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떨어지는 꽃잎만 봐도 눈물을 글썽인다. 봄 햇살처럼 맑게 빛나는 얼굴과 간질간질한 감성을 지녔다. 순수하고 해맑고 싱그럽다. 지금까지 세상이 바라본 소녀들은 그래왔다. 하지만 전 세계에 소녀가 한두 명이 아닐진대 어떻게 소녀들을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소녀’다운 소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소녀’답다는 말조차도 성립되지 않는다.

소녀들도 소년들처럼, 아니 어른인 우리처럼 일탈을 꿈꾸고 방황을 하며, 좌절한다. 때론 그 과정이 과격하기도 하고 노골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아봤다. 욕망하는 소녀들이 나오는 영화들. 간질간질한 소녀 감성은 잊자. 여기 이 소녀들은 혁명을 꿈꾸기도 하고,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탈출을 꿈꾸기도 한다. 엄마의 남자친구를 탐내는 소녀는 또 어떤가? 영화 속에 그려진 소녀들을 가만히 보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비단 소녀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지만, 소녀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사실도….

 

<폭스파이어(Foxfire)>

<폭스파이어>는 사실 혁명에 관한 영화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패한 혁명에 관한 영화다. 배경은 1950년대 미국 뉴욕 북부의 소도시. 이곳의 소녀들은 모여서 화장을 하거나 쇼핑을 하지 않는다. 연애 이야기로 잡담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곳의 소녀들은 모여서 결의를 하고, 서로의 몸에 문신을 새기며, 비밀결사대를 만든다. 결사대의 이름은 ‘폭스파이어’. 힘을 합친 이들은 그녀들을 괴롭히는 동급생은 물론, 희롱하는 교사, 조카를 겁탈하려는 큰아버지까지 세상의 폭력과 학대에 맞서 싸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에 맞서는 소녀들이라니. 혁명을 꿈꾸는 소녀들이라니. 이 모든 게 참으로 낯설게 느껴진다는 건 그동안 소녀들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외면해왔다는 방증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소녀들의 통쾌한 복수극을 그린 영화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단순히 복수하는 것을 넘어서 조직원들이 함께 모여 살기로 하면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폭스파이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낡고 큰 집을 사서 함께 모여 사는 초반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돈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이들은 결국 범죄집단으로 전락한다. 타락해가는 <폭스파이어>의 모습은 좋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좋지 않은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남긴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쉬이 여운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통쾌한 복수 그 뒤에 이어지는 현실의 한계를 정면으로 보여주기에.

여러 명의 소녀들이 등장하는데 그 어느 소녀도 낯이 익지 않다. 알려진 배우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로랑 캉테 감독은 영화 출연 경험이 없는 비전문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이 영화를 찍었던 것이다. 배우들에게 즉흥연기를 시켰을 때 나온 자기의 언어를 실제 대사에 반영한다거나, 워크숍을 통해 서로 친해질 수 있도록 한다거나, 일부러 시간 순서대로 촬영한다거나 하는 등 감독은 비전문배우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시대극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를 그린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영화가 탄생했다. 영화 속 ‘렉스’나 ‘매디’ 등은 실제 1950년대 그곳에 살았던 ‘폭스파이어’ 멤버들처럼 느껴진다. 소녀들 간의 교류와 소통이 연기처럼 보이질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좌절된 욕망과 실패한 혁명이 더 와닿는다. 전문 배우를 썼다면 아마 이런 신선함은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폭스파이어> 예고편

 

<무스탕: 랄리의 여름(Mustang)>

이스탄불로부터 멀리 떨어진 터키의 어느 마을.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할머니와 삼촌의 집에서 사는 다섯 자매가 있다. 제목의 ‘랄리’는 그중 막내딸. 장난기 많고 웃음도 많은 다섯 자매는 어느 날 바닷가에서 소년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갇히게 된다. 그 이후 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신부수업을 받고, 산부인과에 가서 순결 검사까지 받는다. 이 모든 건 오직 하나, 결혼을 위해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결혼 따위는 없다. 할머니와 삼촌이 정한대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결혼하고 나면? 첫날밤을 치른 침대 시트를 시댁 식구들이 검사한다. 처녀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 모든 사실보다 더 놀랍고 끔찍한 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머나먼 과거가 아니라는 거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정확히 터키의 현재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스탄불 같은 대도시는 조금 낫다고 하더라도 터키의 대부분 지역은 아직도 이처럼 여성 인권이 바닥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섯 자매와 함께 이 집에 갇힌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큰소리로 웃어서도 안 되고 옷도 마음대로 입어서도 안 된다. 보고 싶은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마음껏 볼 수가 없다. 연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외출은 오로지 할머니나 삼촌과 함께일 때만 가능하다. 그마저도 할머니는 동네 남자들에게 자매들을 신붓감으로 선보이기 위해 외출을 한다. 그 어떤 탈출구도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느낌. 아름다운 영상미와 상반된다. 다행인 건 우리에겐 랄리가 있다는 것. 극이 랄리의 시선에서 진행되다보니 랄리가 그나마도 숨 쉴 구멍을 마련해준다. 다른 네 명과 다르게 랄리는 끝없이 탈출을 꿈꾸고 실제로 탈출을 행동에 옮긴다. 현실에 순응하고 억압과 학대를 받아들이기보다 어떻게든 이 현실에서 빠져나가고자 한다. 작은 야생마를 뜻하는 영화 제목 속 ‘무스탕’처럼 자유롭고 저돌적이다.

이 작품이 첫 작품이었던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감독은 사실 터키계 프랑스인. 터키가 배경이고 터키어로 연기하는 터키 배우들이 나오는 이 영화를 프랑스는 자국의 대표영화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로 올리기까지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2015년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어 레이블 유로파 시네마상도 수상했다. 아직도 이 세상 어딘가 이렇게 억압받는 소녀들이 있다는 것. 그걸 영화로 보여주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이것이 보는 동안의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꼭 봐야 하는 이유다.

<무스탕: 랄리의 여름> 예고편

 

<미니의 19금 일기(The Diary of a Teenage Girl)>

<‘미니의 19금 일기>라니. 굳이 19금을 강조한 한국어 제목 때문에 괜한 오해를 할까 두렵다. 물론 19세 미만 관람 불가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그런 ‘19금’과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평범한 열다섯 소녀 ‘미니’(벨 파울리)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미니의 성적인 판타지와 욕망이 주된 내용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10대인 미니를 성적 대상화를 하지는 않는다. 철저히 미니의 심리에 집중한다.

2002년 출판된 푀베 글뢱크너의 자전적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미니의 19금 일기>는 그래픽을 십분 활용한다. 미니의 심리와 욕망, 상상들이 감각적인 그래픽을 통해 드러나는 것. 이는 우리가 미니에게 더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 물론 보는 즐거움도 제공해준다. 그래서였을까. 배우 출신 여성 감독 마리엘 헬러의 데뷔작이었던 이 영화는 201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촬영상까지 받는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는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대상을 수상하는 한편, 서울청소년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2015년 뉴욕타임스에서는 평론가 3명이 만장일치로 올해의 영화로 꼽기도 했었다. 수상을 강조하는 건 제목과 줄거리 때문에 괜한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런 오해로 놓치기엔 참으로 아까운 영화이기에. 이 영화만큼이나 10대 소녀의 성적인 욕망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표현한 영화가 또 어디 있었던가?

<미니의 19금 일기> 예고편

 

<언 에듀케이션(An Education)>

이번엔 1961년 런던에 사는 열일곱 소녀다. 명문 옥스퍼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모범생. 학교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름은 ‘제니’(캐리 멀리건). 학교와 집, 공부밖에 모르던 제니 앞에 어느 날 매력적인 중년 남자 ‘데이비드’가 나타난다. 데이빗은 제니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상으로 초대한다. 비싼 선물과 고급 음식들, 꿈꾸던 곳으로의 여행 등 제니가 그간 동경해왔던 많은 것들을 선물한다. 이렇다 보니 열일곱의 모범생 소녀가 데이비드의 청혼에 대학 진학까지 포기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 하지만 이 영화는 로맨스물이 아닌 성장 영화이기에 데이비드의 이런 저돌적인 애정 공세에는 반전이 숨어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니는 한층 더 성장하게 된다. 교과서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깨달으면서.

이 영화는 <어바웃 보이>, <하이 피델리티>로 유명한 닉 혼비의 원작을 <원데이>의 론 세르픽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장점이 정말 많은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건 다름 아닌 주인공인 캐리 멀리건의 연기다. 데이비드의 애정 공세에 서서히 빠져들어가는 제니의 감정에 설득력이 생기는 건 순전히 캐리 멀리건의 연기 덕분이다. 그래서일까. 캐리 멀리건은 2009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슈팅스타상을, 2010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다.

수상내역을 언급하는 김에 <언 애듀케이션>이 믿고 보는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 수상작이라는 사실 또한 굳이 덧붙여 본다. 영화를 볼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

<언 애듀케이션> 예고편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ANSO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