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과 2019년은 여성 감독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해로 자리 잡았다. 국내 유수 영화제에 ‘장편’ 작품을 올린 여성 감독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수치와 상관없이, 여성들은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특히 단편 섹션에서 그들의 활약은 언제나 눈이 부셨으며, 재미있고도 의미 있는 작품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편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 장편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왜 그럴까. 영화를 만드는 여성으로서, 이에 대한 고민을 쉽사리 놓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영화계는 여성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같은 여성이라면 매우 공감하고 이해가 갈 만한 감정선을 제작 지원 심사위원들은 전혀 이해를 못한다든지, 이미 너무나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한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로 치부한다든지의 일들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로맨스’에 특화된 것은 ‘여성’이다, 라는 일말의 편견과는 달리, 통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오히려 여성 감독들은 로맨스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 받았던 일상성의 회복이나,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 피해자성의 타파 등에 관심을 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은 경향은 2019년 개봉을 앞둔 여성 감독들의 첫 데뷔 장편 영화들을 소개하며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1. 김보라 감독, <벌새>

‘조용히 영화제를 휩쓴 한국 영화’라는 기사의 카피라이터를 본 적이 있다. 그 헤드라인을 보고 조금 화가 났다. 이 영화는 단 한 번도 ‘조용히’ 상을 휩쓴 적이 없다. 한국 언론만이, 뒤늦게 조명했을 뿐이다. 봉준호 감독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 마치 영화계 내 ‘금메달’을 딴 것처럼 전국에 일파만파로 퍼졌을 때도, <벌새>는 이미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제너레이션 부문 대상을 받았고, 이스탄불 영화제에서도 골든 튤립 (대상)을 받은 바 있다. 이미 10개 이상의 해외 영화제에서 유의미한 상을 받았고,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3관왕, 시애틀 국제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야 조금씩 한국 언론을 통해 소개되기 시작했다.

영화 <벌새>는 성수대교가 붕괴하던 1994년, 중학생 은희의 시선을 따라간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은희의 외침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는 영화다. 영화에는 은희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은희의 가족들, 친구들, 선생님들, 남자친구. 은희는 서툴지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가고, 그 안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영지 선생님을 만난다. 그 후, 은희의 마음과 절박함은 절묘하게도 성수대교 붕괴와 이어진다. 중학생 여자아이의 세계가 이렇게 다양하고, 깊고, 구조적일 수 있구나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다.

김보라 감독은 이스탄불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한국에서 여성 감독으로 장편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았는데 이 상이 마치,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라는 이야기처럼 들려서 감사하다”

영화 벌새는 엣나인필름 배급으로 2019년 8월 29일, 개봉이 확정되었다.

 

2. 안주영 감독, <보희와 녹양>

2019년 5월에 개봉한 안주영 감독의 <보희와 녹양>은 편안한 영화다. 영화는 이름을 바꾸고 싶은 남중생 ‘보희’가 둘도 없이 친한 친구 ‘녹양’과 함께 자신의 생부를 찾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심하고 섬세한 남자아이 보희에 비해 씩씩하고 당찬 친구 녹양은,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어른들의 세계에 도전한다. 관객들이 편하고 재미있게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는 안주영 감독의 바람처럼, 조금은 어두울 수 있는 내용을 통통 튀는 재치 있는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안주영 감독은 <옆구르기>라는 단편으로 주목받은 신예 감독이다. <옆구르기>는 한 남자아이를 짝사랑하는 여중생이 옆구르기 시험을 잘봐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를 연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단편에서도 청소년들만의 예민한 한 시기와 감정을 섬세하고도 재치있게 그렸다는 평을 받았던 만큼, <보희와 녹양>에도 안주영 감독의 이러한 장점은 고스란히 영화에 드러난다. 어떠한 편견어린 단어에 갇힐 수 없는 그 시절, 그때 아이들의 이야기들. 따가운 여름 햇살만큼이나 눈부시다.

<보희와 녹양>은 아직 개봉 중이며, 상상마당 시네마, 에무시네마, 인디스페이스와 같은 독립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3. 유은정 감독, <밤의 문이 열린다>

2018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문을 연 것은 여성 감독의 호러 영화였다. 바로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이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무력하게 보내던 혜정은 유령이 되어 자신의 자취방에서 눈을 뜬다. 불의한 사건이 휘말려 죽음을 맞이한 그는 죽음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영화는 “유령이 되면 시간이 역행한다”라는 설정을 두고 혜정의 시선을 따라간다. 유령이 되고 나서, 시간을 역행하며, 그제야 ‘연결될 수 있었던’ 수많은 관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호러 영화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진정한 공포는, 혜정이 유령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포기했지만, 실상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들, 연결된 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들을 그가 ‘죽고 나서야’ 깨달았다는 점. 후회하고 다시 손을 내밀어보고 싶지만 이제 사라져야 한다는 점. 그 막막함이 오롯한 공포로 다가온다. 되돌아갈 수 없다는 그 지점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2019 개봉을 목표로 배급을 준비하고 있다. 혜정의 표정과 그의 서사가 스크린을 가득 메울 수 있길 기대해본다.

 

“누구의 도약이든, 우리 모두의 도약이야”

영화 <히든 피겨스>에 나온 대사다. 아직 한국 영화계 여성 감독을 설명할 때, 이 대사를 인용해야 하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장편 영화를 만드는 여성 감독의 도약은 결코 ‘개인의 성취’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곧 다른 여성 감독들의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적용된다.

평범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바램을 여기에 적어본다. 이들의 영화를, 오래오래 보고 싶다.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