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뮤지션들이 각자의 언어로 아픔을 기록한 일기장이 있다. 남다른 시선으로, 누군가는 솔직한 언어로, 또 다른 누군가는 절망과 자조의 언어로. 초여름 더위도 잊은 채 이야기를 전하는 국내 신보 6장을 모았다.

* 앨범 발매 최신순

 

향니 <누구보단> (19.07.04 발매)

"혹시 난 쟤가 되고픈 걸까? 아니면 난 이미 돼버렸을까?"

불행의 씨앗은 어떻게 심어지고, 우리는 그로부터 어떻게 벗어날까? 사람들은 결코 그것이 옳지 않음을 이해하면서도 많은 순간,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의 상대적 우열을 비교함으로써 행복과 불행을 감지한다. 향니의 일기는 이러한 부끄러운 속물성을 가감없이 끄집어낸다. 내가 누구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 난 도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건지. 이와 같은 자문 속에서 이들은 단순한 결론을 내린다. 그저 "혼자가 되긴 싫"다고. 이는 '지금 이 순간'의 향니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불행을 벗어나는 어렵고 복잡한 진리보다 간편한구원을 갈망하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하다.

'누구보단' MV

인디포스트에서 2018년 첫 EP 발매를 소개한 바 있는 향니(링크)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수상 출신의 개성 강한 실력파 밴드다. 구심점인 이지향의 '쨍'한 보컬과 개성 넘치는 비주얼, 화려한 사이키델릭 건반 연주와 드라마틱한 음악의 구조가 특징인 팀이다. 4인조였던 이들은 밴드를 2인조로 재정비한 뒤 지난 4월 <싸움났어/바이러스의 편지>를 발매했다. 2인조로서 두 번째 앨범인 이번 싱글은 향니의 장기인 사이키델릭한 신스사운드와 재기 넘치는 가사가 주를 이루면서도, 이전보다 가사와 프레이즈가 단출하게 반복하는 구성을 통해 통속적 메시지의 일상적 느낌과 음악의 몽환적인 인상을 교차하는 시도를 선보였다.

향니 페이스북
향니 이지향 트위터

 

천용성 <김일성이 죽던 해> (19.06.26 발매)

"언젠가는 가야할 길 돌아온 그곳에 아직 남아있던 당신의 시간에 져버린 주름에 옛날 생각 나요."

생각난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 숙제로 일기를 쓰기 위해 오늘 있었던 일을 억지로 쥐어짰던 순간들이. 하지만 사실 일기에는 오늘의 일만 적히라는 법이 없다. 어제의 일이든, 그제의 일이든 그것이 오늘의 '생각'이라는 게 핵심이다. 천용성은 멀리 지나온 일상의 단편들을 돌이켜 이를 요즘의 생각으로 복원한다. 앨범 제목부터 '김일성이 죽던 해', 그러니까 1994년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이 앨범이 오롯이 1994년의 기억인 것은 아니다. 이 기억에는 가까운 과거나 먼 과거도 존재하며, 누구나처럼 좋은 기억도, 아픔도 존재한다. 중요한 건 망각하지 않은 채 그것을 솔직하게 재구성하는 것. 나름의 의미들로 충만했을 사건들은 마치 텅빈 무대 위 독백과도 같은 가사를 통해 차분하고도 생생한 현재의 사건으로 되살아난다.

'대설주의보' MV

지난 6월 26일 발매한 <김일성이 죽던 해>는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의 데뷔 앨범으로, 그의 지난 10년간의 기록이다.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이 변하고, 뭐가 변하지 않았을까?' 지난 시간을 대하는 절대 가볍지 않은 그의 태도와 이를 곱씹는 고민들이 앨범에 빼꼭히 담겨 있다. 동시에 다양한 색깔로 빛나고 있다. 때로는 덤덤하고 염세적이기까지 한 포크의 회색빛으로, 때로는 아련하게 추억을 환기하는 1990년대 팝발라드의 황금빛으로. '순도 1,000% 퓨어 인디 포크'라는 홍보 문구는 자백하듯 신선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그저 수식에 불과하다. 발라드, 인디음악, 록, 포크, 일렉트로니카 등 각종 포털사이트에 다양한 장르로 소개된 앨범의 정보가 그의 음악을 소개하는 가장 진정성 있는 문구다.

천용성 인스타그램

 

민채 <아무렇지도 않던 날> (19.06.21 발매)

"넌 냉정했었어. 화창한 오후, 아무렇지도 않던 날"

일기장에 아무것도 적을 수 없는 날은 어떤 날일까? 특별한 사건이라고는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 중 하루? 어제와 똑같이 따분한 오늘? 그러나 특별한 아픔과 괴로움의 순간이 찾아오면, 일기장에 뭐 하나 적을 것 없이 별일 없었던 어제가 미칠 듯 그리워진다. 민채는 바로 이 순간을 노래한다. 아무렇지 않던 날이 아무렇지 않지 않은 날이 되는 순간을. 변해버린 화자의 세상과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바깥세상의 간극이 화자를 더욱더 아프고 괴롭게 하는 순간을.

'아무렇지도 않던 날' MV

어렸을 때는 클래식피아노를, 실용음악과 재학 시절에는 전공으로 재즈피아노를 쳤던 그. 오랫동안 주변의 권유에도 가창력에 확신이 없다는 이유로 앨범을 내지 않던 민채는, 이제는 솔직하게 노래를 할 수 있으리란 확신으로 2011년부터 뒤늦게 창작을 시작해 2013년 데뷔 EP <Heart Of Gold>를 내놓기에 이른다. 긴 시간 동안 자기 목소리에 대한 고민과 확신이 켜켜이 쌓였기 때문일까? 민채의 가사는 늘 흔한 가식 없이 일상과 풍경을 담아내는 보통의 언어와 감정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이번 신곡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창한 날씨는 말 그대로 "화창한 오후"로, 그리움은 그저 "그리움"으로. 달콤하면서도 반대로 한숨에 가깝게도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노래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어우러져 더욱 몰입도 높은 감정을 선사한다.

민채 페이스북

 

Yonko <D I A R Y> (19.06.13 발매)

"못난 건 다 내 뱃속을 지나 전부 배설해버려.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지금 나의 작은 아픔은 다른 이의 어떤 고통보다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다들 뻔한 말로 나의 아픔을 위로하지만, 막상 남의 말은 허공을 맴돌 뿐 진정한 위안이 되지 못한다. Yonko(욘코) '괜찮아'의 가사도 다르지 않다. "잘 생각해봐." "아픔은 생각보다 길지 않아." "내일이면 분명히 다 괜찮아." 모두 아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의 아픔이 괜찮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스스로 건네는 위로라면 말의 무게가 조금 달라진다.

'괜찮아' MV

Yonko(욘코)가 이번에 내놓은 이번 앨범의 타이틀이 애초에 'Diary'다. 주문처럼 반복하는 가사는 스스로 되뇌는 다짐이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런 반복되는 다짐의 일기를 통해 욘코는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남들처럼 "당연히 나도 똑같"다고. 꾸밈없는 다소 투박하고 안 예쁘게도 느껴지는 가사를 독특한 음색의 보컬과 트렌디한 비트에 자연스레 얹어 내보내는 R&B, 소울힙합 싱어송라이터 욘코. 그는 2016년 데뷔 후, 2017년 매드소울차일드에 합류해 데뷔 EP <TIIE>를 발매한 바 있다. 광활한 바다와 깊은 숲속을 빛바랜 중채도로 비추는 뮤직비디오의 영상을 따라가며, 주문 외우는 듯한 그의 몽롱한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생각하게 된다. '그래, 나도 괜찮을지도 몰라.'

욘코 인스타그램

 

전기뱀장어 <Lights of Yeon-nam> (19.06.13 발매)

"끝없이 부서지고 마는 저기 불빛처럼 우리의 무엇도 사라질까 두려워."

이별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존재'의 사라짐 또는 멀어짐을 뜻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존재를 옆에 두고 계속 환기할 수 있는 서로의 공동 기억이 사라짐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전기뱀장어는 연남동을 걷다가 밤거리를 비추는 불빛에서 이와 같은 슬픈 진실을 마주한다. "너를 참 많이 좋아했어" "아직 난 너를 좋아해" 때늦은 솔직한 마음을 나만의 일기장에 되뇌어 보지만, 이는 너에게 닿지 않고 밤하늘에 부서질 따름이다. "끝없이 부서지고 마는 저기 불빛처럼."

'Lights of Yeon-nam' MV

어느덧 데뷔 10주년을 맞이한 밴드 전기뱀장어. 거칠면서도 가볍게 통통 튀는 개러지록 사운드 위에 뜻밖의 지질하고도 섬세한 가사들을 얹어내는, 누구보다도 가장 인디팝다운 음악색을 묵묵히 지켜오고 있는 그들이다. 2016년 2집 <Fluke> 이후 비록 정규 앨범은 없지만 매년 꾸준히 싱글을 발표하며 생존을 신고하고 있다. 'Lights of Yeon-nam'은 흩어지는 불빛을 '너와 이별 후 사라지는 우리의 무엇'에 비유한 쓸쓸하고도 귀여운 곡이다. 비록 지금의 그 감정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허전하지만, 앨범 자켓 속 검은 고양이처럼 그 거리를 방황하다보면, 어느새 '오늘'을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기뱀장어 황인경 인스타그램
전기뱀장어 김이슬 인스타그램
전기뱀장어 이혜지 인스타그램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모래내판타지> (19.06.12 발매)

"화가 나고 또 화가 나고 또 화가 나는 망한 나라에서 산다"

'망한 나라'는 앞선 어떤 노래보다도 단순한 가사로, 가장 비관적인 현실을 읊조린다. 개인적인 사연이나 감정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네가 사는 모두의 현실이 답답하고 희망 없음에 화자는 분노하고 또 낙담한다. 앨범의 제목은 '모래내판타지'. 한때 서울 4대 전통 시장 중 하나인 모래내시장이 있던 곳이자, 뮤직비디오의 영상이 비추는 구남과라이딩스텔라(이하 '구남')의 작업실이 있는 곳.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또 찾고 있지만, 이제는 낡은 건물들만 즐비한 곳. 아마도 구남이 말하는 '판타지'란 현실로 올 가능성이 희박한 세계를 설명하는 좌절의 언어이자, 그런데도 그가 꿈꾸고 있음을 방증하는 희망의 언어이기도 할 것이다.

'망한 나라' MV

구남이 "우리는 깨끗하다"며 능청스럽게 "뽀뽀나" 하자며 들러붙던 때로부터 벌써 12년이나 흘렀다. 그 사이 대한민국은 4명의 대통령을 거쳤고, 약속이라도 한 듯 구남도 4장의 정규앨범을 발매했다. 3집과 이 앨범 사이에는 멤버를 교체하는 밴드 재정비의 시간도 있었다. 세월의 피로와 때문인지 사운드는 한껏 나른하게 가라앉았고, 모래내를 노래하는 앨범의 가사에는 '힘'보다 '자조'가 더 많이 섞여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남의 음악은 여전히 능청스럽고, 신비롭고 또 흥겹기까지 하다. "망한 나라에서 산다"는 절망의 언어를 이토록 웃픈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게 구남만의 매력일 터. 비틀거리며 할 말 다 하는 그의 일기는 마지막까지 절대 하고 싶은 말을 놓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이 현실을 전복하고 '끝없이 흐르겠다'는 듯이. 밴드의 리더 조웅은 BANA에 솔로로서 새 둥지를 튼 채 솔로 앨범 발매를 앞두고 있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페이스북
조웅 인스타그램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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