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가 누빈 무대, 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을 소개하는 전시가 개막했다. 그 무대의 주인공은 10년 전 세상을 떠난 피나 바우쉬(Pina Bausch)였고, 이제는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이다. 회현동의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이 개관 이후 세 번째로 개최한 전시는 <페터 팝스트: White Red Pink Green 피나 바우쉬 작품을 위한 공간들>로, 무대예술가 페터 팝스트(Peter Pabst)가 피나 바우쉬를 위해 작업한 무대를 선보인다. 부퍼탈 탄츠테아터(Wuppertal Tanztheater)의 무대를 책임져온 페터 팝스트는 1980년부터 피나 바우쉬가 작고한 2009년까지 약 30여년간 피나 바우쉬의 오랜 예술적 동료로 함께 작업해왔다. 부퍼탈 탄츠테아터는 지금까지 <카네이션>, <봄의 제전>, <스위트 맘보> 등 8개의 작품을 한국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 무대를 기억하는 이라면 페터 팝스트의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는 이번 단독 전시가 특히 반가울 것. 또 공연을 보지 못한 이라도 무대예술에 관한 특별한 전시를 경험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피나 바우쉬는 새로운 장르 ‘탄츠테아터(Tanztheater = dance theater)’를 발전시키며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페터 팝스트의 파격적이고 드라마틱한 무대는 피나 바우쉬의 새로운 예술 장르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주요 작품 몇 가지의 무대를 재구성해 선보였고, 그것은 관람객이 단순히 바라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를 직접 걷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관람객 또한, 자기만의 춤을

전시장에 입장해 처음 만나게 되는 공간은 새하얀 눈밭이다. 피나 바우쉬는 ‘국가·도시 시리즈’를 기획해 공연했는데 ‘White’를 주제로 꾸며진 이 공간은 그가 1991년 스페인 마드리드 시와 협력해 만든 작품 <춤추는 저녁 ll>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 단 3번만 공연했던 작품의 무대를 되살리기 위해 전시장에 실제 자작나무를 옮겨왔고, 하얀 소금으로 겨울 풍경을 연출했다. 관람객들은 덧신을 신고 들어가 눈을 밟는 감각을 직접 느껴볼 수 있다. 무대라는 큰 공간을 연출해온 페터 팝스트에게 피크닉은 흥미로우면서도 넓은 무대를 표현하기엔 어려운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울을 활용해 확장된 느낌을 주고 있다.

조명이 내리비추는 가운데 붉은 장미가 깔린 두 번째 공간 ‘Red’는 들어서자마자 강렬한 인상을 준다. 5만 송이의 장미꽃을 사용해 언덕과 같은 공간을 연출한 이곳은 1997년 공연한 ‘국가·도시 시리즈’ 홍콩 편인 <유리창 청소부>의 무대 요소를 가져왔다. 관람객들은 꽃으로 뒤덮인 포근한 바닥을 밟고 언덕을 오를 수도 있다. 다음 전시실에서는 ‘Peter for Pina’라는 사진전이 펼쳐진다. 60여 점의 사진은 벽에 걸린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회전할 수 있게 설치됐다. 정지된 이미지를 담았지만, 전시실에서 천천히 유동하는 사진 작품들은 그 사이를 걸으며 감상하는 이들에게 생동감을 전한다.

이어지는 공간의 ‘Pink’는 1982년 작품으로, 2000년 LG아트센터의 개관공연으로도 선보인 바 있는 <카네이션>의 무대다. 공연 당시 무용수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꽃이 꺾였을 때 그들은 카네이션을 위로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관객들은 조심스레 꽃과 꽃 사이를 거닐어보며 자기만의 동작을 통해 퍼포머가 된 듯한 경험을 누리게 된다. 다음 전시실 ‘Green’에는 잔디가 깔린 공간을 통해 페터 팝스트와 피나 바우쉬가 처음 함께한 작품 <1980>의 무대를 재구성했고, 연결되는 루프톱에는 페터 팝스트의 아포리즘이 쓰인 천이 걸려 바람에 날리고 있다. 빔 벤더스 감독이 페터 팝스트를 인터뷰한 내용이 수록된 <Peter for Pina>에서 가져온 글귀들로, 피나 바우쉬와 함께 한 작업에 대한 소회와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엿볼 수 있다.

각 층을 오르는 계단에는 ‘국가·도시 시리즈’의 한국편인 <러프 컷> 공연 당시 페터 팝스트가 한국에서 촬영한 영상이 상영된다. 2005년 동대문 패션타운의 에스컬레이터를 오가는 사람들을 40분간 촬영한 것. 자작나무 숲이 있는 전시실부터, 계단, 루프톱까지 모든 전시 공간에는 공연에 사용했던 곡들을 모은 75분간의 음악이 연속해 흐른다.  

루프톱의 'Laundry' 설치 전경, 사진 제공 - 글린트

 

‘준비된 자유’를 누리는 시간

자작나무 숲의 공간인 White에 선 페터 팝스트, 사진 제공 - 글린트

페터 팝스트와 피나 바우쉬의 작업 과정은 매우 열려있었다고 한다. 불확실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조심스럽게 접근해가며, 무대 위의 세상을 모험하고 탐색하듯 작업했다고. 그렇게 완성된 무대는 자유로울 수 있도록, 정확하게 준비된 공간이다. 루프톱에서 이런 텍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만드는 이미지는 흥미롭거나, 재미있거나, 거칠거나, 놀랍거나, 유혹적이거나, 또는 추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나는 무대장치가 어떤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대가 하나의 세계이고 자신은 그 세계를 만들지만, 그곳을 누비고 탐색하고 무언가를 이끌어내며 창조해가는 이는 무대연출가가 아니라 무용수라는 의미다. 이전과 다른 낯설고 색다른 무대 위에서 자유롭고도 새로운 춤을 췄던 무용수들처럼, 이 전시를 보는 관람객들 또한 비슷한 경험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피크닉에 펼쳐진 페터 팝스트의 무대는 사진을 찍거나 그것을 공유하기 전에, 먼저 체험하고 느끼는 시간을 가져야 할 사색적 공간이다.

카네이션으로 가득한 Pink 공간, 사진 제공 - 글린트

 

<페터 팝스트: White Red Pink Green 피나 바우쉬 작품을 위한 공간들>

일시 2019. 5. 25~2019. 10. 27, 오전 10시~오후 7시(오후 6시 30분 입장 마감, 월요일 휴관)
장소 서울 중구 퇴계로6가길 30 피크닉 piknic
입장료 일반(20세 이상): 15000원, 청소년(14~19세): 12000원, 어린이(13세 이하): 10000원
* 작품에 대한 개별적 설명이 없는 대신, 전시장에서 guide.piknic.kr에 접속하면 정보와 함께 관련 공연 영상을 볼 수 있다.

 

Writer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 <마음이 어렵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여행서 <Tripful 런던>, <셀렉트 in 런던>이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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