이들의 글을 담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라는 메시지는,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는 단비와 같은 존재였으리라.

웜 그레이 앤 블루, 라는 다소 따뜻한 우울감을 가지고 있는 이름답게, 이 출판사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을 비롯하여 <폐쇄 병동으로의 휴가>, <망가진 대로 괜찮잖아요>, <같은 향수를 쓰는 사람> 등 지금껏 드러낼 수 없었던 우울과 아픔에 대한 책을 발간하고 있다.

웜 그레이 앤 블루의 책을 읽을 때마다, 회색으로 시들었던 마음이 따뜻하게, 맑게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느낌은 너무 들뜨지 않게, 잔잔한 수면처럼 일렁이며 슬픔을 낮게 받쳐준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그립거나, 그 이야기가 듣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책들을 읽어보길 권한다.

 

3. 도서출판 ‘움직씨’

오로지 퀴어, 페미니즘을 위한 도서를 출판하는 출판사가 있다. 바로 ‘움직씨’이다. ‘움직씨’ 출판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퀴어 페미니즘 출판사로 정의하며, 감각과 혁명을 중시하는 작가들이 만든 출판 그룹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 <당신 엄마 맞아?>를 출판한 뒤, 멈추지 않고 퀴어 페미니즘 관련하여 사람들이 접하기 어려운 책들을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퀴어’면 퀴어고, ‘페미니즘’이면 페미니즘이지, 퀴어 페미니즘은 무슨 말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퀴어 서사 또한 역시 ‘남성 게이’를 위주로 소개됐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직 한국에는 특히나 여성 퀴어의 서사 발굴이 매우 필요하다. 퀴어 여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과 가능성을 새로이 발굴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움직씨 출판사의 책들은 ‘퀴어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에 맞는 다양한 외내피를 가진 책들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만화, 문학, 그래픽 노블, 어린이 책에 구애받지 않고, 형태와는 상관없이 주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책들을 출판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최근에는 <악어 노트>라는, 대만의 퀴어 컬트 책을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소개했다.<악어 노트>는 대만에서 실험적인 문학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구묘진’ 작가의 작품으로, ‘레즈비언’에 가시적, 비가시적으로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에 맞서 그에 걸맞은 반항적이고 대담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도 <코끼리 가면>과 <펀 홈>, <첫사랑> 등을 펴내며, 세계 각지의 퀴어 페미니즘 문학 등을 한국에 소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계속해서 모를 수도 있는, 감춰진 결의 이야기들과 가능성을 선보이는 움직씨 출판사. 그 작업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성 출판사가 담지 못했던, 삐죽 삐져나오고, 흘러넘쳐 버린 이야기들을 주워 담아 대중에게 선보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독립 출판사가 아니면 담아질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순간 우리나라에 이 출판사들이 매우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